213화.
-뱀파이어의 성 (3)
“강세기 플레이어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허…. 괜한 연락을 받은 건가?”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정우의 시선이 강세기의 뒤편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자리.
하지만 헛웃음과 함께 누군가가 등장했다.
“……기도 안 차는군요.”
사사키 후유였다.
“절 감지한 건가요?”
정우는 대답하지 않고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사사키 후유는 정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요. 한정우 씨.”
정우가 사사키 후유와 악수했다.
“…나와는 태도부터가 다르군.”
“섭섭하신가요?”
“웃기는 소리.”
강세기가 코웃음을 쳤다.
사사키 후유와 악수를 마친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메아리.’
-맞아요…. 성(城).
‘으음. 뱀파이어의 성이 완성이 되었다고?’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의 정우는 뱀파이어의 성을 단신으로 무너트렸다.
하지만 놈들이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그 후로 정우는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정을 내려야 해요. 성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준비된 마법으로 단번에 날려 버리든가.
‘아래서부터 공략하든가?’
-…아래서부터 공략하시겠죠?
‘그래야지. 바로 공격해서 부술 자신도 없지만, 여기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다 죽을 테니까.’
입맛이 썼다.
“저 관을 다 부수면 성이 나타나겠지.”
“…성?”
“저 관은 제물이에요.”
“성이 나타나는 제물?”
“맞아요. 666개의 관을 전부 부수면 성이 나타나죠.”
“…등장시키는 게 맞는 건가요? 아니면 미루는 게 맞는 건가요?”
“잡는 게 맞아요. 이곳에는 다른 보상도 존재하니까….”
‘이곳?’
유서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곳에 있는 놈들의 상태가 이상한데?”
“감염되고 있으니까요.”
“…감염?”
뱀파이어를 죽임으로써 생기는 피의 안개는 보통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마력에 민감한 마스터조차 놓칠 정도로 그것은 은밀한 감염이었다.
“성이 나타나기도 전에 감염부터 된다고?”
“중간에라도 사실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끝까지 부수게 만들겠다?”
그런 의미에서 데니 라이언의 참전은 최악이었다.
S급의 무력을 레이드에 참여한 딜러처럼 선보이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활약하고 있는 저 멍청이를….”
“끌어내야죠.”
“후우.”
나지막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관을 부수는 걸 막기라도 하면 당장에 적대심을 드러낼 행태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저 안으로 들어가서 놈을 밖으로 빼내는 게 가능한 건가? 저놈도 들어가서 땅을 딛자마자 바로 변했다면서?”
“그건 제가 합니다.”
강세기의 우려에 정우가 나섰다.
“…저 감염에 안 당할 수 있나요?”
유서린이 걱정 어린 투로 물었다.
팀 버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걱정은 단순한 걱정이 아닌, 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라도 날 법하다는 듯한 걱정이었으니까.
‘헌터……가 아닌가?’
때문에 의문이 들었다.
헌터라면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B급 이상이 될 리가 없었으니까.
감염이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감염이 된 이후의 사태를 걱정하는 지금의 대화와 태도는 그의 사고를 잠시 마비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우의 그 말에 유서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가장 먼저 하실 건?”
“저 사자부터 잠재워야죠.”
“…….”
정우가 앞으로 나섰다.
유서린은 가만히 서 있는 김하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가만히 있어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경호한다면서요?”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은 내가 먼저 감당할 거다. 저건… ‘주군’이 해야 할 일이야.”
“으…… 그 주군이란 소리는 시대착오적인 단어 아닌가요?”
“나야말로 자네가 이런 성격이란 게 놀라울 따름이군.”
김하란의 말에 유서린이 다시금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고정했다.
저곳은 불길의 극치(極致)였다.
입장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질 법한 불길이 가득한 곳.
저 영역에 발을 디딘 사자는 민폐 그 자체였다.
어떻게 사자를 잠재울 건지.
공중이며 지하까지, 폭넓게 퍼져 있는.
‘붉은 안개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연구소의 물건이 사라지고, 중국의 주석의 초조함이 극에 달할 무렵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던 정우는 주석과의 회담 대신 미국을 택했다.
장웨이의 분노가 땅을 진동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정우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 때문일까.
유서린은 한정우가 미국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일본행으로 쌓인 서류마저 뒤로 미룬 채 공간이동마법진에 몸을 실었다.
가볍게 땅을 박차는 정우의 뒷모습을 보았다.
허공을 뚫고 나타나는 지팡이가 푸르게 빛났다.
이윽고 뿜어지는 푸른빛이 붉은 안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붉은 안개는 성기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유서린의 눈에만 흐릿하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푸른 발광만 볼 뿐이었다.
서서히 영역을 넓혀가던 푸른빛은 이윽고 어느 경계를 기점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데니 라이언….’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표정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또 다른 사자를 보는 듯한 경계심과 함께 난폭한 포효가 담겨 있었다.
“크아-!”
* * *
‘자이언트의 사자라….’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호쾌한 전투는 눈요기에는 그만이었으니까.
‘…귀찮군.’
하지만 막상 그와 대치하게 된 정우의 평가는 박했다.
호쾌한 전투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있잖아.’
기억의 대부분을 되찾고 난 뒤 정우가 끊임없이 떠올렸던 건 의외로 마법이 아니었다.
친우들의 능력.
자신의 곁에서 적을 상대하며 움직였던 모습.
자신의 실력이 우세하다며 서로 으르렁거리며 검을 맞댔던 당시.
훈련 방법.
전투 방법과 움직임에 대한 토론.
당시엔 터무니없이 나약한 육체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것들을 되새겼다.
혼자만 떨어졌던 이중 던전.
