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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10화 (210/293)

210화

-퀸, 마야 (3)

빌런에겐 동기가 없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다가 불현듯 각성하였다. 때문에 갑작스럽게 지니게 된 힘으로 복수를 자행했다.

이건 십 년 전에 유행했던 단골 멘트였다.

자신에게 사기를 친 사람.

자신을 폭행하고 버린 사람.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

가족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사람.

복수, 복수, 복수…….

그게 격변의 초기를 잠식하는 악행의 시작이었다.

공권력이 무너진 건 한순간이었다.

격변의 때엔 G급 던전만 생긴 게 아니었으니까.

손댈 수 없었던 게이트들.

안정화를 겪은 지금과는 다르게 빠르게 마력이 급증하여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여러 던전들 때문에 혼란은 가중되었었다.

공권력은 밀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도 벅찼다.

그 틈을 탄 악인들의 행보는 거칠 게 없었다.

종말을 부르짖으며.

쾌락에 몸을 맡기기도 했고.

복수를 마친 이후로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인생은 다양한 군상의 집합체이다.

악인(惡人)이 있는가 하면 선인(善人)도 있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

아무리 그래도 왜.

“…인간이 몬스터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이는 시대가 한순간에 도래했던 거지?”

범죄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를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교육받지 않은 아이는 삶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동물처럼 본능만을 좇게 되어 있다.

모글리 현상처럼.

반대로 지속적인 관념과 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아이는 성인이 되더라도 어느 정도의 틀을 지니게 된다.

누가 보지 않아도 범죄를 꺼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몬스터가 등장하고, 게이트란 것이 인류를 삼키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이나마 영웅보다 빌런의 수가 많았던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그토록 강성했던 빌런들은 마왕과 함께 음지로 숨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복수.

그건 초창기의 빌런의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쾌락이나 자포자기 따위는 변질된 동기였고.

하지만 몇몇의 생존자의 정신을 살펴본 메아리는, 이들에게 동기가 없음을 확신했다.

각성했으며.

빌런이 되었다.

누구를 원망한 기억도 없고, 사회 부적응 등의 여러 사유가 없는 인물도 있었다.

원망 역시 살인의 계기가 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흔하디흔한 수준의 원망.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준이었다.

“인위적이라면서요. G급 던전이….”

“아……. 그렇군.”

정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개념을 파고들었다.

친우들은 자신이 죽기 직전, 새로운 세계로 통로를 열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식의 신이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메아리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예전부터 계획된 것일 수도 있겠지.’

그의 방문 역시 모종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기억. 그 안에 답이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답답해졌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었다.

“인위적이다…. 그 뒤를 캐야겠군.”

G급 던전의 생성은 분명히 인위적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가 뒤에 있다는 소리였다.

높은 확률로 지식의 신.

그것도 아닌 친우라면, 한 명뿐이었다.

“…안나 드 로쉬엘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녀는 대마법사였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었다.

새로운 방식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재잘거렸던 이가 바로 그녀였고,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해석과 주석을 곁들였다.

덕분에 그녀는 같은 대마법사 중에서도 최고로 꼽힐 정도로 강했다.

가끔 번뜩이는 창의성을 보여 줄 정도로 천재적이기도 했고.

친우를 찾는다.

그건 정우가 리를 만난 이후 가진 생각이었다.

빌런의 악의라는 마력 패턴은 ‘각인’과 같았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몸에 파고들었던 제물의 각인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악의라는 마력 패턴이 들러붙는다면, 자신은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악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옳았다.

하지만 자신의 스킬은 이를 분명히 구분한다.

악의를 각인하였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마왕을 봐야겠어.”

결론은 하나였다.

마왕.

빌런 협회를 만들었으며, 초창기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자.

대마법사와 뇌신조차 합공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

그가 만든 빌런 협회.

“어쩌면… 악의라는 게 빌런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소속패와 같을지도 모르겠어.”

“소속패요?”

“어.”

메아리는 잠시 고민했다.

“가능성이… 있네요.”

“나는 그걸 구분할 줄 아는 거지.”

“음…….”

“그렇다는 소리는….”

“마왕이…… 주인님의 옛 친구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래. ……그럴, 가능성이.”

어쩌면 빌런이란 건.

‘내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처럼 모아 놓은 집단이 아닐까.’

정우는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있지…….”

* * *

드득.

칭 샤오는 문을 거칠게 열었다.

잃어버린 대지.

그런 이름이 붙은 던전의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며 내부를 드러냈다.

대부분이 돌무덤으로 이루어진 뒤편과는 달리, 문 안쪽은 의외로 싱그럽기만 하다.

녹음이 우거지고, 산새가 지저귀며, 졸졸 흐르는 냇물의 청량함이 느껴지는 곳.

쿵!

칭 샤오는 문을 닫았다.

“…….”

털썩.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보자마자 그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예 드러누웠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칭 샤오의 신체를 부드럽게 받치는 풀은 잡초와는 달랐다.

사람의 손을 탄 듯 깔끔한 정경이었지만,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가득한 곳.

칭 샤오는 그곳의 하늘을, 수풀 사이로 가만히 주시했다.

욱신!

“……반동, 인가요.”

쓰게 웃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이곳도… 마지막이군요.”

아스라이 부서지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느낌.

칭 샤오는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해진 시간.

발키리를 구하려 잠시 이탈했던 여파로 무리를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단계에 오른 걸 축하해야 할까요?”

