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뱀파이어의 성 (1)
쿠릉!
그것의 변화는 갑작스러웠다.
태고의 자연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그랜드 캐니언.
그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징후도 없었고, 누군가의 인위적인 테러가 자행된 것도 아니었다.
마력 수치는 변함이 없었으며, 미국의 컨트롤 타워조차 감지해 내지 못한 이변.
[ 그랜드 캐니언에 던전 브레이크 발생! 천여 개의 관이 의미하는 것은? ]
일본에서 시작되어 북한과 중국으로 흐른 사태에 쏠린 관심 때문에 뉴스는 짤막했지만.
“……!”
당사자인 미국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미국 애리조나주의 플레이어 협회장 팀 버튼은 식은땀을 흘렸다.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알았다.
갑작스러운 경고음.
F급에서 시작하여 S급까지 다다른 마력까지.
“곧 올 겁니다….”
“오, 하나님. 던전 브레이크라니……!”
그것도 무려 S급 던전 브레이크였다.
미국의 땅은 넓었다.
그만큼 손대지 못한 지역도 더러 있었고, 운이 나쁜 장소도 존재했다.
여러 미해결 지역이 그러했으며.
S급 플레이어를 네 명이나 투입하고서도 끝내 한 마리를 잡지 못한 드레이크의 둥지 또한 대표적인 미해결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건.
“……S급. 그 위에 또 다른 단계가 있었다면, 저건 분명히 S급을 뛰어넘을 거야!”
위성으로 띄운 영상은 끔찍했다.
협곡의 일부가 무너지며 만든 흙먼지는 사라졌지만.
저 검은 오러를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 건지…….
예의 던전 브레이크처럼 수많은 몬스터들이 흉성을 터트리며 움직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먼지가 가라앉은 협곡은 고요했다.
검은 오러만 아니었다면 자연 현상이라고 판단했을 정도로.
하지만 아니다.
구덩이 아래의 바퀴벌레처럼.
드넓은 협곡의 바닥에 넓게 퍼져 있는 검은 점들은 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관.”
그것은 수백 개의 관이었다.
아니, 어쩌면 수천 개가 될지도 몰랐다.
팀 버튼은 자신의 얼굴을 연신 쓸었다.
햇빛을 차단하는 검은색의 관.
플레이어의 접근을 막는 검은 오러.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종족은 얼마 전에 보고를 받은 한국의 소소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박쥐 무리.
“…뱀, 파이어겠죠?”
“끄응. 아마도…….”
“후우. 하필이면…. 타이밍이 안 좋네요.”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뱀파이어 하면 그에 대항책으로 떠오르는 건 십자가와 마늘이었지만, 그런 미신과는 다르게 실질적인 힘이 지금의 지구에는 존재했다.
신성력.
그것을 사용하는 수많은 존재들.
통칭, 힐러라 불리는 그들은 하필이면 다른 전투에 참여했다.
S급 힐러 성녀.
A급 힐러 성자.
미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힐러를 비롯한 강자 열 명의 이탈은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둘이라도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랬다가는 레이드는 실패였다.
실패뿐이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을 터였다.
S급 세 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었기에, 빌은 어깨만 늘어트렸다.
한 명의 S급이 곧 도착하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라이언이니…….’
“한국에 연락해 봐.”
“이미 했습니다.”
“답변은?”
“아직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비타의 알림음이 울렸다.
비서는 눈짓하고는 비타에 시선을 옮겼다.
“오…!”
굳어 있던 비서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뭔데? 지원이라도 온다던가?”
“네! 협회장님! 지원을 해준답니다!”
“그래? 공간이동마법진 비용은 전부 댈 테니 얼른 이동만 해달라고 해! 그런데 누가 온다는 거지? 유서린 양인가?”
“맞습니다! 징벌의 처녀. 그녀가 직접 온다네요.”
“오오!”
버서커와 성기사의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그녀라면 전투는 물론 정화에도 훌륭한 재원이었다.
언데드나 뱀파이어.
둘이 같을 거란 판단이 맞을진 모르지만.
힐러가 천적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에 따른 단서도 충분했고.
“그리고 김하란도 온다네요!”
“오오.”
