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마탑 (12)
“청탑?”
세계를 강타한 단어가 서울역의 인파들 사이에서 언급되기 시작했을 그때.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또각.
발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검은 드레스와.
하얀 얼굴에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 고혹적인 미소는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울역을 가로지르는 여인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사라진 후로도.
멍하게 정신을 잃었던 이들은 그녀가 사라진 지 10분이 지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열차를 타거나 이동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뇌리엔 여전히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제정신을 차린 채 원래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과는 달리, 플레이어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동행자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이상하다고 생각한 동행자의 신고로 협회에서 직원이 출동했을 땐, 이미 모든 플레이어들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삐빅-.
“……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출동했던 직원의 눈이 살짝 커진다.
아니, 심각할 정도로 부릅떠졌다.
[ 악의(惡意) ]
떠 있는 단어가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빌런이다!”
* * *
이지스는 고민에 빠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왕께선 얼마나 성장하셨더냐.”
레베카는 정우를 떠올렸다.
최근에 정우의 수준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저 정령은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하려는 거죠?”
대신에 그 수준을 가늠할 만한 이가 있었다.
얼마 전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와 상처 입은 육체를 회복하면서 눈길을 끌기 시작한 한 여자가.
“정령이라…. 그와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성질은 비슷하니 넘어가자.”
이지스 역시 메아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녀들이 그녀를 정령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지스는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지스로 하여금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정우와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과거 본인의 이상(異常)을 함께 고민하고 걱정할 때, 꽤나 가까워진 상황에서 정우는 자신에게 메아리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왕의 성장과 맞물려 있는 존재다.”
“왕께서 성장하면 정령도 성장한다는 거죠?”
“그렇구나.”
“그럼 왕께선 아버지를 뛰어넘으셨어요.”
“그거야 당연한 말이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다니엘에게 보냈던 열쇠가 영 엉뚱한 이의 손에 떨어졌던 걸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의 마법은 그 와중에도 정확하게 진행되었고, 일족의 미래는 다니엘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비록 강대하던 그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등장했지만.
‘어쨌든 그라는 게 중요하지.’
쓸모없는 걱정인 셈이었다.
깨어진 그릇.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도 불안하겠지. 두렵구나. 날 뛰어넘었다고 함에도 아직도 전성기가 아니라는 게…….’
아직도 균열이 가 있는 그릇의 수준이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것에 이지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조급했다.
‘왕의 곁으로 가야 할 텐데…….’
왕의 수준은 자신을 넘었다.
그럼에도 과거에 비해서는 부족했으며, 그 유명한 가신들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균열은 변함이 없었고, 왕은 더 이상 회랑에도 입장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는 횟수는 그저 메아리나 레베카 등의 이동에만 쓰일 뿐이었으니까.
‘회랑에 있는 정보도 더 이상 필요가 없으실 가능성도 있지.’
이지스는 회랑을 떠올렸다.
‘대도서관(大圖書館). 그곳에 대한 단서를 넘겨야겠군.’
아라크네에게 사로잡혀 시간이 흐르는 사이 세계는 변화했다.
좋지 않은.
아니, 심각할 정도로 안 좋은 방향으로.
다니엘의 행적은 선군 그 자체였고, 영웅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면 그 결말은 뻔했다.
‘우리가 이렇게 던전이라는 형태로 따로 떨어져나온 것만 봐도 말이지.’
“레베카.”
“네.”
“더 성장할 수 있겠어?”
“…여기서 더요?”
“아무래도 네게 한 가지 기술에 대해서 알려 줘야겠구나.”
“기술이요?”
“이 아비가 왕을 뵌 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와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이가 하나 있었어.”
레베카가 관심을 보였다.
“누구인데요?”
“벼락의 검사.”
“…벼락의 검사?”
“벼락처럼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 사람이지.”
“…저는 빠른 검보다는 파괴력을 높이는 검술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네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면서 오히려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 줄 거다.”
“음….”
“아직도 왕은 날 비롯한 우리 일족을 불러낼 힘이 없다. 오로지 너만이 왕의 세계를 오가고 있으니, 빠르게 성장해야 하지.”
이지스가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보석이 박힌 주먹만 한 아티팩트였다.
“이곳에 그의 움직임과 기술이 담겨 있으니, 배우도록 해라.”
레베카는 이지스가 넘겨 주는 아티팩트를 받으며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딘지 모르게.
‘전투…를 준비하시는 건가?’
아버지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면서.
* * *
“……응?”
그녀는 갑자기 날아온 연락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락한 상대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음성은 꽤나 무거웠다.
“‘그날’까진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녀의 물음에 상대가 대답했다.
-그랬지. 그런데 이젠 상관없다.
“설마… 그날인 거야?”
-그래.
즉각적인 답변이었다.
“진짜로?”
-진짜로.
“……하! 설마 한정우야?”
-아는군. 마스터를.
그녀는 리의 답변에 입을 쩍 벌렸다.
“…진짜로 한정우가 ‘찬탈자’라고?”
-그래. 오랜 계약을 이행할 때야.
“자, 잠깐. 잠깐만!”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던 질 고메즈는 리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가능성을 발견한 건 사실이었다.
다시금 급변하기 시작한 세상 속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성과를 보이는 이였으니까.
알렌 보머에게도 이야기를 했다시피 그를 찬탈자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확신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넌 어떻게 알아봤지?”
