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업데이트 (3)
“음…… 이렇게 모인 건 오랜만이군.”
“하데스는?”
“몰라. 그 시체 성애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게 뭐야?”
“마스터는?”
“글쎄.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꽤 오래되지 않았나?”
수르트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왕의 부재.
덕분에 자신 또한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으니까.
“음…… 그럼 우리 셋이라고?”
“그런가 보군.”
눈가를 좁힌 노인이 여자를 보았다.
두 시선이 마주한다.
“아쉽게도 저도 하데스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고 있어요.”
“골치 아프군.”
원탁의 다섯 의자 중 두 의자가 비어 있었다.
마왕.
그리고 하데스.
“골치 아플 게 있나? 어차피 이거 때문에 모인 건데.”
씨익 웃는 수르트가 자신만 보이는 홀로그램을 툭툭 건드렸다.
퀘스트는 분명히 각자에게만 보였다.
다만 그 내용은 공통적이었으며, 숨길 이유도 없이 모든 이들에게 공유되어 있었다.
시계.
이제는 10분도 채 남지 않은 타이머.
그걸 보며 세 명의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 왕은 이 변화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자 했었다.
하지만 왕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이들.
전적으로 마왕의 편에 선 하데스가 아닌 이상, 각자는 서로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같은 편임에도 한자리에 모이는 건 어려웠다.
이 시간의 결과물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결과를 채 10분 남겨 놓은 상태로 회의를 진행한 이유였다.
‘능구렁이들.’
‘이미 대비를 했겠지.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기회를 놓칠 놈들이 아니니까.’
‘음…… 꽤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예상한 건 있나요?”
뇌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발키리의 질문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없군요. 뭐,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마치 꽃과 같았다.
만개한 미모는 그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며.
붉은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정신을 앗아갈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언뜻 순수해 보이기까지 하는 매력이 가득한 여인.
그녀는 발키리라는 이명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는 한 명의 왕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모인 모든 왕 중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났다.
그녀의 뇌신에 대한 악의는 유명했다.
공공연하게 도발을 일삼으며 뇌신의 흔적이 나타났다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곧장 이동하는 게 바로 그녀였다.
수르트가 스스로의 강함에 목이 마른 자였다면, 그녀는 세간이 정리한 강함이라는 등급에 목을 매는 자였다.
마왕 다음의 강자, 뇌신.
그녀는 그의 목을 베고는 마왕의 자리에 도전하고자 하는 도전자였다.
“자네에게조차 정보가 없으면 이건 정말 예기치 않은 사건이란 뜻인데….”
그리고 다른 한 명.
노인에 가까운 중년인의 곁엔 거대한 활이 있었다.
의외로 스나이퍼라는 단순하고도 조촐한 이명을 가진 그는, 거대한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궁수였다.
다만, 스나이퍼라는 이명에 걸맞게 그가 죽인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이 원거리에서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브라질의 영웅, S급 플레이어 조제를 죽일 때 무려 15km의 거리에서 저격에 성공한 것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여, 단숨에 왕의 자리를 꿰찬 거인이었다.
수르트는 그런 이들을 흘겨보았다.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돌더군.”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그대가 모른다는 건 웃긴 일일 테고…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가?”
“무엇을요?”
“업데이트.”
“아! 뭐, 하나의 가정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어요.”
한 거대 길드의 길드원이 스스로의 가정이라고 주장하던 내용은 이미 알음알음 퍼져 나가던 중이었다.
업데이트.
그런 내용으로.
문제는 그런 주장은 모종의 이유에 의해 차단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국의 거대 길드 길드장과 협회의 협회장.
그리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빌런 협회에서 이런 정보가 어지간한 플레이어들 사이로 퍼지는 걸 막고 있었다.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가 대표적이었지만.
“그런 논리로 움직일 곳은 아니지. 이곳이.”
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걸 믿는 건가요?”
“글쎄.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
06:11
고작해야 6분이 남은 시간을 흘겨보며 수르트가 씨익 웃었다.
