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마탑 (14)
마탑의 설립.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우는 마탑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그건 현대의 길드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정우가 굳이 길드가 아닌 마탑이라고 정의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력 분해 장치.
여전히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그것과 더불어 그곳에서 자신만의 여러 물건들을 생성할 생각이니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은 단연코 JM그룹이다.
연금술사를 필두로 생성되는 수많은 플레이어 물품과 파생품은 JM그룹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그룹으로 만들었다.
정우가 착안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마법사의 탑.
이계에서도 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는 물건의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서 등장했다.
즉, 정우는 세계에 영향력을 떨치기 위해 마탑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탑의 의미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계열의 극의를 알아내기 위한, 진리의 구도자.
그것은 과학과도 비슷한 면모가 있었으나, 보다 초월적인 무언가를 갈망하는 구도자와도 같았다.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초월적인 무언가는 단연코 그것이었다.
대마법.
지식이 아닌 무력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떨치는 수준.
그중에서도 청탑은 세계에 퍼진 물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물의 정령왕의 그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카이롤레움은 청탑의 수호자이면서도 그들과 계약하여 정령왕의 위(位)를 꿈꾸는 동행자였다.
중국의 주석?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는 금방 만들어졌다.
어찌나 애가 달은 건지 장상수를 통해 소식을 전하자마자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게 주석을 만나러 이동하기 위해 헬기에 올라타려던 정우가 멈칫한 건.
“……뭐?”
정신을 앗아가는 연락을 받은 뒤였다.
멍한 눈으로 비타를 보는 정우를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보고 있던 중국 협회 직원이 재촉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싹!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진다.
금세 입술이 파래지고 손발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느낌만이 아니었다.
쩌적 얼어붙은 헬기의 프로펠러가 회전을 멈추기 시작했다.
투툭, 후두둑!
얼어붙은 수분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우박이 비처럼 쏟아진다.
태양은 여전했고, 햇살도 뜨거웠으나.
‘추, 춥다…….’
정우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한기는 기후조차 변화시킬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일그러지고 이글거리는 표정과 눈빛은 사람의 심장을 옥죌 정도로 강렬했다.
-아이야…….
흐트러지는 기억 속에서 정우의 생각을 읽은 카이가 장상수의 곁에서 떠나 정우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정우의 곁에서 나타난 그는 불현듯 과거가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이야. 설마 그때와 같은…….
하지만 카이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거칠게 고개를 든 정우는 이를 갈며.
스스슷!
사라졌다.
“…어, …어?”
순식간에 우박이 사라지고 한기가 증발한다.
헬기를 붙잡았던 냉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프로펠러의 거센 굉음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아이야…….
하지만 그 자리엔 정우는 없었다.
오직 카이만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우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장상수의 곁으로 다가갈 뿐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
카이는 부디 이 사건이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군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느냐, 찌꺼기야.
자신의 이동에 흠뻑 젖은 장상수의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 위에 앉으며, 그는 정우가 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 …이진수 씨가……. ]
-살해라……. 인간의 생각은 비슷한 것 같구나. …아이야.
카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똑똑히 기억한다.
여느 건물보다 더 커다랗고 위세가 넘치던 건물을.
당당하게 적혀있던 Knight의 단어는 반쯤 사라져 있었고, 부서진 건물 사이로 오가는 구조대원과 힐러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으며 다급한 움직임으로 고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전쟁의 한 장면이자.
던전 브레이크가 만연하지 않은 지금에선 테러가 아닌 이상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나이트 길드 본사에서의 굉음은 여러 방어 마법이 걸려있는 건물을 반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 S급의 격돌은 그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나이트 길드원들은 물론 인근 길드와 협회, 정부까지 인력을 파견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길드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모습을 수복해 가는 것은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때문에 경계는 삼엄했다.
이런 초유의 사태를 벌인 자가 도주에 성공했기에.
중상을 입은 나이트 길드의 길드장을 노리고 다시금 다가올지 모르기에.
“…….”
하지만 보다 고위직에 앉은 이들은 알고 있었다.
연이은 테러는 없다는 것을.
그 고위직 중에서도 최고 인사 중 한 명인 유지석은 나이트 길드의 사태에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가?”
“……아무래도 맞는 거 같습니다.”
“알았네. 위험하니 나가 있게.”
공항에서 온 연락.
빌런 탐지기의 거센 경고음에 추적에 나선 플레이어들은 서울을 빙빙 돌아 결국 나이트 길드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소식을 알리기 직전.
사망한 플레이어의 흔적을 발견한 이들의 경호성이 나이트 길드 건물을 울렸다.
빠르게 작동한 경계 태세.
고립된 적의 발을 잠깐 묶는 것을 끝으로 방어 장치는 파괴되었지만.
그 짧은 틈은 길드에서 가장 강한 이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벌어진 전투.
하지만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와 지켜야만 하는 자의 전투 방법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침입자가 더 강한 상황에야.
김상훈은 자신 길드의 전력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봐야 옳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주범이자 김상훈을 중상에 빠트린 강대한 적.
‘……발키리.’
발키리의 목표는 나이트 길드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정우를 노리기 시작했다?’
