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마탑 (16)
S급 정도 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마력을 뿜든, 스킬을 사용하든.
일정 반경은 본인만의 경계선이었다.
침범하면 죽는다.
그런 느낌의.
‘…그런데…….’
대마법사는 마력 감응력이 뛰어났다.
그 마력 감응력 때문에 유지석은 그녀에게 추적을 맡겼다.
상태도 최상이었다.
긴 비행 따위로 나약해질 육체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질 고메즈의 전신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떨렸다.
“방향은?”
자신의 영역을 너무도 쉽게 침범하여 등장한 이는, 몇 개월 전에 보았던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던전 내에서 성장하는 건 한계가 있다.
성장의 한계가 아니라 폭의 한계였다.
사람에 따라 빠른 성장은 가능하지만, 폭발적인 급성장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아는 지식은 분명히 그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건…… 전해 들었던 것보다 더해.’
하데스를 잡았다고 했던가.
이 느낌대로라면 그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불가능해…. 하지만…!’
“방향.”
질 고메즈는 자신의 상념을 뚝 잘라 버리고 들어오는 음성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어쩌면 당신 때문에 놓칠 수도 있겠…….”
질 고메즈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한정우의 눈이 곧장 번뜩였으니까.
그리고 이윽고 사라진다.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을 순식간에 벗어나는 정우를 보며, 그녀는 귀신이라도 씐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렇게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사라진 정우를 따라 약간 이동했을 때.
그녀의 영역에 누군가가 잡혔다.
“……잡았다고?”
발키리.
바로 그녀였다.
빌딩의 꺾어지는 모서리에서 목이 붙잡힌 발키리의 손짓은 허망했다.
건물을 부수고 대지를 가를 힘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아니… 아니야!”
마력이라는 매개체를 잃어버린 것처럼 터무니없이 미약한 손짓이었다.
당황과 경악.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정우를 두드리는 발키리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빌런이라는 탑 위에 군림하는 이가 아니었다.
나이든 한 여자.
“……마력 억제.”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너냐?”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예의 부드러운 인상은 어디로 가버리고 남극의 빙산 같은 차가움만이 남았다.
발키리가 꺽꺽댔다.
대마법사가 보기에 이 상황은.
“코미디…는 아니겠지?”
한 편의 코미디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놀래 주는 몰래 카메라이든가.
하지만 두 눈을 비비고 봐도 현재의 상황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자신조차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게 전부였던 이를, 한정우가 사로잡았다는 것을.
그리고 금제와 같은 마력 억제로 마력 자체를 짓눌렀다는 것을.
“아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시야가 흔들렸다.
사물이 요동을 쳤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일그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의 존재는 점차 선명해지기만 했다.
유서린의 말을 듣고 곧장 기감을 넓혔다.
끝도 없이 넓어지던 기감에 잡힌 건 강대한 마력의 결정체, 대마법사였다.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곧장 공간을 넘은 정우는 대마법사에게서 방향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여전히 일그러진 세계.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눈앞의 세계를 무시한 채로, 그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마력의 실을 뿌리고 또 뿌렸다.
때문에 발키리의 스킬은 의미가 없었다.
본인 스스로를 지우는 스킬?
그 모든 마력 자체를 파악하는 정우의 손길 안에서는 그저 숨바꼭질하는 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 악의(惡意)를 ‘각인’하였습니다. ]
알람이 울려댔다.
그리고 변화한다.
수많은 빌런을 잡았고, 상당히 많은 전투를 벌였음에도 변하지 않던 각인이.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를 앞에 두고 각성이라도 한 듯 변화한다.
각인이 끝났다는 듯.
[ 악의(惡意)를 습득합니다. ]
놈들의 패턴을 고스란히 몸에 담아 체득한다.
굳이 느끼지 않아도 느껴지고, 보지 않아도 보이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자신의 음성에 그림자가 늘어진다.
한 점만 콕 집어 주욱 당기는 것처럼 빠르게 늘어나는 그림자를.
정우는 놓치지 않았다.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그림자가 변화했다.
길어졌던 것이 급격하게 짧아지며 다가온다.
공세의 전환.
놀랍도록 빠른 판단력.
‘죽여서 쌓은… 경험.’
으득!
그 경험치에 자신의 친구가 담겨 있다는 것이.
아니, 그런 경험치조차 되지 못했다는 것이 정우의 마음을 들쑤셨다.
수십 개의 낫들이 전신을 절단할 기세로 쏘아졌다.
예리하고 난폭하며 거세고 거대한 기세였다.
하지만 정우는 그 낫들을 일일이 쳐 낸다.
손에 오러를 두르고.
주변의 마력을 분해하듯 지워 가며 찰나의 순간에 발키리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손을 뻗는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손길.
하지만 피부에 닿자마자 놓칠세라 움켜쥐는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피부를 뚫고 생명을 앗아 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것처럼 우악스럽기만 했다.
손바닥을 타고 도는 마력이 ‘악의’와 맞물렸다.
오러는 사라지고.
마나가 그 안을 가득 채운다.
웅웅!
가동하기 시작한 마나는 핵과 같았다.
폭발과 안정.
순식간에 최상의 수준에 도달한 마나가 발키리의 마력을 헤집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해도가 발키리의 마력 패턴을 낱낱이 발가벗겼다.
대마법사는 여기까지 보았다.
그리고 가해지는 걸 마력 억제로 보았다.
하지만 정우의 능력은 마력 억제가 아니었다.
장악(掌握).
타인의 마력을 고스란히 빼앗아 자신의 권한하에 둔다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마법사로서는 가능의 여부는 물론 발상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었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터무니없는 능력이었고, 적지 않은 격차였다.