튜토리얼의 목적이 재능을 개화시키는 것에 있다면, 정우의 재능은 마법에만 국한된 게 아니란 걸 의미했다.
무기를 들어야지만 가능했던 움직임.
처음으로 주어졌던 삼단창이라는 무기.
‘플레이어란 시스템은 내게 마도사 이상의 능력을 주려 하고 있어.’
덕분에 듀얼 클래스.
마스터라는 직업을 손에 쥐었다.
성기사와 버서커란 조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대한 직업의 조합.
덕분에 정우는 친우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데니 라이언의 주먹을 피한 정우가 몸을 빙글 회전했다.
순식간에 등 뒤로 돌아간 정우의 지팡이 끝이 툭, 그의 등을 찔렀다.
움찔거린 데니 라이언이 상체를 돌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상체를 숙인 정우가 다시 지팡이 끝으로 복부를 찔렀다.
움찔거린 데니 라이언의 연격이 이어진다.
피하고 쳐 내고.
정우 역시 빠른 움직임으로 데니 라이언의 공격을 피하여 연신 지팡이 끝으로 데니 라이언을 가격했다.
“…느려진다.”
김하란이 중얼거렸다.
데니 라이언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거. 괜찮은 거 맞나?”
강세기가 눈을 반개하며 의문을 표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상황은 묘했다.
“그러게요…. 왜, 다 부수고 있는 거 같죠?”
유서린도 멈칫했다.
정우의 움직임에 놀랐다.
테스트 당시 보였던 움직임도 빠르고 예리해서 등급에 비해 뛰어나다고 판단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월등해. 나와 싸워도… 될 정도로.’
하지만 그런 것치고 움직임이 묘했다.
데니 라이언의 헛손질은 시간이 갈수록 난폭해졌고,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양은 횟수마다 거듭 많아졌다.
그럴수록 부서지는 관의 개수 또한 급증했다.
데니 라이언이 지쳐 가는 것만큼 관의 빈자리 역시 눈에 도드라졌으니까.
“일부러 부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나?”
“뱀파이어의 성이라면서. 그걸 불러내면 진짜 전투가 벌어질 거잖아요.”
“음…….”
이야기를 듣던 팀 버튼이 끼어들었다.
“혹시… 전투 준비는 따로 안 하십니까?”
“전투 준비?”
“아아. 그렇군. 전투 준비….”
S급만 다섯 명이었다.
결계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 플레이어의 수가 많았지만, 지원군은 물론 대기 중인 수도 적잖았다.
“준비를 하겠습니다.”
팀 버튼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확실히… 협회장답군.”
강세기는 여러 말 없이 상황을 인지한 듯 전투 준비에 나선 팀 버튼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아무래도 저걸 다 부숴야 하는 모양이군.”
“그렇겠죠. 그게 아닌 이상, 일부러 저렇게 움직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관이 전부 부서지면 안 될 것처럼 굴더니 희한하군.”
“설명이나 제대로 해주면 좋을 텐데….”
유서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사이, 데니 라이언은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고 있었고.
“…이젠 나도 보이는군.”
짙어진 운무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저 안에서 버티는 걸까요?”
유서린이 반개한 눈으로 정우를 살폈다.
“그건 나도 모르겠군.”
“으음.”
저 붉은 안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옅을 때부터 데니 라이언의 정신을 장악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S급의 플레이어 정도 되면 직업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의 저항력을 지니게 된다.
육체적인, 마력적인.
마력적인 부분은 마력 방어력을 뜻했다.
저주나 세뇌 따위의 것은 마력 방어력으로 어느 정도 이겨 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당해 버렸다는 것은 모두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력 방어력이 높은 걸까요?”
“S급이 허무하게 당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높아야 하는 거지?”
“……몇 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강세기는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연락책으로 쓰려고 했던 한정우가 자신을 구했을 때.
그리고 일본의 미해결 지역을 해결했을 때.
유서린조차 패배를 직감한 몬스터를 압살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이미 그는 한정우를 규격 외 괴물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진짜로 마력 방어력이 S급의 몇 배나 된다면.
‘진짜… 괴물이겠지.’
마법사인 자신으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뭐… 싸울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려나.’
강세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우는 쓰러진 데니 라이언을 들어 뒤로 던졌다.
날아오는 데니 라이언을 김하란이 받아들었다.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그의 육체가 축 늘어졌다.
“…마력이 한계에 달했군.”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
마력 탈진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유서린은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방어 태세인가?”
유서린의 무기는 두 개였다.
하나는 양손 무기인 소드 브레이커.
하나는 투박한 형태의 일반적인 장검과 방패.
소드 브레이커는 버서커로서의 능력을 백분 발휘할 때 사용하는 무기였고.
“아무래도 지켜야 할 인원이 많을 것 같으니까요.”
검과 방패 조합은 성기사로서의 능력을 백분 발휘할 때 사용하는 무기였다.
지금의 유서린은 살의를 억누른 성기사였다.
방어와 치유.
두 가지에만 집중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옆으로 데니 라이언을 뒤로 내팽개친 김하란이 붙었다.
“내가 지키지.”
“든든하네요.”
김하란이 눈을 빛냈다.
하늘로 비산하는 플레이어의 수가 급증했다.
각자 경계 밖에서 날아오는 플레이어를 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열 개의 관을 남겨둔 채로.
정우는 모든 플레이어를 최초의 결계 밖으로 모두 내보냈다.
‘뱀파이어의 성이 등장할 땐,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성 안의 존재들은 제물이 된 수하들 따위와는 달랐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놈들.
하지만 성이 등장할 때야말로 기습하기에 적합한 순간이었다.
‘보니까 메테오에 트라우마가 있던데….’
씨익 웃은 정우의 마력이 급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