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마탑 (7)
힘겨운 손짓.
리 박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플레이어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 손짓의 주인이 ‘리’였으니까.
정우는 리의 복부를 보았다.
“……우습군. 기억을 할지는 모르지만…….”
제이.
암살자의 아이로 길러져 암살을 저지르다가 한 아이로 인해 암살이 아닌, 지키는 삶을 살게 된 아이.
정우는 확신했다.
리는 ‘제이’라고.
특유의 눈빛이, 기운이.
“너…… 여전히 어리석네.”
정우는 이마를 짚었다.
리의 배에 꽂혀 있는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잡초였다.
리의 마력에 기생하듯, 그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잡초.
하지만 정우는 리의 상태는 물론 잡초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세계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세계수의 힘으로 상처의 악화를 억제하고.
“널 토양으로 개화시킬 생각을 했어?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스스로를 양분으로 삼는다는 어리석은 생각.
그렇기에 정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그때’와 같은 짓을 하면…… 어떻게 하냐.”
정우가 리의 침대를 짚었다.
웅얼.
그런 정우를 보며 아주 작은 음성으로 리가 중얼거렸다.
“……약속, 이니까.”
“젠장.”
정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맡겨도 되는 겁니까?”
A급 힐러이자 리의 주치의인 장성택은 리 박사를 다그쳤다.
한국에서 한 명의 인원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이미 보고를 받은 상황이었지만.
“암살자면 어떻게 하고요!”
둘만 두는 건 위험했다.
“괜찮아.”
리 박사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무는 손길이 떨렸다.
“저 안에는 ‘그’가 있어.”
그 말에 주치의의 움직임이 덜컥 멎었다.
“…그라면…….”
“수령의 그림자.”
“설마… 저도 감시를 하고 있는…….”
“감시? 아니지. 그저 그는 수령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리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동무를 믿지 못한 게 아니야. 그랬다면 두고 갈 수 있겠어?”
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신이 자신의 생명을 움켜쥐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리의 그림자.
그는 리가 직접 단련시킨, 조국의 또 다른 S급이니까.
실수라도 했다면 죽은 목숨이었을 것만 같아, 주치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혹시.”
떨림을 가라앉힌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남조선의 각성자가 우리 수령님을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지….”
본인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데려온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고.
“…수령께서 반응하신 게 몇 년 만이지?”
“……1년하고도 4개월이 지났습니다.”
리 박사는 담배를 잘근 씹었다.
툭 떨어진 담배 대신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이글거렸다.
염원과 갈망이 가득 담긴 그 시선으로 방 안을 주시하던 리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나…….”
주치의를 끌고 몸을 돌리는 리 박사가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라버니, 부탁해.’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의 몸에 꽂힌 여러 기계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내려와. 같이 이야기하게.”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정우가 입을 열었다.
침묵을 관통하는 음성.
그 음성에.
스르르.
“……그 와중에도 제대로 가르쳤군. 제이.”
정우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
정우는 그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쉐도 미러.”
그 말에 그림자는 단검을 들어 정우의 목을 겨눴다.
“…누구지?”
그림자는 정말로 놀랐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것도 모자라 쉐도 미러까지 파악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제로 모습을 숨긴 건 천장.
하지만 나타나는 건 바닥으로부터.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미러라는 명칭을 붙인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오로지 둘뿐이었다.
“…제이의 옛 친구.”
“정말로…… 아는 사이인가?”
그림자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동자를 제외하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탓에 진짜로 그림자처럼 보였다.
정우에게는.
그리울 정도로 너무도 익숙한 형상이었다.
쿵!
그림자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등장 때부터 이미 결정한 듯, 그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 능력을 알아볼 것이며 날 제이로 부른다면… 그는 네가 섬겨야 할 왕이다.”
부복한 자세로 그는 고개만 들어 정우를 보았다.
“그게 ‘아버지’께서 제게 습관처럼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에 정우가 고개를 돌려 다시 리를 보았다.
힘겹게 입술을 비트는 모습에 정우는 가슴이 먹먹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그 말씀을 그저 과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격변에서 힘을 얻은 후로도 아버지의 그 말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자.
아니, 리의 아들인 리정환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신이었다.
그런 신이 신하를 자청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때문에 검증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라……. 제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해도 될 텐데?”
“제겐 지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우가 리정환의 눈을 주시했다.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은… 부전자전이군.”
과거 생명의 무게를 깨달아 버린 암살자의 눈이 저랬다.
목숨을 걸고 사과를 하겠다던 제이의 눈동자와 리정환의 눈이 겹쳐졌다.
딱!
정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스으!
리정환은 두 개의 단검을 틀어쥔 채 경계 태세를 갖췄다.
머리카락 한 올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감싼 복면 사이의 두 눈이 당혹을 머금었다.
“……무, 무엇을 한 거죠?”
“당황할 때 보이는 모습도 비슷하고…….”
떠오르는 여러 기억 속에서 정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친구를 다시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일렁이던 눈빛이 가라앉고, 정우의 기세가 묵직해졌다.
