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백작 (2)
백마고지는 이 순간 과거로 회귀해 버렸다.
수많은 포탄이 떨어지던 때처럼.
땅이 뒤집히고 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때처럼.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다져진 지면이 모래처럼 가볍게 떠올랐다.
중력의 역전.
일대가 모조리 떠오르는 건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허공으로 떠오른 흙과 돌, 여러 잔해들이 정우의 눈짓에 사방으로 퍼진다.
그러고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한순간에 드러난 지하.
그 지하를 뒤덮은 검은 막은 몇 달이나 정우가 걱정하고 염려하던 가정의 결과물이었다.
“뱀파이어.”
지하는 이미 뱀파이어의 영역이었다.
‘확실해.’
하지만 정우는 그 영역의 막을 보면서도 다른 것까지 눈에 담았다.
바로 ‘협력’이다.
뱀파이어가 게이트를 넘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빠르게 정착하는 건 무리였다.
빌런의 협력이 있었기에 뱀파이어는 지구에 뿌리를 내렸고, 몰래 스며들었다.
막에 가미된 인간의 마력을 보는 순간 정우는 혐오감이 들었다.
이계에서도 같은 인간들끼리 세력을 만들고 전쟁을 벌이는 일이 왕왕 발생했었다.
인간끼리의 전쟁이 전무했던 시기를 따지자면 온 역사를 다 뒤져도 최대 이백 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전쟁은 시시때때로 벌어졌다.
인간을 노예로 삼는 정책이나.
인간 자체를 버러지로 여기는 귀족주의 또한 흔하디흔한 이념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구는 다르다.
지구는 이계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국민이 스스로 결정하는 단계로 들어섰으며.
법과 제도를 공고히 하여 인권을 강조하는 체계에 들어섰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여러 범죄나 사건들이 발생하곤 했지만, 인간과 동물의 목숨의 값이 비슷했던 때와 비교하자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셈이었다.
하지만 빌런이 원하는 건 인권이 아니다.
뱀파이어.
몬스터로 분류되어 이계에선 척결당한 종족과 협력할 만큼.
빌런이 원하는 건 마왕을 통한 군주주의(君主主義)였다.
플레이어를 신인류라고 여기며, 새로운 권력자라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귀족처럼.
과거 무수한 권력을 지녔던 특수 계층처럼 분류하며, 그 권력으로 세계를 개편하기를 바랐다.
‘아무리 그래도 뱀파이어와 협력이라니. 놈들은 인간을 먹이로 여기는 놈들이란 말이다!’
검은 막을 보완하는 마력의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S급.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 전방위적인 마력 결계는 불가능했다.
당시 던전 브레이크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불과 몇 시간도 흐르지 않아 세 단계나 급상승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언데드만이 모습을 드러냈고, 듀라한에게 있던 마정석을 강탈함으로써 던전 브레이크를 막았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는 소리소문없이 지하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세운 견고한 터전.
정우는 욕설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가.
아니, 빌런 협회는 이계의 종족과 협력하는 법을 알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매우 심각했다.
‘이계의 종족과 연락하거나 서로 공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거야.’
마치 마녀의 마을처럼 말이다.
검은색 막을 보며, 정우는 손을 들었다.
웅웅, 요란한 소리가 손짓을 뒤따랐다.
수십, 수백.
마치 증식이라도 하듯, 1초도 채 흐르지 않은 순간에 하늘을 가득 뒤덮은 매직 미사일이.
휘익!
정우의 손짓에 따라 아래로 쏘아졌다.
그것은 마치 융단 폭격과도 같았다.
쩌엉, 쩌적, 콰콰콰쾅!
견고한 막에 금이 가고 부서지는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화악!
정우는 막이 깨어지는 순간 들이닥치는 마력에 코를 찡긋거렸다.
피비린내.
마력 자체에 그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태양이 모습을 감춘 저녁이었다.
어둑어둑한 하늘.
