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마탑 (19)
‘압도당했다.’
칭 샤오는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멍해진 정신과는 달리, 육체는 본능을 따랐다.
도주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죽는다….’
과연 죽음이란 게 내려앉을지 두고 봐야 했지만, 좋지 않은 결말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도 알았다.
때문에 손아귀에 쥐어졌던 귀환석을 부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파직!
대마법사의 마법을 해제시키고.
아티팩트의 발동을 멈췄다고는 하지만.
정우의 능력은 마력 그 자체를 다루는 힘에 있었다.
손아귀에서 부서지는 귀환석의 존재에 칭 샤오는 정신을 차렸다.
답답한 공기를 뚫고 청량함이 밀려들었다.
‘그곳’과 연결된 것이다.
털썩.
실제로는 주저앉지 않았지만, 칭 샤오의 심장은 탈력감에 질린 듯 주저앉았다.
순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정우의 기운이 준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압박감이 옅어지자 고개를 드는 건, 정우에 대한 관심이었다.
‘강하다….’
고작해야 일 년.
남들은 F급에서 D급에나 도달할까 염려스러운 짧은 시기에 정우는 S급에 도달했다.
그뿐인가.
‘강하군요.’
그는 기이한 열기로 자신이 뇌리에 떠올랐던 감정을 되새겼다.
바로 죽음 말이다.
“…….”
칭 샤오는 대마법사를 보았다.
각성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 위에 군림하기만 하던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웃기기만 했다.
목표를 놓치고 얼마나 분통해할까.
그건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관람하지는 못하겠지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에 반해 얻은 건 지대하다.
아직 효용이 남아 있는 발키리를 살렸고.
‘이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정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예상보다 빠르다.
일본에서 성장했을 때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준비한 게 한가득이지만, 이대로라면 몇 단계나 건너뛰어야 했다.
그가 생각한 건 복수였다.
“……?”
차분하게 이어가던 생각에 노이즈가 낀 것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였다.
“……왜?”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귀환석은 즉각적이다.
위급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고, 그조차도 단 한 개만이 존재할 정도로 귀환석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기운이기에, 디스펠 따위에도 자유로웠다.
“반응이… 느리지?”
때문에 주위의 풍경은 진즉 바뀌었어야 했다.
당황한 눈동자의 대마법사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하지만 세상은 여전했다.
청량함은 느껴졌지만, 전신을 휘감는 속도는 더뎠다.
칭 샤오는 이변을 느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넌.”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우의 눈동자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조용한 음성이 심장을 옥죈다.
이를 앙다물고 다시 검을 쥔 칭 샤오가 이어지는 말에 당황했다.
“보내 주지.”
‘보내… 준다고?’
정우에 말에 당황한 건 칭 샤오뿐만이 아니다.
“한정우? 지금 무슨….”
말문이 막힌 대마법사도 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더듬거렸다.
하지만 정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귀환석의 발동과 더불어 생성되는 결계를.
스스슷!
너무나 가볍게 뚫고 들어온 손이 기절한 발키리의 발목을 낚아챘다.
칭 샤오가 반사적으로 발키리를 끌어당겼으나.
“얜 안 돼. 너만 허락하지.”
순간적으로 빠지는 힘에 칭 샤오는 손만 허우적댔다.
‘또… 변했어.’
벌써 몇 번째인가.
발키리를 놓친 손을 가만히 보던 그는 결정했다.
도주하기로.
“왜 놓아주는 거야!”
마력을 회복한 대마법사의 기세가 무서웠다.
하지만 정우가 허락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머뭇거리며 여유롭던 기운이 확 하니 몰려들었다.
발동된 것이다.
귀환석이.
뒤늦게 대마법사의 마법이 작렬했지만, 그곳에 칭 샤오는 없었다.
뾰족하게 변한 표정으로 다가온 대마법사가 정우를 살짝 올려보며 일갈했다.
“무슨 생각이야! 잡을 수 있었으면서, 잡았어야지!”
순간적으로 마력을 억제당했다는 걸 잊은 모양인지, 그녀의 기세는 날카롭기만 했다.
정우는 바닥에 쓰러진 발키리를 들어 올렸다.
발목에서 손을 놓고, 염동으로.
그 와중에도 정우의 능력을 보고선 이채를 띠던 대마법사가 물었다.
“놈을 어떻게 할 거지?”
“…협회로 가죠. 곱게 죽이진 않을 테니까.”
협회라는 말에 대마법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북유럽 신화에서 주신 오딘을 섬기는 ‘전쟁의 처녀’이자 전투의 여신으로 불리는 발키리는 그녀의 이명으로 딱 맞았다.
그녀는 등장 이후 끝도 없이 전투를 벌였고, 전쟁 속에서 성장했으며 전쟁을 만들어 내는 자였으니까.
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녀의 손에 죽은 강자의 수만 해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으, 으으으으…!
지금에 이르러선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강자였지만, 초창기의 그녀는 그리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여자라는 성별의 태생에 법과 문화라는 한계까지.
그녀는 꽤나 험한 삶을 살았고, 덕분에 고통에 익숙했다.
얻어맞고 베이고, 찔리고 넘어지고.