리정환은 그것에 반응하듯.
슷!
어느 순간에 양손에 검은색 단검을 들고 있었다.
살짝 굽힌 상체로.
공간 이동.
찰나의 순간 자신을 감싸고, 마력의 저항조차 무시한 채로 장소를 넘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호랑이를 만난 사람의 감정이 이럴까.
리정환은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단검이 그저 나무젓가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시작하자.”
외견상 자신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한정우였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이건가.’
리정환은 이를 갈았다.
“…시작, 하겠습니다.”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평생을 들은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리정환의 몸이.
스윽!
사라졌다.
정우는 리정환이 사라짐과 동시에 쿵, 발을 굴렀다.
쩌적!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균열이 이윽고 지면을 들어 올린다.
충격에 밀려 솟구치는 지면을 박차며.
파앗!
정우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어느새 꺼내 든 창을 들고서.
위력도 능력도 상당히 떨어지는 삼단창이었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파괴되지 않는 성질.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실질적인 강도가 뛰어났기에.
‘찌른다.’
촤악, 촤아악!
하늘을 뒤덮듯 쏘아지는 정우의 스킬마저 견디며 지상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깡, 까가가각!
그 사이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정우가 있던 자리였다.
고속 이동.
제이의 움직임을 빼다 박은 리정환이 어느새 정우의 위치까지 이동하여 일격을 막고 있었다.
소낙비와 같은 일격을 쳐 낸 리정환의 허리가 숙여지며 비틀어진다.
그리고 휘어지는 팔.
검은 선이 하늘을 쭉 갈랐다.
정우 역시 그 선을 보며 허공을 굳게 딛고는 허리를 비틀고 어깨를 뒤로 뺀 뒤.
파앗!
창을 찔러넣었다.
검은 선을 자르는 일점.
리정환의 모습이 다시금 사라졌다.
‘뒤다.’
창을 비틀어 뒤를 막은 정우는 창대로 느껴지는 충격에 움찔하면서도 창을 회전시켰다.
스륵.
그와 동시에 창대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사라진다.
‘진짜로… 제대로 배웠어.’
끊임없이 이동하고 끊임없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건, 제이의 공격 방법이었다.
아래로 낙하한 정우가 땅을 딛자마자 울퉁불퉁 솟은 지면을 박차며 이동했다.
팡!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격을 피하며, 정우 역시 창대를 휘둘렀다.
가각!
‘빠르군.’
리정환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사사사삿!
세상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검은 선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정우 역시 창대를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며 검은 선들을 쳐 냈다.
짧은 공방.
그사이에 나눈 일격은 수백에 달할 정도였다.
콰앙!
서로를 노리다 부딪치는 둘의 충격에 지면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치솟는 지면을 밟고 거리를 벌렸다.
복면 사이로 리정환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 정도라면… 실망인데?’
느낌이 달랐다.
아버지께 들었던 그 어떠한 강렬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능력이나 전투 능력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을 압도하는 부분이 없었다.
비등(比等).
그렇다면.
‘아버지께는 닿지 못한다.’
실망감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퍼져 나갔다.
‘갑자기 공간 이동을 할 땐 놀랐지만……, 잠깐.’
리정환의 머리가 정지했다.
‘공간 이동?’
정우의 기세에 밀려 전투를 준비하느라 잊어버렸던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리의 처소.
수많은 방어 체계가 갖춰져 있는 그곳은 당연히도 공간 이동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걸 가볍게 뚫고 자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공간을 넘은 건…….
오싹!
그제야 리정환은 정우가 다르게 보였다.
‘아티팩트 따위가 아니야….’
아티팩트라면 ‘A급 마력 결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신의 힘.
그게 의미하는 건….
“……마법사.”
자신과 비등한 실력을 보인 창술가가 실제로는 마법사란 뜻이었다.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잊고 있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네가 섬겨야 할 그분은, 모든 마법 위에 군림하는 자요. 마력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마법을 지배하는 자이다.”
“제이가 그렇게 말하던가? …오랜만이군. 그답게.”
떠오르는 기억의 일부를 내뱉은 리정환은 돌아오는 답변에 침음을 삼켰다.
‘…온다.’
정우는 추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아공간에 창만 집어넣었을 뿐이다.
한낱 무기도 없이 빈손으로 서 있는 모습.
얼핏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리정환의 본능은 끊임없이 경고를 내뱉었다.
이를 증명하듯.
‘……소리?’
조용한 무언가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웅웅.
정우의 곁에서 생겨난 반투명한 구가 이윽고 증식이라도 하듯 수를 불려 나간다.
증식하고.
또 증식하며.
‘…대체…… 어디까지?’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파앗.
고속 이동으로 사라지는 리정환의 눈이 커졌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그것이 들이닥치고 있었기에.
마치 신의 손이 자신을 움켜쥐는 듯한 장면에 이를 앙다문 리정환의 전신에서 마력이 넘실거렸다.
‘이까짓 것!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