정우를 떠올린 그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숲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걸었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널 땐 희미한 미소마저 맺힐 정도.

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너고 난 뒤의 그의 표정은.

“마중이라…… 애가 닳았나 보군요.”

싸늘했다.

“약속의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도망친 줄 알았지.”

“흐음. 이제 와서요?”

“이제 와서.”

외알 안경을 쓴, 검은 정장의 말끔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검은 장발의 그는 그늘 아래에서 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손짓에 칭 샤오는 그에게 다가갔다.

“‘반감’은 여전해?”

의외로 사내의 말투는 편했다.

친한 친구에게나 건넬 법한 말투.

그런가 하면 칭 샤오의 어투는 조용했지만 반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칭 샤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지. 넌 이런 거에 굉장히 예민하니까.”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까지군.”

아쉬움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오늘까지죠….”

칭 샤오도 마찬가지였다.

녹음이 우거진 이 지역이 사라지는 건 바로 오늘이었다.

“전달은?”

“하나는 필연, 하나는 우연….”

“우연이라면… 그 네크로맨서에게 맡긴 것 말이야?”

“아는군요.”

“말해 줬으니까.”

사내가 말갛게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거기까지 말했던가요?”

“지금도 기억이 흔들려?”

“…가끔. 간혹.”

“그렇군…….”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짹짹, 산새의 소리를 깨고 입을 연 이는 칭 샤오였다.

“확실히 얻은 거죠?”

“가지? 어. 얻었지.”

“‘전대’의 명령이 남아 있어서 귀찮을 뻔했는데… 다행이었어요.”

“음……. 강해졌군.”

“원래 강했죠. 원래부터….”

칭 샤오가 사내를 보았다.

반감을 억누른, 은근한 눈빛이었다.

“오 년…이었죠?”

“그래……. 실제론 오백 년쯤 되겠지만.”

사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떠오른다.

살기 위해 그것의 피를 삼켜야 했고, 살기 위해 그것들의 위에 군림해야 했으며, 살기 위해 그것들의 군주를 잡아야 했다.

단 한 명의 아군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들과 싸워야 하는 버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그것들의 군주를 자청할 수 있게 되었지만.

“원치 않는 순혈이란 게 되어 버렸어. …이 법칙은 굉장히 무섭더라.”

“……고생, 했어요.”

칭 샤오는 다시금 드는 반감에 인상을 구겼다.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음에도 몇 발짝 떨어진 거리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작 정도는 어렵지 않았는데….

“‘인장’은 얻은 거죠?”

칭 샤오의 질문에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붉어진 입술이 도드라지는.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낯빛 가운데서 빛나는 미소였다.

그 미소 뒤에 사내는 살짝 입을 벌렸다.

다문 이가 보이도록 입술만 들어 올렸다.

가지런한 앞니를 지나 송곳니가 보였을 때.

“……얻었군요.”

칭 샤오는 원하는 걸 본 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송곳니에 타투라니. 어울리지 않아.”

“금색이라… 괜찮아요.”

금색 룬어가 새겨져 있는 송곳니.

그건 꼭 얻어야 했던 물건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어렵지 않게 주어를 짐작했다.

왜 보고 싶지 않을까.

십육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아 왔다.

그를 떠올리면 항상 드는 감정은 두 개였다.

애정과 존경심.

그가 자신의 친구라는 것에 애정을 가졌으며, 그가 자신이 섬길 군주라는 것에 존경심을 품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친구라는 애정 위에 덧씌워진 애정이 있었다.

“…아빠, 다 됐네요.”

칭 샤오가 피식 웃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몰라.”

사내는 칭 샤오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야겠어. 여길 오는 건 내게도 무리라…. 조금만 더 틈을 보이면 내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이를 드러낼 놈들이 아직 많거든.”

“하기야. 이제 왕의 자리에 앉은 지 몇 주밖에 안 지났으니까요.”

칭 샤오가 손짓했다.

“얼른 가세요.”

“그럼……. 나중에 보지.”

눈인사를 건넨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

칭 샤오는 사내가 ‘뱀파이어 로드’가 되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격변의 시대.

수많은 인간들이 변화한 시기였으며, 예기치 않은 혼란이 덧붙은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고민했고.

결국, 뱀파이어란 패까지 꺼내 들었다.

모든 건 로드로부터.

오스카 백작에게 건넸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첨병인 그가 몰랐던 사실은 단 한 가지.

칭 샤오가 말하던 로드와 그가 알고 있는 로드가 서로 다른 이라는 것.

그렇기에 피로 전해지는 강제성은 여전했다.

편법은 끝났다.

다급히 삼켜 버린 그는 뱀파이어의 로드가 되었고, 그들이 숨겨 놓은 인장을 손에 거머쥐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조금씩 전달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에겐…….”

다시 만난 그는 강했다.

과거가 생각날 만큼.

칭 샤오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이젠.

자신도 움직일 때였으니까.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습이 조금씩 바뀔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녹기 시작했다.

물감이 굳지 않은 풍경화에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처럼.

짧은 머리가 찰랑거릴 정도로 길어진다.

우뚝 솟았던 신체가 작아지고, 손발이 가늘어졌다.

불뚝 솟은 가슴께가 품 넓은 상의에 딱 들어맞았다.

스윽!

아공간에서 꺼낸 지팡이까지 거머쥔 그녀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세계를 아쉽게 보며 인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위로였어요. ‘글로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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