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마탑 (1)
마력이란 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공기가 존재하는 게 자연스럽듯 마력이란 것도 태초부터 존재하여 그 어떤 것보다 자연스러워야만 했다.
원래라면 그랬다.
“저도 그렇게 배웠어요.”
절로 눈길이 돌아갈 정도의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가 정우의 곁에 섰다.
며칠 사이에 성장한 건 정우뿐만이 아니었다.
메아리도 벽을 앞뒀고.
“그사이에 아예 벽을 넘었네.”
레베카는 놀랍게도 아예 벽을 넘었다.
“제가 갇혀서 전투만 고민하던 시간이 얼마인지 아시잖아요.”
족히 수 천 년.
그 긴 세월을 떠올린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의 수준을 이제야 육체가 따라가기 시작한 거지.”
레베카는 아라크네를 잡으러 갈 때만 하더라도 그리 뛰어나지 않은 실력을 지녔었다.
C급 플레이어 혹은 그 이하.
하지만 수 천 년 동안 일족을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전투 방법과 성장 방법을 모색했던 그녀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우습게 볼 게 아니군.’
뛰어난 마력 체계를 지닌 마녀답게 성장에 대한 기반을 굳건히 다져 놓고 있었다.
‘하기야, 그 긴 세월 동안 미치지 않은 게 보통 정신력이 아니지.’
겪어 봤기에 할 수 있는 말.
정우는 레베카의 급성장에 잠시 놀랐지만 납득했다.
그녀의 토양은 이미 씨앗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까지 뻗어 낸 상태였다.
마스터가 된 것은 그것을 기반으로 열매를 맺은 셈인 것이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결과.
하지만 열매가 맺히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엔 정우도 감탄했다.
“원래라면 마력은 ‘각성’만 시켜 주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그런 종류여야 옳아.”
병실로 올라가며 정우가 눈가를 좁혔다.
“하지만 지구에서는 아니지.”
특수 병동.
이곳에 입원한 이들은 전부 막대한 재력을 지닌 부모의 자식 혹은 그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S급 용병 김하란조차 통장 잔고만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궁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자들의 병동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했다.
“아예 그릇 자체가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들이부으니 깨질 만도 해요.”
레베카는 메아리를 마녀의 마을로 다시 보내기 위해 연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을 자청한 그녀였지만 눈동자에 맺힌 건 여전한 호기심뿐이었다.
마녀의 마을이라는 아주 작은 터전을 벗어나 새롭고 놀라운 이세계의 풍경을 보는 건 그녀에겐 흥미로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정우는 오래간만에 대화도 나눌 겸 그녀의 합류를 승인했다.
“내 예전과 비슷하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육체.
아니, 받아들이기도 전에 너무도 연약해서 깨어진 그릇.
그것이 바로 이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의 병이었다.
“그래도 과학이라는 건 참 신기하네요.”
“신기하지. 정확하게 이유를 모름에도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도는 마련했으니까.”
확실히 개중의 몇몇은 천재였다.
각성만 시켜 주는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야 하는 마력이, 아예 육체를 부숴 버렸다.
마력이란 걸 경험해 본 적 없는 그릇은 너무도 쉽게 부서졌고 복구되지 않았다.
복구시키는 방법도 모르고, 원인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놀랍도록 처치는 제대로 해냈지.”
병실에 들어선 정우는 김하란의 딸을 앞에 두고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보통의 환자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모습.
하지만 저 링거에 가득 담겨 있는 ‘저주’를 보며, 정우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독도 잘만 사용하면 약이다….”
“그 증거와도 같은 상황이군.”
링거에 담긴 저주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무력화.
그리고 또 하나는 마력 거부.
무력화로 육체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마력 거부로 그릇의 깨어짐을 막았다.
그 덕분에 김하란의 딸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정우는 김하란과 약속을 했다.
그의 딸을 고쳐 놓겠노라고.
“치유를 펼칠 줄 알았더니, 더 필요한 방법이 있었군.”
단순히 지구의 의학을 뛰어넘은 방법이 필요할 줄로만 생각했던 정우는, 김하란이 언급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의 병원(病源)을 알아냈다.
오히려 더 간단해진 상황.
정우는 김하란의 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스륵.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실이 그의 딸, 김정하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꿈틀.
그것이 닿자마자 그녀의 육체가 반응했다.
정우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마력의 실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실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가장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라크네라는 몬스터의 마력 패턴이라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달리 마력의 실은 매우 뛰어났다.
봉합사처럼, 천천히 움직인 마력의 실이 김정하의 깨어진 그릇을 감싸기 시작했다.
강제성을 띠는 형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못 일어나니까.’
그렇게 김정하의 그릇을 어루만지면서도 정우는 섬찟했다.
자신 역시 같은 처지가 될 뻔했었기 때문이다.
마력 4.
각성했을 때 보유하고 있던, 처참할 정도로 적었던 마력.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 역시 같은 처지로 이렇게 누워 있었을 거다. 아니… 그 전에 죽었겠지.’
잔존 마력이야말로 정우의 구명줄인 셈이었다.
휘이잉!
안도하는 사이 김정하의 전신에서 약간의 바람이 불었다.
‘아쉽군. 정령사의 자질인데….’
바람의 정령.
그것이 곁에서 맴돌다가, 봉합하다 못해 봉인해 버린 그릇의 형태에 낙담하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끔뻑.
수년간 감고 있을 정도로 무거웠던 눈동자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김정하의 모습이, 정우의 눈에 들어왔다.
흐어어엉!
정우는 김하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오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김하란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흑, 흐흑!”
그리고 김정하도 마찬가지였다.
난리가 난 병원을 뒤로한 채 정우는 모습을 감췄다.