그 하늘을 뒤덮을 더욱 어두운 날갯짓들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 * *
어둠은 우리의 시간이다.
오스카 백작은 하필이면 저녁 시간을 택한 ‘적’에게 조소를 머금었다.
사내는 피를 머금은 마정석을 가지고 지하로 내려갔다.
확실히 완성시키라는 엄포를 했지만, 사내는 예의 가벼운 태도로 웃어넘길 뿐이었다.
‘왕께서 오시면 네 목에 이빨을 쑤셔 넣어 주마!’
사내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룬 오스카 백작이 손짓했다.
쿵, 쿠쿠쿠쿠쿵!
‘적’은 무지막지한 마법을 사용하여 막을 공격했다.
‘금방 깨어지겠군.’
공격이 거셌다.
하지만 오스카 백작은 하늘로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쩌적, 쨍!
유리가 깨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검은 막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오스카 백작으로부터 검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폭격에 가까운 공격 사이로 통로가 형성된다.
그 어떠한 공격도 통로를 넘보지 못하고 외부로 쏟아졌다.
이제 막 검게 변하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씨익.
오스카 백작이 조용히 선언했다.
“왕께서 말씀하신 적을, 붙잡아 내 앞으로 대령해라.”
촤아아악!
그것은 물결이었다.
마치 어둠이 물결쳐서 솟구치는 것처럼,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수하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오스카 백작의 힘은 그 급에 맞는 수준이었다.
즉, 후작을 넘보지 못하는 백작의 수준이란 소리였다.
다만 군세로 놓고 보면 오스카 백작의 수준은 후작에 비견될 정도였다.
비록 작위는 받지 못했지만 백작에 준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두 명의 신하가 백작을 굳건하게 지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말인즉, 오스카 백작을 상대하려면 백작급의 뱀파이어 둘을 추가로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군세가 적을 덮쳤다.
‘왕께서 신경 쓰시는 적이라고 해도 감히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그 증거로 수하들이 솟구치자 반파된 막에 대한 공격이 뚝 끊겼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서로를 향한 공격이었다.
오스카 백작은 한껏 다리를 웅크렸다.
그러고는 지면을 박찬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을 뒤로한 채 하늘로 솟구치는 오스카 백작이 망토를 펼쳤다.
마치 날개라도 된 듯 허공에 멈춘 오스카 백작의 눈에 상대가 들어왔다.
지끈!
또다시 자신을 강압하려 하는 명령과 함께.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본 상대는 강했다.
확실히 ‘적’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놈이 이 정도라고?’
과거에나 오늘이나, 저 인간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했다.
죽여라.
지금도 자신에게 강요하는 듯한 음성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은 백작.
고귀한 피의 지배자 중 하나였다.
그런 정신력으로 명령을 무시한 채 떠올린 건 다름 아닌 왕의 명령.
너희의 것은 아니나 이번에는 기회를 주노니, 그것의 심장에 이를 박아 넣어라.
일족으로 종속시키라는 소리였다.
뇌리에 박혀 드는 정체불명의 명령과는 전혀 다른 명령이었다.
오스카 백작은 당연히 왕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사살을 명하고, 왕은 그것을 탐냈다.
무시하고는 있지만 음성이 주는 강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함을 선사했다.
왕을 보는 듯한 느낌.
어쩌면… 이라는 불충한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까지.
두 절대자가 탐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로군.”
허공을 딛고 선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손짓 하나로 달려드는 수하들을 날려 버리는 태도도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강해 보이진 않는다.
오스카 백작은 그 사실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 강자는 온몸으로 스스로가 강자임을 드러냈다.
소름이 끼치고 피가 바짝 마를 정도로 강자의 기세가 역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적당한 강자였다.
수하들을 상대하는 건 여유로워 보였으나, 아직까지 여유로운 건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살이 목적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겠지만 지금의 목적은 엄연히 포획이다.
