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백작 (1)
격변의 시대가 지나고 인구수가 급감하면서 방치된 건물의 수는 급증했다.
부동산은 더 이상 부동의 자산이 아닐 정도로 몰락해 버렸으며, 각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새로 건설하고 있는 여러 특수 지구를 제외한 도시의 인구수는 여전히 감소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흥에서의 사건 역시 그런 폐건물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정우는 한참을 방치되어 있던 건물을 손짓으로 무너트렸다.
그 안에 있을 누군가와 같이.
“……후우.”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을 거란 믿음과는 달리 속은 복잡했다.
“아는 게 적어.”
특히나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건, 놈의 말과는 달리 전무했다.
초창기의 우려와는 달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던 수르트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수준과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이 의외의 성과였다.
‘…아니지.’
정우는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날려 버리며 눈가를 좁혔다.
첩보부원처럼 정보를 빼내거나 얻고,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장길수가 지닌 의외의 정보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강원도 철원이었다.
“의외로군.”
빌런과 뱀파이어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협회의 한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수르트조차 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매우 중요했다.
‘빌런 내에서도 파벌이 나뉘었다더니… 생각보다 골이 깊다.’
이 정도 정보도 공유되고 있지 않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우의 시선은 ‘아버지’에서 이동했다.
‘음…….’
잠시 고민이 들긴 했지만, 선후를 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행적은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유지석 협회장이 파악 중일 터였다.
조급함이 앞서지만.
애당초 일본의 일이 마무리되면 철원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걸 재촉이라도 하듯 장길수가 새로운 사실과 함께 언급했을 뿐이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보면 수르트가 자신의 행적을 찾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철원을 살필 타이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곧장 좌표를 계산한 정우가 공간을 넘는다.
철원에서 조금 못 미친, 포천으로.
* * *
포천에 도착한 정우는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동했다.
마력을 억누른 채로 택시까지 불러 조용히 움직였다.
목표까지 대략 20km가 남았을 무렵.
정우는 택시에서 내려 움직였다.
오러로 육체를 강화시켰기 때문에 정우의 움직임은 가벼웠으며 빨랐다.
억누른 마력만큼이나 효율은 떨어졌지만, 고작해야 20km였다.
‘몬스터도 없는 거리면 충분히 가깝지.’
정우는 달리면서 여러 생각을 정리했다.
뱀파이어에 대한 처우도 고민 중 하나였다.
메아리가 장악한 육체인 사다코는 엄연히 백작 이상의 진조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사역의 종류는 둘로 나뉜다.
‘육체의 파괴를 대비하여 서브로 만들어 놓을 때와….’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당장 활동할 육체를 만들 때.
비슷해 보이는 개념이지만 둘 사이엔 엄연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바로 ‘완성도’였다.
본신의 파괴 후 만들어지는 육체는 심혈을 기울인다.
본신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새로운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진조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힘의 소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의 소실을 줄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새 육체를 완성시킨다.
본신을 보존한 채로 새로운 육체가 필요한 때엔 경우가 다르다.
힘의 소실을 신경 쓰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보다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활동할 육체가 필요한 셈이고, 그 육체가 파괴되어도 본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요양만 잘한다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사다코는 엄연히 두 번째.
본신을 유지한 채로 활동이 필요한 경우에 만드는 사역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매우 중요했다.
‘게이트를 넘으면서 사용한 힘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경우가 가장 확률이 높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확률이 높지.’
인식 방해 마법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정우는 자신에게 인식 방해 마법을 건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냈다.
철원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넸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에게 인식 방해 마법을 건 장본인이었다.
백마고지.
수많은 죽음이 자리한 그곳에서, 새로운 죽음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정우는 숨을 죽였다.
더불어 마력의 억제에 더욱 집중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가 볼 땐 일반인에 지나지 않을 수준.
그런 상태로.
‘도착했다.’
백마고지를 눈앞에 두었다.
마력을 억제했다는 건 관찰이나 파악에도 제약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말이지.’
하지만 그 또한 평범 혹은 그보다 뛰어난 수준의 마법사에 국한된 소리였다.
아직 온전히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님에도 정우의 마법 능력은 지구의 것을 뛰어넘었다.
즉, 시스템이 정해 놓은 플레이어의 스킬 범주를 넘어섰다는 소리였다.
성장만 하면 주어지는 스킬.
그 스킬을 변형하여 또다시 얻는 스킬.
그런 플레이어 체계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겠지.’
정우는 그 사실을 인지하며 마력을 흘렸다.
등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남들과는 다른 공략을 거치게 된 던전의 이벤트로 여겼던, 아라크네.
놈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재조명되는 순간에도 정우는 놈의 마력의 효율성에 내심 감탄했다.
실처럼 뻗어지는 마력은 따로 집중하지 않으면 감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마치 내시경이라도 된 것처럼 속속들이 실의 주변이 보인다.’
실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육안의 그것과 비교해서 별다른 차이점이 없을 정도였다.