분노는 이지를 마비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지만, 능력을 향상시키는 각성제 역할도 한다.
지금 정우의 수준이 딱 그랬다.
일그러지고 탁해진 세상 속에서도 목적은 너무나 선명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친구의 얼굴이, 말투가, 음성이, 행동이.
달리는 말에 가하는 채찍처럼 정우의 목적을 흐리지 않게 만들었다.
정우는 목을 잡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자신의 얼굴을 긁고 가슴을 후려치는 ‘적’의 오른손을 붙잡는다.
작고 얇은 손에 정우의 분노는 가일층 기세를 키웠다.
“이 손으로…….”
착 가라앉은 음성은 음부(陰府)에서 기어 나온 저승사자 같았다.
수많은 생명을 학살한 발키리조차 흠칫 놀랄 정도의 음성.
다급히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발악을 했지만, 그 격렬한 격투의 현장에서도 정우는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단 하나의 충격도 받지 않은 듯 굳건히 서 있었다.
뿌득.
“……아, 아아!”
순간적으로 치미는 통증에 발키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신음했다.
언제 이 정도의 통증을 느꼈을까.
마력이 억제되자 중상 중에도 운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스킬 ‘마약’도 사라졌다.
때문에 이 정도로 느껴지는 통증은 마약 스킬을 얻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랜만의 격통.
그건 발키리의 정신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뿌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손목을 타고 뇌리에 꽂힌다.
천천히.
정우는 눈과 입을 쩍 벌린 발키리를 노려보며 천천히 손을 비틀었다.
회전 반경을 넘어서는 손은 정우의 거센 손아귀에 뜯기기 시작했다.
“진수를 죽였냐?”
푸와아악!
기어이 비틀어 뜯겨 나가는 손.
울컥 뿜어지는 피가 정우를 적시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뭉쳐져 뜯겨 나간 단면으로 몰려들었다.
정우는 단면에 뭉친 피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검붉은 피.
그것의 색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아……!”
발키리는 손이 뜯겨 나가는 격통 이상의 통증이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에 비명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비명은 고사하고 단말마 같은 신음을 끝으로 입만 쩍 벌린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댈 뿐이었다.
청탑은 물과 관련된 마법을 다룬다.
물은 정화를 뜻하고, 정화의 범주는 넓었다.
독 역시 정화할 대상이었다.
때문에 청탑은 의외로 독에 해박했다.
마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정확히는 가만히 있을 땐 영향력이 극히 미비한 마력을 변환하여 새로운 능력을 발현하는 것.
때문에 정우는 발키리의 피를 독으로 바꾸었다.
상처 입어 뿜어져 나온 것들만 모아서.
독 중에는 피의 흐름과 관계없이 천천히 몸을 잠식하는 것도 있었다.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지며, 격통은 당장 죽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심한 독이.
‘트롤의 독.’
엄청난 회복력을 지닌 트롤이 영역 다툼을 하기 위해 만든 조악한 독.
하지만 그 막강한 회복력조차 무력화시킬 정도로 특별해진 독.
정우는 발키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왜, 왜 죽였어.”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나…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빌런들의 왕 중 하나가 직접 나설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레베카를 붙였으면 나았을까.
정우는 충격과 상심.
슬픔과 절망 사이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다.
‘…예전처럼.’
마탑주가 되었을 때.
자신은 대륙을 진동시키는 강자였다.
여러 토벌 작전에도 참여했고.
여러 던전을 공략했으며, 상당수의 현상범을 잡을 정도로 대외적인 일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때쯤 제이는 이미 재능을 만개시켜 나가며 자신의 그림자로 살고 있었고, 여러 방향으로 사귄 친구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마탑주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나이는 27세.
유례없는 최연소 마탑주에다 청탑의 수호자인 카이롤레움까지 깨워 공명하였기에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평생 오만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 줄 알았던 자신에게도 그 단어가 어느새 뿌리를 내렸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자신감이 치솟은 자신은 대륙에서 유명한 금지의 탐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탑주가 되기까지 참여한 여러 공략에서 사귄 재능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이 유독 빠를 뿐, 친구들 역시 앞을 다투는 천재들이었고 당시엔 각자 이름을 드높이고 있던 때였다.
자신감이 팽배했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서해의 가라앉은 대륙을 탐험하고.
북쪽의 빙결의 궁전을 탐험했을 때.
자신의 마법은 적탑의 마탑주를 뛰어넘었다.
냉기를 이길 불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고민한 삼 일 만에.
때문에 그 어떠한 험지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름의 성과를 얻은 후로 탐험에 재미를 붙인 친구들과 함께 남쪽의 드래고니아를 찾았을 때.
놈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마력 제어장에 2초가량 당한 그 시점에.
“…넌 안 돼. 저놈을 지켜야 하잖아.”
거대한 일격을 가로막으려던 제이까지 밀어내며 희생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인근 왕국의 제7 왕자.
왕위 계승권 따위는 없지만 인품이 훌륭했던 친구.
자신에게 몇 번이고 자만하지 말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의 죽음 앞에.
자신은 처음으로 안일함이라는 단어를 사무치게 느꼈었다.
그래.
……지금처럼.
턱.
친우의 눈동자가 사라진다.
생기를 잃어가던 눈동자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건 반개한 눈이었다.
“……칭 샤오.”
“오, 기억해 줘서 영광이군요.”
수더분한 미소의 그가 거력으로 자신의 손을 떨치며.
휘익!
패닉에 빠진 발키리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