“그래서 늦은 거 아닌가? 우리의 회담이?”
“음…… 부정은 못 하겠군.”
“그러는 수르트께선 어떤 업데이트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글쎄. 거기까지 추론하는 건 정보가 너무 없어서 불가능하지만….”
수르트가 은근한 눈빛을 발키리에게 보냈다.
“그대가 아는 것과 비슷한 결과이지 않을까, 예상한다.”
“호오.”
발키리가 이채를 띄었다.
“모두의 생각은 비슷하군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격변에 대비하라.
강세기의 그 말이 힌트였다.
“세이렌의 영토에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얻었다고 생각하나?”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는 변화, 그들은 격변. 그 단어만 달라진 건 아닐 거예요.”
어쩌면 강세기와 유서린은 실수를 한 걸지도 몰랐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다른 S급들도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을 테고, 자신들과는 조금 다른 단어를 발견했을 테니까.
하지만 강세기와 유서린은 급했다.
일본의 총리를 마무리 지으며 영웅 심리에 심취했다.
“병신이죠.”
“덕분에 우리는 대비하고 있지 않나.”
“그렇지. 놈들도 모를 거다.”
수르트의 눈이 빈 의자로 향했다.
원탁에서도 가장 화려한 의자.
바로 마왕의 자리로.
“‘왕’이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걸.”
“음…… 모호한 말이었지만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지.”
“모호하긴요. ‘때가 되면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과 조합하면 어려울 건 없죠.”
“지금이 그때라는 걸….”
뒷말을 받은 수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것 같은 예감인데….”
“제 생각엔 ‘미해결 지역’에 준하는 영역이 생겨날 것 같군요.”
“음…… 다들 모른 척한 것치고는 잘만 알고 있지 않은가?”
“영감도 마찬가지이면서.”
“음…… 기회를 놓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라서.”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하지만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때야 말로 그가 가장 위험한 자객이 되는 순간이라는 걸.
반개한 눈.
세상을 좁혀 약점을 꿰뚫어 보는 그 눈빛은 다른 두 왕조차 섬뜩해질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우리 영역 안에 던전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해야겠군요.”
“낭만적인 소리군. 기도라….”
피식 웃은 수르트가 손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빌 수밖에 없군.”
던전은 예전 철광이나 금광과 비슷한 존재였다.
자신의 영역에 존재할수록 재력과 군사력을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
적어도 이들에게 던전은 그랬다.
때문에 던전의 발생은 호재였다.
특히나 퀘스트 던전의 독점은 수하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수단이었기에, 모두는 퀘스트 던전의 등장도 기대했다.
‘B급 정도면 훌륭하겠군.’
‘C급만 돼도 충분하죠, 욕심은….’
이들은 모두 기대에 차 있었다.
어떤 변화가 들이닥치든 자신들은 포식자였다.
왕이었으며, 플레이어들조차 파악하지 못한 세계의 영주였다.
자신들 영지에 자원이 더 생긴다는 데 반대할 이는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자신들의 던전은 물론, 협회나 길드에서 관리하는 던전까지 강탈해 올 계획을 세운 그들의 눈에.
제로로 향하는 타이머가 들어왔다.
더불어 울리는 알람음까지.
“……예상이 맞았군요.”
희미한 미소조차 아름다운 발키리의 말을 끝으로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탈은 예정대로 일주일 뒤에.”
“음…… 뒤통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일주일 뒤에나 신경 써 보자고.”
서로를 향해 음흉한 눈빛을 보낸 세 명의 왕이 각자의 출구로 향했다.
“아!”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모두의 발을 잡아끈 이는 수르트였다.
“알아서 준비할 하데스와 마스터이지만, 만약에 둘의 대비가 어설프다면…….”
“봐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죠.”
둘의 확언에 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다들 훌륭하군.”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계를 뒤흔들, 빌런의 왕의 대화는.
* * *
“……어?”
타이머가 00:00을 향했을 때.
모두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거나 입을 벌렸다.