용병 김하란은 미국과의 관계도 좋았다.
“그라면 믿을 수 있지.”
“그리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끝나지가 않았다.
“또, 누가…?”
“일본의 강세기 협회장과… 사사키 후유 플레이어도…….”
“일본에서?”
일본은 여력이 없었다.
애당초 마정석분해장치와 마정석 수거팀에 사력을 다할 정도로 플레이어의 질은 떨어졌다.
강세기야 유지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강자에다가 지금으로서도 무시하기 힘든 강자임은 틀림이 없었지만.
“강세기가 직접 움직인다고?”
총리를 밀어내고 일본 전권을 거머쥔 강세기는 현재 일국의 대통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자가 지원이라니.
“그리고 또…….”
팀 버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또 있던가?
‘유지석이나 사카모토 외엔 S급은 없지 않나?’
“그… 도 온다네요.”
“누구?”
애가 닳은 팀 버튼의 음성에 비서가 대답했다.
* * *
“…헌터?”
데니 라이언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도 온다고?”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자이언트 길드의 마스터이자 미국의 여섯 번째 S급 플레이어인 그는 그랜드 캐니언을 앞에 두고 친 길드 텐트에서 쉬고 있었다.
와인까지 곁들이면서.
“…흐음. 빌런 사냥개가 여기까지 무슨 일일까?”
빌런 사냥개는 헌터를 의미했다.
헌터라는 고상한 코드명을 붙였지만, 사실상 헌터라는 코드명 자체가 붙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애당초 애덤이라는 미국의 A급 플레이어가 헌터라는 코드명을 사용하고 있었고.
단지 유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말 그대로 사냥꾼.
던전 내에서 사냥을 전문으로 하며, 여러 학자들이 던전을 연구하게 도와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전담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때문에 코드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애덤은 자신의 코드명을 한국에 넘겼다.
데니 라이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재벌 플레이어의 고상한 취미라고만 여겼다.
실제로 얻은 정보를 보자면 헌터로 예상되는 자가 코드명을 얻을 때의 등급은 고작해야 D급이었다.
D급.
하등 쓸모없는, 개미와 같은 존재.
“어쩌면 이 사태가 빌런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사냥개가 온다면 그렇겠지.”
데니 라이언은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는 인물이다.
각성 전부터 헬스로 다져진 강인한 육체는 고스란히 마력을 받아들여 헐크와 같이 변모했다.
남성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외모에 어울릴 법한 거대한 근육.
그로 인한 포악함까지.
그는 라이언이라는 성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스펠링은 달랐지만, 그는 분명한 포식자였다.
때문에 뒷배를 써서 헌터라는 코드명을 거머쥔 한국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런이라… 재미있겠네.”
데니 라이언을 포함한 미국의 여러 플레이어들은 이미 빌런을 경험해 보았다.
경험치가 달라서 그런지 강자의 수도 많았지만, 데니 라이언은 다섯 명의 왕만이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그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근육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알아봤나?”
“아…. 네. 아무래도 인원이 더 모이면 진행할 모양입니다.”
“저 관뚜껑을 열면 간단한 거 아니야?”
뱀파이어라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플레이어들이었다.
뱀파이어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공상 속 뱀파이어는 십자가와 마늘 따위를 무서워했지만, 몬스터가 그런 걸로 도망칠 리가 없지 않은가.
은을 무기에 도금하고 있긴 한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신들의 뱀파이어에 대한 지식은 아무래도 가상의 존재에 부여된 설정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빛은 아니다.
뱀파이어가 지구의 지식과는 달리 빛에 둔감한 존재들이었다면, 관과 함께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침입을 불허하는 엄청난 결계까지.
“뚜껑만 열면 돼!”
데니 라이언은 확신했다.
“하지만 협회에선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팀 버튼 같은 소심한 놈이 지휘를 맡으니 그렇지.”
데니 라이언은 혀를 찼다.
탁자 위에 놓은 와인 잔을 다시 비웠다.
결국, 병 하나를 비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십니까?”
“버튼 누르러.”
“……길드장님.”
“살살 누를 거야. 살살.”
수하는 데니 라이언의 표정에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버튼을 누른다는 소리는 팀 버튼의 의견을 꺾으러 간다는 의미였으니까.