유지석이 이를 갈며 솟구치는 마력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우드득, 요란한 소리가 주변을 장악했다.
이진수.
나이트 길드의 인정받는 재원이자, 이제는 협회 소속이 된 그가 목표였다.
하필이면.
유지석은 침음을 삼켰다.
일본에서 귀환한 인원들은 곧장 회복에 들어갔다.
이진수 역시 마찬가지.
협회의 수준도 뛰어났지만, 케어는 나이트 길드가 더 우수했다.
때문에 이진수는 한 달의 휴가를 얻었다.
애당초 정우를 지원할 목적으로 협회에 들어온 그였고, 나이트 길드로의 복귀를 희망하였기에 협회에선 이진수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여 그를 나이트 길드로 보냈다.
케어를 목적으로.
유지석은 이런 결과는 꿈에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한정우가 성장하고 드러날 때마다 주변인이 위험에 처할 거란 판단은 지운 적이 없었다.
다만 나이트 길드란 철옹성에까지 침입하여 이진수를 납치하려고 들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그 일을.
‘발키리가 직접 움직였다…. 이건 큰 문제야.’
빌런 협회의 네 명의 왕 중 하나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디 질이 발키리를 사로잡았으면 좋겠는데…….”
자신보다 기동성이 좋은 질 고메즈가 발키리의 추적에 나섰다.
유지석은 간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때, 유서린이 나타났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타난 유서린은 유지석에게 상황을 듣고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마법적인 능력이 없다는 것에 자책하며.
“…아버지. 한정우 씨에게는 어떻게…….”
유지석은 공적인 자리에서 간만에 아버지라 부르는 딸의 모습이 낯설었다.
한정우라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옅은 걱정과 두려움이 자신은 모르는 한정우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만들어 버렸다.
“……연락하게.”
이제야 처리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반파된 건물은 여전히 붕괴의 위험이 있으며.
길드의 모든 마력을 담당하던 마정석은 폭주의 위험이 있었다.
‘제대로 건드려 놨어. 제대로….’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질 고메즈가 발키리를 쫓지 않았다면 허무하게 놓쳤을 정도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마정석이 폭발하면 일대를 가볍게 날려 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보일 테니까.
또다시 뿜어지는 마력을 억누르던 유지석의 주름진 눈가가 커졌다.
‘고, 공간 이동?’
마정석의 폭주는 당연히도 마력의 불안정화를 초래했다.
자칫 잘못하면 폭사할지도 모를 위험이 가득한 공간.
그런 공간에 공간 이동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유지석은 당연히 이 공간 이동의 시전자가 질 고메즈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질 고메즈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의 한국인.
익숙한 외형의 인물이.
“한, 정우…?”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은 채 등장했다.
기적에 가까운 모습.
아니, 자신의 수준에선 기적보다도 더한 확률로 등장한 사내.
한정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유지석은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찰나의 순간.
하지만 폭발을 앞두고 있던 마정석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부글부글!
“……이런.”
유지석이 다급히 마력을 억눌렀다.
A급 마정석의 폭주는 S급 마법사인 그조차도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굳은 표정으로 등장하여.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한정우의 손이 휘저어지는 순간.
“……마력이…….”
안정화가 되어 간다?
유지석은 자신의 전신을 압박하던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경악했다.
폭발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아무런… 위험도 없이…… 이게 이렇게 가볍게 처리될 문제였던가?’
아니었다.
이건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폭발해 버릴 화약고였다.
인근의 마정석이 몇 개인가.
원자력 발전소가 폐기되고, 모든 전력이 마정석으로 대체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빌딩이면 적어도 D급 이상의 마정석이 발전기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수만 어림잡아도.
‘사백여 개…….’
그게 연쇄 반응을 보이면 자칫 서울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경기도까지….’
때문에 유지석이 안정을 도맡고 있었다.
추적에 나선 질 고메즈가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반대로 말하면 이건 그 정도의 사건이라는 소리였다.
세계 유일의 ‘대마법사’의 힘이 필요한 순간.
그게.
‘……어떻게 한순간에….’
단 한 번의 손짓에 잠잠해지는 건지 유지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혼란에도 귓가를 파고드는 갈라지고 가라앉은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유지석은 피로감을 느끼며 정우를 안내했다.
마정석과 그리 멀지 않은 곳.
그곳에 고이 눕혀져 있는 익숙한 얼굴의 친구가 보였다.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얼핏 보면 그저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외형은 말짱했다.
하지만 정우는 친구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내 친구가 죽었구나, 하고.
생기가 빠져나간 육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친구의 곁으로 다가갔다.
초조한 낯빛으로 서 있던 유서린이 손을 뻗으며 다가오려다가 멈칫했다.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는다.
접근 자체를 불허하는 기색이 정우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아주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진수에게 다가간 정우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이진수의 포개진 손 위에 올린 정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차가움에 분노했다.
“……약속해. 널 이렇게 만든 놈을 잡아다가… 평생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게.”
주르륵.
“누구죠… 범인이?”
유서린은 차가운 표정의 정우의 눈동자가 삼키고 있는 오열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