[ 변화에 대비하라 ]
G급 던전의 출현 수 3배 급증.
F급 이상의 던전의 출현 수 1/2로 급감.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를 내용.
대놓고 플레이어를 더 만들겠다는 사실엔 모두가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가족들을 모두 모으게.”
“길드원들의 가족부터 모아!”
“각성시킬 사람들 선별해! 협회에선 이번 일 모조리 해결 못 해!”
소란들이 생겨나기 바로 전에.
모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 변화에 대비하라 ]
마력 분포도 증가.
‘상태창’의 활성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하나와.
의미를 알 수 있는 말 하나.
두 개의 메시지는 업데이트를 끝마친 게임의 접속 장면처럼 모두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파악이 빠른 이들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고, 파악이 느린 이들은 뒤늦게 멍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마력 분포도 증가가 뭔 말이야?”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던전 브레이크 발생 확률이 올라간다는 소리야! 더불어 고위급 던전의 등장 역시!”
“……뭐?”
모든 던전은 마력을 머금고 있다.
마력을 머금은 양에 따라 던전의 등급은 나뉜다.
마력 분포도가 증가한다는 건, 말 그대로 지구에 분포되는 마력의 양이 증가한다는 뜻.
자연스럽게 던전의 등급이 향상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가히 ‘업데이트’에 가까운 변화인 셈.
모두는 이 현상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회는 협회대로 G급 던전의 관리에 대한 계획을.
그리고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대책과 변화할 확률이 높은 던전에 대한 고뇌를.
길드는 자신들이 따 놓은 던전에 대한 온전한 확보와 더불어 새로운 전력을 흡수할 계획을.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상성에 맞는 던전의 난이도와 변화할 난이도를 계산하여 번호표를 받을 준비를.
한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모두는 기존의 룰에서 조금 더 자신의 것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을 뿐이지만.
협회의 뛰어난 판단력 때문에 지금의 변화 속에서도 안정적인 한국과는 달리.
콰앙!
“……너, 뭐 하는 거야?”
업데이트라 불린 변화가 끝난 지 고작해야 세 시간 만에 사건이 발생한 건, 비단 베트남뿐만이 아니었다.
스위스, 캐나다, 인도, 이탈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폭음과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너희가 그걸 가지면 우리가 말라 죽게 생겼거든.”
“B급 던전이 A급으로 진화하기를 기다릴 것 같으냐!”
“흐흐. S급 던전은 우리 길드에서 잘 먹어 주지.”
“집어삼켜! 지금이 아니면 고위 길드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 움직여야 해!”
모두는 알게 되었다.
마력 분포도의 증가가 의미하는 것을.
마력의 양이 증가하면 던전의 등급은 올라간다.
그렇다고 해서 몬스터의 종류나 배경이 바뀌는 경우는 없다.
단지 몬스터가 조금 더 위력적으로 변할 뿐.
던전에 담기는 마력의 양이 달라지니 보상도 달라졌다.
성장의 폭이 상승했으며.
무엇보다.
“아티팩트의 등장 확률이 높아졌다! X발, 이러면 던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잖아!”
아티팩트의 등장률이 급증했다.
고작해야 E급 던전에서도 등장할 만큼.
소란이 커진다.
G급 던전의 급증은 상관이 없었다.
공략해 봐야 F급.
당장 도움이 될 리가 만무했으니까.
때문에 미래를 염두에 둘 수 있는 세력만이 G급 던전 확보에 뛰어들었고.
대부분의 길드와 플레이어들은 등장률이 반토막 나 버린 일반 던전의 확보에 열을 올렸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길드끼리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협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지역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멕시코를 비롯해 브라질까지.
정신없이 회의하던 유지석이 멈칫한 것도, 해당 지역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설마…….”
짧게 침음을 삼킨 그가 감았던 두 눈을 떴을 땐, 이미 확고한 판단을 내린 후였다.
“…빌런들의 영역이군.”
새로운 사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왕이라 지칭하는 절대자들의 ‘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