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백작 (5)
오스카 백작이 트라우마로 얼룩진 과거를 떠올렸듯.
정우 역시 같은 시점을 떠올렸다.
첨예한 결과가 나왔지만 둘의 감정은 비슷했다.
바로 아쉬움이다.
오스카 백작은 끝내 트라우마를 넘지 못하고 불살라지는 것에.
단 한 발짝을 넘지 못해서 저 불덩이를 가르지 못한 것에 진한 아쉬움을 가졌다면.
정우는 과거와는 달라진 마법의 위상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오스카 백작은 저주의 눈빛으로 정우를 쏘아보았다.
신체의 일부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에 뒤덮여 있던 검은 의복이 불타올랐고.
피부가 녹아내렸지만 안광만큼은 서늘하게 정우를 담아 냈다.
정우는 붉은 화염 속의 안광을 담담히 받아 냈다.
하지만 아무리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작열의 통증을 견딘 오스카 백작이라지만, 대마법이 주는 대미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오스카 백작의 안광이 탁해진다.
가장 강한 오스카 백작이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물 안의 뱀파이어들은 모조리 운석의 충격파와 고온에 소멸해 버렸다.
오스카 백작이 정신을 잃자 정우는 마력을 거둬들였다.
운석의 크기가 급속도로 작아지고, 불길이 사라졌다.
압도적인 파괴력이 찰나의 순간 사라진다.
이글이글.
들끓는 지면과 후끈한 공기는 여전했지만, 막대한 재생력을 지닌 뱀파이어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즉, 오스카 백작과 다른 두 마리의 S급 뱀파이어는 목숨이 붙어 있다는 소리였다.
재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불타 버린 뱀파이어들 사이에 처참한 형태의 세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정우는 염동으로 놈들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가져왔다.
드루이드는 하체가 전부 녹아서 상체만 반쯤 남아 죽기 직전이었고.
철혈의 군주는 보다 튼튼한지 오히려 백작보다도 더 온전한 모습이었다.
오스카 백작은 얼굴이 반이나 녹아내렸고, 양팔이 타버린 앙상한 가지처럼 변해 버렸다.
이것만으로도 이들은 정신을 차려도 도주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정우가 굳이 메테오를 뱀파이어의 토벌에 사용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바로 피의 증발.
마력을 머금은 피는 어지간한 온도로는 증발을 하지 않지만, 보다 강력한 마력을 머금은 불에는 버티지 못하고 여느 물처럼 증발해 버린다.
뱀파이어의 힘의 근원은 다름 아닌 피.
피의 양과 힘은 상관관계가 깊었다.
“이걸로 정신을 차려도 아주 미약한 마법조차 사용하기 어렵겠지.”
비교적 나아 보인다는 철혈의 군주조차 탄탄한 육체는 사라지고 깡마른 몸에 푸석푸석한 피부로 변해 버렸으니.
정우는 이들을 마법으로 묶어둔 채로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언데드의 던전 브레이크.
철원에서 벌어진 건 그렇게만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으로는 뱀파이어가 지하에 군림하고 있었다.
클리어됐을 거라고 착각했던 던전 브레이크를 그대로 방치해 뒀다면.
적어도 일 년 안에 철원과 포천, 가평과 춘천에 이르기까지 일대가 모조리 뱀파이어의 손에 떨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놈들은 이미 던전 브레이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이미 한국에서도 뱀파이어의 피를 받아들였던 놈들이 토벌되었고, 일본에서도 뱀파이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놈들은 이 던전의 법칙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우가 마지막 순간 메테오를 없애 놈들의 소멸을 멈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던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전에 확인해야 할 곳이 바로 지하에 있었다.
자신의 공격에 방어하듯 우수수 솟구쳤던 뱀파이어의 모양새는, 마치 건드려진 벌집의 벌과도 같았고.
“…불 켜진 집에서 퍼지는 바퀴벌레에 가까웠지.”
그만한 수가 머물면서 회복하는 건, 어지간한 공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간성도 그렇고, 마력 밀집도도 그렇고.