괜스레 가슴이 먹먹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신보다 정보력이 좋은 유지석에게 부탁을 했다지만, 손을 놓고 있는 형태라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조급함을 억누른 채로.
정우는 뜨거워진 눈가를 꾹 눌러 열기를 빼냈다.
“왜 병원에서 그냥 나오신 거예요?”
레베카는 의문을 표했다.
“저기에 있는 사람들을 왜 다 고치지 않냐고?”
“왕께선 가능하시잖아요.”
“가능하지. 하지만 이왕 고칠 거라면….”
봉사 활동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저 병동은 특수 병동.
하루 환산 몇억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병자들을 위한 병동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저기에 있는 여덟 명의 환자는.
“김하란에 준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S급 플레이어 김하란의 영향력은 저 안에 있는 환자의 가족보다 더 뛰어나야 옳았다.
다만 김정하에게 묶여 있던 그는 다른 플레이어보다도 더 저비용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티팩트조차 용병인 입장이라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득은 적었다.
하지만 현재의 김하란과 비슷한 영향력을 지녔으며, 이 정도는 우습지 않을 재력을 보유한 집안이라는 소리는.
“이용 가치가 있겠군요.”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지.”
얻을 건 얻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갱신되며 막대한 금액이 쌓이는 통장이 있었지만, 영향력은 전무한 자신이었다.
정우는 이 변화에 스스로를 움직이고자 했다.
“세력을 만들 거다.”
김하란은 신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내걸 보상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김하란은 분명히 스스로를 보상으로 내걸 거야. 그럼 내가 할 건 하나지.”
레베카는 정우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군. 나만의 세력을 만들어야지.”
정보를 얻고 전투를 벌이고, 운영을 하여 영향력을 떨치는 건 개인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 합류도 긍정적이다.”
“…그렇군요. 저도 플레이어 자격이 있으니까요.”
“세 명의 S급이 하나의 세력에 있다?”
정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중국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태풍이 될 건 확실하지.”
* * *
유아영은 간만에 아주 편안한 잠을 잤다.
정우의 비서에서 한 발 멀어진 이후 그녀는 더욱 바쁜 삶을 살았다.
상품 구매 계약은 바쁘고 힘들긴 해도 나름 보람도 있었다.
“후후. 무엇보다 갑의 위치를 절감하게 만들어 줘서 기뻤지.”
하지만 그 외의 사안.
특히나.
“…제임스!”
우상 중 하나였던 이의 처지가 손바닥 뒤집듯 변해 버렸다.
그녀는 지금 제임스 밀러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정우에게 미국으로 한 번 넘어오라고 지나가는 듯 말한 그였지만, 실상은 정우의 방문을 고대했다.
때문에 여러 사안으로 미국을 방문하지 못한 정우를 대신해서 그의 닦달을 들어야 했던 건 다름 아닌 유아영 본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한정우의 일정을 조정해 보라며 연락하는 제임스 밀러 덕분에 유아영은 매일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 잘생긴 얼굴에 주먹이나 한 방 날렸으면 좋겠어!”
그녀가 여유를 찾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오기만 해봐. 그간의 곤욕을 고스란히 돌려줄 테니까.”
제임스가 한국에 입국한다는 것.
그게 제임스의 스토커 같은 연락이 끊어진 이유였다.
과연 그녀가 제임스에게 소리를 높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오랜만에 업무를 끝내며 숙면을 취했다.
세상은 난리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소란에서 적어도 유아영은 제외되었다.
“전담 비서가 이래서 좋은 거구나.”
특히나 한정우는 자신에게 업무를 맡겨 둔 뒤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솔직히 횡령을 해도 모를 정도로 관심도 없었다.
“…유혹이야 있지만, 됐어. 지금도 충분한걸.”
한정우의 소속이 된 이후 얻은 돈은 원래라면 평생을 일해도 벌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액수였다.
수고비조차 수고비가 아닌 액수.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일 터였다.
“내가 로마네 콩티를 먹어 볼 줄이야. 그것도 내 돈으로 사서!”
꺄아,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유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단 한 병에 8억이 넘는 돈을 사용했다.
손이 벌벌 떨렸지만 눈을 딱 감고 지른 와인에 소믈리에까지 불러 제대로 즐긴 하루였다.
자신에게 주는 위대한 휴식.
유아영은 단 한 모금의 억대 와인을 마셔 보겠다는 버킷리스트를 단숨에 갱신했다.
꿈과 같은 하룻밤의 휴가를 즐긴 유아영은 간단히 세수를 하고는 컴퓨터를 켰다.
메일에 답장을 하고 서류를 검토하자 3시간이 훌쩍 흘렀다.
“으으!”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편 그녀가 배에 손을 올렸다.
“배고픈데 밥을 먹을까?”
아직 이른 점심시간이었지만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일정이 꼬이기 시작한 건.
띵동.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방문자 때문이었다.
뜬금없는 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확인한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
멍한 표정으로 문 너머의 상대를 화면으로 바라만 보았다.
“왜 여기에?”
“문 좀 열지?”
자신이 보인다는 듯 카메라를 보며 씨익 웃는 상대에 유아영은 저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연락 못 받았어, 미스 유?”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회의는요? 협회로 바로 간 거 아니에요?”
“오우! 저런. 혹시 우리 한이 고용을 해지하기라도 한 거야? 연락을 못 받은 모양인데….”
띠링.
그때, 유아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봐. 안 그러면 돌아가게.”
유아영이 홀린 듯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게…….”
“다행이군. 같이 이동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준비하지? 귀여운 곰이 가득 그려진 잠옷을 입고 출근하기는 그렇잖아?”
그 말에 유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나가! 당장 나가!”
그러고선 오히려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도망을 치는 유아영을 보며.
제임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