수많은 반복은 그녀를 고통에 무디게 만들어 줬고, 그건 기회를 잡은 그녀에게 있어선 커다란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발키리는 자신의 무기가 부러진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위가 없었다.
각성 전에 당한 고통?
각성 후에 당한 고통?
여태껏 경험해 본 모든 고통을 통틀어.
덜덜덜!
지금이 가장 두려웠다.
죽지 못하고, 죽음에 가까운 감각만을 이어 간다는 점에서.
그렇게 발키리는 서서히 무너져 내려갔다.
“……으음.”
불과 이틀이다.
발키리를 잡아 오고 협회의 비밀 공간에 가둬 둔 것이.
으스러진 팔목은 대충 치료가 되어 방치되었고.
그 못지않은 상처가 그녀의 곳곳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그녀의 강인한 육체는 초월적인 치유력을 바탕으로 상처를 수복해 간다.
그녀는 그렇게 끝도 없는 고문에 옭아 매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정신.
“……제, 발!”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간절한 애원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계속 다리를 붙이고 있었으나, 고문의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자리를 비우는 횟수가 많아졌던 유지석조차.
“……애원이라니.”
발키리와 함께 신음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발키리는 무너졌다.
밖은 어떻게 치유하더라도 안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육체는 비단 육체적인 고통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정신적인 것.
그녀는 더 이상 플레이어로서 살아갈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러겠지.’
유지석은 발키리의 애원을 받는 대상을 보았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을 자행하였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한정우가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마음이 무거워진 그와는 달리 질 고메즈는 여전히 냉담했다.
칭 샤오를 놓아준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발키리만으로는 끝나지가 않았다.
때문에 주시한다.
단지 친구의 복수만을 꿈꾸는 것인지, 아니면 대의를 볼 그릇이 되는 것인지.
질 고메즈는 팔짱을 낀 채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특수 제작 된 고문실에 들어가 있는 이는 단 둘뿐이었다.
정우의 움직임은 느긋했다.
친구를 죽인 이에 대한 복수치고는, 이젠 천직이 되어 버려 지겨워진 고문 기술자처럼.
애원하기 시작한 발키리의 손을 비틀고, 다리를 꺾으며 회복의 시간을 줄 따름이었다.
‘정신적인 고통이라….’
발키리의 상태는 묘했다.
차라리 육체적인 고통이 가해질 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치유가 더디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발악을 해댔다.
사지가 비틀리고, 자상(刺傷)이 가득한 이후를 그녀는 더 두려워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다, 다 말할게! …말할게요. 부디…… 제발, 그것만은…!”
세상에 드러날 리 없는 비밀까지 실토할 기세였지만, 정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또다시.
스윽.
“아, 아아! 하… 하지 마…! 제, 제발…! 하지…… 끄륵!”
발키리의 머리에 손을 얹을 뿐이다.
게거품을 물기 시작한 그녀의 두 눈이 흰자만 드러냈다.
들썩, 덜컥!
단단히 묶인 의자가 요동칠 것처럼 들썩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정우가 처음으로 고문실을 벗어났다.
유지석과 질 고메즈가 정우를 보았다.
“으음…….”
“…….”
정우는 그런 둘의 시선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이틀간의 고문은 그에게도 상당한 심력 소모였다.
“이젠… 말해 줄 생각인가?”
유지석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이 분노를 좀 풀고 말해 드리죠.”
말릴 상황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한정우란 사람조차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기엔 어려웠지만, 포획한 당사자의 말이라 유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시간을 주었다.
침묵하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도망친 놈을 잡을 ‘끈’은 연결해 두었습니다.”
“……!”
그 말에 반응한 이는 질 고메즈였다.
“칭 샤오를 추적하고 있다고?”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정우를 본 질 고메즈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이나 하지….”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어딘데?”
“…감각이 상당히 흐려져서 굉장히 멀리 간 줄 알았는데…….”
정우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가까운 데 있더군요.”
“……?”
칭 샤오.
이름 자체가 중국인이기에 처음에는 중국을 뒤졌던 전적이 있었다.
질 고메즈는 중국 전역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인천.”
“……인천?”
그는 대한민국에 있었다.
질 고메즈가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인천 전역을 뒤질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며.
“가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왜지? 내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정우의 대답에 질 고메즈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찾을 수 없어.’
질 고메즈.
유지석.
아니, 뇌신이나 마왕이 온다고 하더라도.
“놈은 던전 안에 숨었으니까요.”
“……던전?”
“안에?”
던전 안에 터전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몬스터 때문이 아니었다.
던전 안에 흐르는 마력.
그것 자체가 인간의 거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우는 분명히 느꼈다.
던전을 넘어가는 기이한 감각을.
공간 이동으로 던전을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기본적인 개념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지.’
정우는 던전을 넘은 칭 샤오의 기운을 좇았다.
발키리의 팔을 비틀고, 상처를 내면서도.
그 결과가 그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열쇠’ 비슷한 것의 소유자라는 걸.
칭 샤오는 던전으로 이동할 능력이 있었다.
마녀의 마을과 같은, 그만의 던전이 어딘가에 있었을 터였다.
그게 인천이라는 건 놀랍지만.
“일부러 놓아줬습니다. 곧… 잡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정우가 질 고메즈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제게 해야 할 말들을 하시죠. 저 역시… 할 말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