-알고 있으니까.
“…좋아. 그럼 이젠 말해 줄 때가 되었다는 소리네?”
질 고메즈는 오랜 약속을 떠올렸다.
리 역시 자신들과 초창기를 함께 했던 인물이었다.
‘우리보다 뭔가 더 알고 있었지.’
덕분에 다들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마왕’조차도.
질 고메즈는 과거를 떠올렸다.
수없이 등장하는 던전.
그중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하지만 꼭 공략해야만 하는 던전이 있었다.
F급일 때 D급 던전이 그러했고, D급일 때 A급 던전이 그러했다.
그런 던전을 위해 모인 이들 중에서도 특별한 인물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성장하고 기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마왕.
번개를 다루며 다인전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뇌신.
그리고 이따금씩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현재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정보를 전달해 주곤 했던 리.
‘마왕’이 마왕으로 불리기 이전의 그때는 상당히 버겁고 힘들며 위험했던 순간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순간이기도 했다.
-말해 줄 거다. 어차피 지금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으니까. 우리나라로 곧장 와. 좌표를 보내 줄 테니까.
“좋아…. 듣고 싶고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금방 갈게.”
-기다리지.
짧은 대화를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질 고메즈는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10분이면 한국에 도착해.’
그녀가 일단 방문하려고 했던 곳은 한국 플레이어 협회였다.
유지석을 만나서 들어야 할 내용들이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온 리의 연락은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반가운 것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질 고메즈는 자신의 퀘스트를 보았다.
이따금씩 받은 퀘스트의 대부분은 해결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몇 개의 퀘스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단연코 이것이었다.
‘문제는 이게… 내용이 변했다는 거야.’
[ 찬탈자(簒奪者)를 지원하라 ]
찬탈의 의지가 있다면 그 무엇을 아까워하지 말며 지원하라. 하지만 만약에 그의 결정이 ‘안정(安定)’이라면,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등급 : ???
보상 : 파편과 기억
실패 : 기억과 희생
묘한 내용.
‘대체 무엇 때문이지?’
딱히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에 변화했을 뿐이다.
최초의 퀘스트에는 ‘안정’이라는 문구가 없었다.
지원하라는 강요만이 전부였던 퀘스트였다.
그게 변화했다.
안정이라는 조건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들먹이며.
‘그리고 또 한 가지.’
보상과 실패에 대한 페널티.
그 어떠한 경우라도 공통적으로 얻어지는 게 있었다.
‘기억이라……. 원래는 보상에만 있던 건데….’
실패 시에도 기억이라는 보상이 걸려 버렸다.
“모르겠네. 뭐, 언제는 내가 고민하고 움직였나?”
질 고메즈는 한숨을 쭉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복잡해졌지만 어차피 해야 할 건 정해져 있었다.
“미스터 유를 만나고… 합류를 선언하면 되겠지.”
오히려 한정우가 찬탈자가 맞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묘한 웃음을 흘리자 아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기네. 아하하… 우리의 지원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리가 마스터로 섬긴다고? 그것만으로도 지상 최대의 세력이 형성되는 건데?”
그걸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는 웃음을 멈추며 눈을 감았다.
‘유는 냉정하지. 그가 판단했다면 적어도 악인은 아니란 소리야. 내가 저번에 봤을 때도 악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어.’
한정우를 떠올렸다.
유지석에게 연락을 받고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적당한 기회가 포착되어 직접 확인까지 끝마쳤다.
재능을 감별하는 재주 따위는 없었지만 적어도 언제쯤 죽을지 파악하는 재주는 길러 온 그녀였다.
‘금방 죽지 않아. 그런 눈이 아니니까.’
마법사로 각성한 주제에 마력은 형편이 없었다.
그런데 마법사로 S급에 이르렀다?
“…재밌어. 흥미롭겠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수준까지 성장한 건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마스터라…….”
리의 음성은 단단했다.
결심이 섰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기억이라는 단어가 보상으로 걸려있는 만큼, 리는 자신보다 먼저 해당 퀘스트를 해결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각성 초반에 클리어했다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상관없어.’
이중 던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플레이어들은 각자 퀘스트를 하나씩 받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각자 달랐다.
그중에도 ‘찬탈자’라는 정확한 인물이 등장한 건 자신밖에 없었다.
‘놈은 어딘가로의 이동이었으니까….’
질 고메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명.
과거엔 등을 맡길 정도로 든든했던 한 명을 떠올렸다.
마왕.
단서를 찾았다던 그는 종적을 감추었고, 5개월 뒤 다시 나타났을 땐 빌런들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내가 파악해 줄게.”
옛 친우이자 숙적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자신의 퀘스트 클리어를 통해 마왕의 변화를 알아볼 셈이었다.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장 전화를 걸었고, 마력 방해가 사라지자마자 공간을 넘었다.
가끔 온 적이 있어서 어색하지 않은 집무실 정경이 드러났다.
“진짜로 넘어올 줄은 몰랐소.”
유지석을 보는 질 고메즈는 그의 테이블에 놓인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알고 있었어? 리가 한정우를 마스터라고 부른다는 걸?”
“…아마 비슷하게 연락을 받은 것 같소. 내게는 그렇게 말하더군.”
“뭐?”
“마탑을 설립할 테니, 예정대로 지원을 아끼지 말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