정우가 성장한 만큼 마력의 실의 능력 또한 성장한 셈이었다.
정우의 마력이 흐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지하.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종족인 만큼 이렇게 휑한 지역에서 거주할 만한 장소는 단 한 곳뿐이었다.
그리고 정우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가정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찾았다.’
뱀파이어를 발견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지하에 쳐져 있는 여러 종류의 마법을 발견하고.
토사를 밀어내 유지하는 마력을 발견한 순간, 더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정우는.
억제했던 마력을 한순간에 풀며 말했다.
“리버스 그래비티.”
* * *
“……!”
그것들의 반응은 한순간이었다.
어둠에 몸을 기대어 숙면에 빠졌던 그것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누가 감히 이곳을 공격하는 거지?”
오스카 백작은 천장을 바라보며 으르렁댔다.
“인간!”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옆에 있습니다.”
“여기가 발각된 건가?”
“솔직히 말하면 시기상조였죠.”
“…아직 전부 회복된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아아, 이건 제 예상 밖의 사건입니다.”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스카 백작은 그런 사내를 잠시 노려보았다.
붉은 안광이 자신의 뇌를 노리고 있는데도 사내는 태연하게 싱긋 웃었다.
오스카 백작은 저 웃음이 굉장히 거슬렸다.
“그래서? 우리 일족에 대한 지원자임을 확신했던 넌…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음….”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투로 고개만 갸웃거리더니 오스카 백작을 가리켰다.
“당신들의 피를 좀 줬으면 좋겠네요.”
“…뭐?”
오스카 백작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뱀파이어에게 피는 곧 힘의 원천.
그것을 내놓으란 소리는 힘을 달라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아아.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전투 담당은 아니라서요.”
사내는 예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단 한 방울씩이면 돼요.”
“…씩?”
“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뱀파이어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면 타격은 전무했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앞당겨야죠. 저 침입자는 보통이 아니거든요.”
벌써부터 격변을 이끌어 낸 것부터 해서 제 예상을 모조리 뛰어넘으니까요, 뒷말을 삼킨 사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칠흑 같은 보석이었다.
“정제까지 마친 S급 마정석이랍니다.”
“……!”
오스카 백작의 눈이 마정석으로 향했다.
상당한.
아니, 막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등장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숨겨 놓았던 거지?’
왜 모르고 있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었다.
“이걸 ‘감염’시킬 생각이에요.”
“……호오.”
감염이라는 단어에 오스카 백작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적절한 대처였다.
하지만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즉 활용했었으면….”
“그랬다면 반만 열렸겠죠. 아시잖아요? 백작이 왜 지금껏 줄곧 양을 세면서 꿈나라에만 있는 건지.”
회복.
오스카 백작은 그 단어를 떠올리고는 불만을 지웠다.
하지만 경계심은 더욱 강해졌다.
‘대체 이 인간은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거지?’
정확하게 경계에 서 있었다.
마정석을 감염시킬 수 있을 만한 경계.
회복은 생각보다 빨랐지만, 소망에 비하면 더뎠다.
부족한 마력으로는 마정석을 감염시키더라도 ‘게이트’를 열 수가 없었다.
인간의 말대로 반만 열리면, 안 하느니만 못한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정석을 감염시킬 정도로 충분한 피가 모였고, 감염된 마정석은 자신들의 마력을 대신할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
온전히 저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런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왕’을 불러오는 거였으니까.
“좋아. 그럼 그걸 내놔라.”
“저런. 백작이 이걸 활용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사내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백작은 이걸 완성시키지 못해요.”
“…무슨 소리지?”
“첫째로 전 저 침입자를 상대할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오스카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간의 수준은 상당했다.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빌어먹게도.
하지만 스스로를 전투 담당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스스로의 안위 때문일까.
심상치 않은 예외 상황에 몸을 사리는 건 아닐까, 눈을 흘기던 오스카 백작은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흠칫했다.
“그리고… 둘째로.”
사내의 손가락이 오스카 백작으로 향했다.
“백작은 이걸 완성시킬 때까지 견딜 수가 없어요.”
“…견뎌? 그게 무슨 말이지?”
“슬슬 느껴지실 텐데요? 존재감이 바뀌어서 파악이 늦어진 걸까요?”
“무슨 헛소리를…….”
사내에게 소리를 높이던 오스카 백작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가 꺾인다.
천장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백작의 눈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아…….”
오스카 백작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인간이 자신보다 더 멀리 보고 있음을.
쿵, 쿵!
심장의 고동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아니, 강렬하게 강타하는 존재감이 있었다.
전신의 피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피의 감각에 오스카 백작은 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이크!”
사내는 다급히 떨어지는 피에 마정석을 가져다 대었다.
“모두 마정석에 피 한 방울씩을 묻혀라.”
쿵.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오스카 백작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렸다.
단 한 방울.
그렇게 사내가 피를 수거하고 있을 때.
오스카 백작은 심장 박동과 마찬가지로 들려오는 명령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죽여라.
“그래. 왕의 강림에 제물로 써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