데니 라이언은 텐트를 박차고 나섰다.
장엄하기까지 한 정경이 펼쳐졌다.
그 아래에 놓인 검은 구더기들까지.
“시도도 제대로 안 해보고….”
몇 번의 검증이 있었던 건 안다.
하지만 고작해야 A급 플레이어들의 일격이었고, 마법사들의 판단일 뿐이다.
그는 어깨를 펼친 채로 걸었다.
‘쯧. 인상을 쓰기는.’
자신의 접근을 발견한 팀 버튼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빠른 표정 관리였지만 S급의 눈을 벗어나기엔 무리였다.
“…무슨 일인가요, 라이언?”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건가?”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하! 언제까지? 빛이 다 사라지고 난 뒤? 이봐, 미스터 버튼. 전장은 언제나 아군에게 유리한 환경에서 치러야 하는 법이야.”
데니 라이언이 설명하듯 말했다.
팀 버튼은 플레이어가 아니다.
국회의원에서 빠르게 협회를 낚아챈 협잡꾼일 뿐.
적어도 데니 라이언의 판단은 그랬다.
“……결계가 단단합니다.”
“하!”
데니 라이언이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다는 듯 목을 꺾은 데니 라이언이 주먹을 들었다.
“내가 쳐보지.”
팀 버튼은 데니 라이언의 행동이 불쾌했다.
잘생긴 외모와 호쾌한 성격.
플레이어가 되기 전부터 나름 유명한 보디빌더였던 그는 자신의 힘을 맹신하는 부류였다.
실제로 그의 능력은 굉장하여, 오거와 힘겨루기를 하여 승리할 정도로 뛰어났다.
단단하기로는 소문이 난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껍질을 한 방에 부순 것도 꽤 유명한 일화였다.
‘음…….’
그의 길드 자이언트의 길드원들도 대부분이 육체적인 능력을 우선시하는 근접딜러 계열이었고, 능력은 출중했다.
‘…일부러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팀 버튼은 데니 라이언이 껄끄러웠다.
강한 힘과 인지도.
강한 세력과 편견과는 다른 노련한 판단 때문에 곤욕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다 알렌이나 질 같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데니 라이언이 일반적인 것일지도 몰랐다.
성과를 내고 그에 따른 보상을 지불한다.
깔끔한 관계.
‘무시만… 빼면 말이지.’
힘이 약한 자를 전부 하찮게 취급하는 버릇만 빼면, 솔직히 나쁘진 않은 인물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그 하찮은 취급을 받는 입장이라는 점이었지만.
“끄응….”
“왜 앓아? 내가 몹쓸 요구라도 할까 봐? 이봐, 버튼? 밤이 되어서 놈들이 활동하면 오히려 골치가 아파지는 건 자네야. 책임자잖아.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하려고? 자, 내가 반은 같이 짊어져 주지. S급 던전 브레이크를 막은 지휘자란 타이틀도 거머쥘 수 있을 거야.”
데니 라이언이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관심이 간 건 아니었다.
영웅이란 타이틀도 필요가 없었다.
‘그래. 할 수 있는 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좋습니다.”
“푸하하. 잘 선택했다고. 보자, 그럼 한번 제대로 쳐볼 테니, 결계가 깨어지는 대로 돌입할 준비나 마쳐. 그건 할 수 있지?”
얕잡아 보는 데니 라이언의 말을 무시한 채, 팀 버튼은 모인 플레이어들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데니 라이언의 일격에 결계가 부서진다면, 무조건 관 뚜껑을 열어 뱀파이어에게 빛 샤워를 시켜 버리라고.
뚜둑.
주먹을 쥐었다 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은 데니 라이언이 천천히 결계를 향해 걸었다.
쩌적!
발걸음마다 대지가 쩍 갈라졌다.
흉흉한 오러가 주먹에 맺히기 시작한다.
‘과연 라이언이다!’
지켜보는 모두의 뇌리에 그의 강렬함이 자리 잡았다.
결계를 앞에 둔 그의 마력이 포악스럽게 요동쳤다.
“흐읍!”
들숨과 함께.
데니 라이언이 주먹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