정우는 마력의 실을 살짝 밀어내며 놈들이 뛰어올랐던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아주 조금의 차이였다.
지상과 지하의 간격은.
하지만 그런 간격을 넘는 순간, 정우는 이 공간이 빛을 삼켜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티팩트가 있군.’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뱀파이어에게 이득이 되는 아티팩트가 매장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세크나트의 목걸이의 모조품이 아닌, 그것에 비견될 정도의 가치를 지닌 아티팩트가 놈들의 터전을 공고히 유지시키고 있었다.
구멍이 뚫렸음에도 빛은 이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심해에 이른 것처럼, 정우는 검은 공간을 볼 뿐이었다.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우는 마법의 신이라고 불렸던 자.
아티팩트를 비롯한 여러 능력 등으로 빛을 차단해 둔 이곳의 정경 따위는.
“관이 많기도 하군….”
눈에 훤하게 보였다.
수백 개의 관이 보였다.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 지하는 이미 놈들의 터전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아티팩트부터 찾아야겠군.”
정우는 마력을 흩뿌렸다.
지하의 넓은 공동을 속속들이 살피던 정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 아래가 있다?”
그것도 누군가가 통로를 막아 놓은 흔적이 보였다.
정우는 퍼뜩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외형이나 음성 등이 떠오르진 않지만.
‘인식 방해를 걸었던 그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내가 떠올랐다.
상태를 점검한 정우는 다시금 창을 들었다.
공동은 넓었지만, 막아 놓은 통로 안쪽은 좁아 보였다.
단 한 번 모든 마력을 오러로 돌렸음에도, 정우는 이 체계를 습득해 버렸다.
자연스럽게 오러가 신체에 깃들고.
‘하이브리드가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반 정도는 마력을 유지한 채로 마법을 준비했다.
적당한 오러와 적당한 마력.
정우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삼단창을 꺼내 든 정우가 발소리를 죽이며 이동했다.
막아 놓은 입구를 본 정우의 손이 가볍게 휘저어진다.
경계 마법이 너무도 쉽게 해제되어 버렸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에 발을 들인 정우는 가는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있다.’
미약하긴 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이 그 속에서 느껴졌다.
통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정우는 자세를 낮추며 접근했고, 통로 끝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숨을 죽였다.
‘…놈인가?’
인식 방해를 건 놈.
퍼뜩 떠오르는 건 바로 그놈이었다.
정우는 조금 더 접근했다.
처음에는 오히려 약한 존재감이 정우의 관심을 끌었다면.
‘이건…… 마정석인가?’
접근하면 할수록 정우의 전신을 자극하는 건 거대한 마력이었다.
주륵.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방대한 마력의 흐름이 정우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마력은 아직 충분해. 고리를 완성시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현재로서는 이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일주일 전의 자신을 떠올리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하나 부족했다.
이 정도의 마력을 순식간에 장악하기에는.
‘전투를 준비해야겠군.’
때문에 정우는 전투를 대비했다.
미약하지만 뚜렷한 존재감.
이 정도 마력의 덩치를 뚫을 정도의 존재감이라면 어지간한 수준 이상이었다.
그렇게 전투를 준비하며 다시 한 발을 뗐을 때.
스으으.
기이한 소음과 함께.
‘피 냄새다.’
진한 혈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 * *
“벌써?”
사내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자신의 기감을 가로막는 얇은 막 너머의 풍경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자존심은 높더니 실력은 못 따라가는군요. …백작.”
적어도 더 버텨 줄 줄 알았다.
사내.
칭 샤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칭 샤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흥미가 생겨서 이 일을 도맡았을 뿐, 자신은 방관자였다.
“재미없게 생겼군요.”
혀를 찬 칭 샤오가 정면을 보았다.
반쯤 붉어진 마정석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은은한 혈향이 코를 찌를 정도로 짙어지고 있기도 했다.
백작을 비롯한 수백의 뱀파이어의 피를 모았다.
그게 마정석과 결합하여 바뀌고 있었다.
“예상외의 상황이군요.”
칭 샤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오시죠.”
칭 샤오가 몸을 돌렸다.