오스카 백작의 생각을 읽은 듯, 두 명의 수하가 앞으로 나섰다.
한때는 여러 국가에도 이름을 날릴 정도로 뛰어났던 강자였지만 결국 자신에게 피를 상납해 수하가 되었다.
철혈의 군주와 매혹의 드루이드.
두 수하야말로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든든한 패였다.
과거의 명성이 조금은 쇄락했지만, 엄연히 자신에 준할 정도로 강력한 실력자였다.
오스카 백작은 허공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저 발밑의 사내보다도 못해 보이는 수준의 ‘적’이.
대체 저 둘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오스카 백작은 스스로 관람자를 자처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꼬았던 팔이 벌어지고, 자연스럽게 들어 올렸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하강하는 건.
“……무엇?”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콰앙!
폭음과 함께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아니, 튕겨 나가는 철혈의 군주의 모습을 보며, 오스카 백작은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것은, 당당하던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이제야 ‘적’을 마주한 채로 경계 태세를 보이는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 * *
파지지직!
어둡던 하늘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허공을 가득 채우는 전기가 번쩍이며 세상을 밝혔다가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뒤로 물러난 적들 사이로.
눈에 띄게 도드라지는 마력을 보유한 두 마리의 뱀파이어가 앞으로 나섰다.
그중의 하나는 정우의 어둑한 기억을 강타할 정도로 낯익은 인물이었다.
“……철혈의 군주?”
과거 정우가 한 왕국의 귀족일 당시 영웅으로 존경받던 자국의 국왕이었다.
비록 사망한 지 백 년이 흘렀지만, 그를 뛰어넘는 군주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더욱 영웅이 되어 버린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철혈이라는 이명으로 왕국을 통치했던, 강렬한 절대자.
그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절대자가 뱀파이어가 되어 나타났다.
곁에 선 여자의 모습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검은 연기로 뭉쳐진 동물의 형상이 언뜻 표범을 닮아 있었다.
철혈의 군주는 검을 다뤘다.
그것도 철혈이라는 이명만큼이나 단단하고 무거운 검이었다.
대검(大劍).
그것이 기습적으로 전면을 갈랐다.
비스듬하게 잘리는 세계가 착시 현상처럼 정우를 덮쳤다.
일검.
철혈의 군주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인물로, 왕국의 영토를 세 배나 넓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전투를 겪었고.
일검과 더불어 이동하는 움직임은 베테랑의 그것이었다.
생전엔 허공을 날아다니는 재능이 없었던 철혈의 군주는 의외로 공중전에 능했다.
쩍 갈라진 세상에 다시 붙기도 전에 아래로 뚝 떨어져 들이닥치는 철혈의 군주의 검이 정우의 다리를 베어 왔다.
퉁, 빙글!
바닥을 박찬 정우가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손을 휘저었다.
쩡!
보이지 않는 막이 철혈의 군주의 검을 막았다.
염동으로 철혈의 군주를 밀어내자 뒤편으로 싸늘한 예기가 감지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표범의 쩍 벌어진 아가리.
정우는 표범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비티.”
“……크릉.”
쩍 벌렸던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낙하하는 표범의 신형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고는 여자의 곁으로 이동해 다시 나타난다.
검은 두 눈에 담긴 적의가 한층 강렬해졌다.
옛 시대의 강자.
정우는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들도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뱀파이어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저들이 진정으로 뱀파이어를 원치 않았다면, 저 정도 되는 수준의 사람들이 과연 변이가 끝나기 전에 스스로의 목을 치지 못했을까 하는.
‘뱀파이어에게 물리고서도 대응하지 못했다는 건….’
스스로가 죽을 마음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뱀파이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우는 저들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백작을 보았다.
망토에 수 놓인 붉은 실선이 백작을 의미했다.
뱀파이어와.
그것들에게 목을 내어 준 놈들.
“밤은 너희의 시간이 아니야. 너흰 그걸 알아야 할 거다.”
정우는 싸늘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