자신의 뒤편.
스스로가 ‘무덤’이라고 부르는 뱀파이어들의 터전과 연결된 통로.
저벅.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기대했지만 반갑지 않은 인물.
“한정우 씨.”
칭 샤오의 태도는 의외였다.
싱긋 웃는 모습은 친한 친구를 만나는 듯한 친근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한정우의 경계를 보면서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정우의 첫 말만큼은 그도 의외였다.
“네가… 칭 샤오인가?”
“……어라?”
칭 샤오는 순간적으로 미소를 잊었다.
다시 미소를 지었을 땐, 한정우는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죠?”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협회에서도 소수였다.
한정우는 모르겠지만 칭 샤오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눈을 떼지 않았고, 그의 성장과 능력 등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메아리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한정우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칭 샤오는 흥미가 생겼다.
어떻게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인지.
과연 ‘어디까지’ 기억을 되찾은 것인지.
“꽤 정확한 소식통이 있어서.”
“흐응…….”
칭 샤오가 콧소리를 냈다.
빌런 협회에 소식통이라.
그것도 자신의 행적을 알아낼 정도의 소식통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수르트인가요? 음… 그자는 아닐 텐데요.”
고개를 갸웃거린 칭 샤오가 정우를 보았다.
“이만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
칭 샤오는 정우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했다.
더욱 낮아진 자세.
단번에 자신의 목을 찌를 듯한 예기를 발산하는 창까지.
정우는 이미 전투 태세였다.
“후우. 이번 작전은 반만 성공이군요.”
“……반?”
칭 샤오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편에 자리한 마정석.
흠칫!
그것의 색을 확인한 정우의 눈이 커졌다.
“…너, 그걸로 뭘 하려는 거지?”
“뭘 하려고 할까요?”
칭 샤오가 은근한 기대를 드러내며 물었다.
질문에 답변 대신에 돌아온 건.
자신의 얼굴 반을 움푹 파고 지나가는 창날.
‘빠르군요.’
하지만 정우의 창이 찌른 건 칭 샤오의 잔상이었다.
고작해야 두 발자국만 떨어져서 정우의 창을 피한 칭 샤오가 볼을 매만졌다.
살짝 베였다.
칭 샤오는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보며 씨익 웃었다.
가면에 가까운 미소가 아닌.
기묘한 의미를 지닌 미소였다.
“마법사가 아니었던가요?”
단순한 질문.
하지만 정우는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왜 내게 기대를 품고 있는 거지?’
그 음성에서 기대감이라는 감정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을 집어넣었다.
“창 안 쓰시나요?”
그러고는 양손을 살짝 벌렸다.
파지직!
요란한 전격이 양손에 맺혔다.
“마법사…는 관심이 없는데요.”
흥미가 사라진 시큰둥한 표정의 칭 샤오를 보며, 정우는 의아함을 품었다.
과거에 비해 정우는 무수한 발전을 이루었다.
마법이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자랐지만, 오러에 한해서는 성장이라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였다.
과거엔 기초 체력조차 부족해서 마법으로 강화시켜 생활했기 때문에 오러가 가지는 감각은 정우로서도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할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그건 정우에 국한된 것이었다.
타인은 그런 정우의 변화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에 놀랄 뿐.
오히려 이렇게 빠르게 급변하는 마력의 성질에 경악을 금치 못해야 옳았다.
하지만 놈은 달랐다.
오히려 아쉬움이 생겨났다.
사라진 흥미.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정우는 관심이 생겼다.
더불어 저 뒤에 있는 마정석까지.
“로드를 불러올 셈인가? 위에 있던 놈들을 매개체로… 소환을 펼칠 생각이군.”
정우의 말에 칭 샤오가 히죽 웃었다.
섬뜩할 정도로 진한 미소였다.
“아직은…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요.”
정우는 칭 샤오가 지칭하는 연결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뒤편.
토사로 막혀 있는 것 같은 벽면 뒤의 공간에 떡하니 존재하고 있는, 게이트.
확실했다.
‘게이트를 활용하는 방법을 안다.’
정우의 손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