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변화 (1)
세 명의 플레이어들은 정우와 보스의 대결을 구경할 정신 따위는 없었다.
몰려드는 놈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의 수는 많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듯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이따금씩 중첩되는 저주에 무거워지는 육체를 회복시키는 건 오로지 유서린의 몫이었다.
전투와 치유, 저주 해제까지.
셋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전투를 벌였다.
머맨과 세이렌의 수준은 의외로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나 유서린과 김하란은 자신들이 무너졌던 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자신들의 임무는 간단했다.
정우가 싸우는 동안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
고작해야 그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적의 수는 많았고 자신들의 상태는 점점 더 나약해져만 갔다.
저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
여러 던전 브레이크를 공략해 보았지만 셋은 이 미해결 지역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마력의 회복이 극심할 정도로 더뎠고, 소모량은 급증했으니까.
한 시간은 지속해야 소모될 마력이 20분 만에 소모되고, 하루는 끄떡없을 마력이 고작해야 1시간 만에 반절 이상 없어지는 상황은.
“……허허.”
모두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세이렌 여왕과 정우의 전투를 볼 여력은 없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정우의 마법으로 전투를 파악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
특이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서린과 김하란은 이미 겪은 내용이었지만 몬스터들의 전투는 얼핏 전쟁을 닮아 있었다.
직군은 부족했지만 나름대로 진형을 갖추고 차륜전을 펼치며 체력과 마력을 소모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도 그랬고.
유서린을 제외한 둘에게 저주를 쏟아부어 유서린의 전투에 제약을 주었던 것도 그랬다.
이따금씩 은신한 머맨이 기습을 날리는 것도 모두 전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뚝!
그러나 갑자기.
체계적으로 움직이던 머맨 하나가 상체를 멈추고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머맨 하나의 눈동자에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포효하고, 발광하듯 손을 휘젓는 행동이 생겨났다.
자신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표현하는 건.
“…이것들. 왜 갑자기 일반적인 몬스터처럼 굴지?”
여태껏 흔히 겪어 본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잡았다.”
“…잡았구나!”
“한정우 플레이어!”
더 이상 마력의 소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빠르게 줄어드는 마력과 소모되는 체력을 염두에 둔 건, 이 전투가 장기전으로 흘러갈 때를 대비해서였다.
과연 장기전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만약의 후퇴를 위해서라도 모두는 힘을 비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그냥 섬멸만 하면 되겠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히죽 웃은 김하란의 전신에서 폭력이 넘실거렸다.
한국의 용병으로 불리며 여러 더러운 일까지도 도맡았던 그였다.
죽을 고비도 셀 수 없이 넘겼고, S급이 되기 위해 발악을 하기도 했었다.
재능이야 넘쳤지만, 첫 단추가 굉장히 잘못 끼워진 상황이었기에.
때때로 권력자들의 개처럼 굴기도 했고, 길드의 하수인처럼 굴기도 했다.
모두가 다 죽어 버린 던전에서 도망 다니고 기회를 노리며 악착같이 버틸 때도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
‘고쳐 주겠다는 약속, 지키기만 한다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수많은 전투를 다시금 답습해도 상관이 없었다.
돈으로 부림을 받는 관계.
그 막대한 돈이 치료비로 빠져나가지만 않는다면, 용병의 생활에 더 이상 매진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일본의 미해결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도 꽤나 유명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일본의 고위급 플레이어들을 상당수 잡아먹은 지역이기도 했으니까.
그것의 공략에 성공한다면, 이전보다 더 공고한 명예가 뒤따를 것이었다.
몸값은 더 상승할 테고.
막대한 돈을 벌어들임에도 감당이 되지 않아 차마 실행해 보지 못했던 치료법을 진행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머맨의 목을 부러트리고 심장을 뜯어 내며, 자르고 가르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히죽 웃었다.
돈의 노예.
그것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돈을 벌기 위해 뛰었던 전투만큼.
돈을 위해 굽혔던 고개만큼.
‘당신을 위해 써 주지.’
치료될 가망이 보이지 않던 병을 해결해 주겠노라 단언한 한정우를 떠올리는 김하란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삐가 풀린 S급들은 가히 양 떼들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였다.
겁을 먹어 버린 세이렌들은 바다를 돌아보았고.
꼬리를 휘저으며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놈들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였다.
저주 해제에 매진하고 있던 유서린의 제약이 풀려 버린 것.
성기사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광전사로서의 자신을 각인한 그녀의 전투는 다른 둘로서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정우는.
그런 셋의 기척을 느끼며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메아리.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저… 좀 쉴래요.
‘이탈해.’
정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유서린이 아무리 성기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주 해제만으로 전투가 어렵다는 건 이미 경험까지 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셋은 정우가 세이렌 여왕을 상대하는 시간 동안 어렵지 않게 버텼다.
모두 메아리 덕분이었다.
세이렌 여왕의 영역에서 저주를 약화시키고, 오히려 세이렌들에게 약간의 저주를 거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제 몫을 다했다.
일행의 회복에 걸렸던 하루.
그건 메아리를 다시 불러내기 위해 필요한 하루이기도 했다.
하데스와의 전투에서 성장한 그녀는 꽤나 지친 상태였다.
회랑이라면 시간의 흐름이 매우 달라서 충분히 회복했겠지만, 마녀의 마을은 시간의 흐름이 비슷했다.
때문에 급성장의 여파를 씻지 못한 그녀는 고작해야 이 정도만으로도 상당히 지쳐 버렸다.
본인 스스로를 감추는 것까지 하여 체력 소모도 상당했고.
하지만 이 덕분에 그녀도 얻은 게 생겼다.
벽에 생겨난 금이 더욱 깊어졌다.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의 저주를 강화시키고 활용한 경험은 그녀의 수준을 향상시켰다.
정우는 메아리의 감정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의 퇴장을 반길 수가 있었다.
달그락.
세 명의 플레이어들이 날뛰는 것을 느끼며, 정우는 떨어진 팔찌를 주워 들었다.
그것의 마력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기억과는 말이다.
하지만 어둠이라는 특이성을 적용한다면, 그것의 변화는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기억보다 더 위력이 약해졌으니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깃들어 있어.’
누군가가 이 아티팩트를 만진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친우의 물건.
그것을 손에 쥐자 여태껏 품었던 여러 가정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밀려들었다.
이계에 비하면 지구는 매우 특이했다.
무언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보편적이지 않았지만, 그에 따른 기본지식과 여러 과학적인 지식은 세상에 오픈되어 있었다.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란 소리였다.
큰 골자, 테두리.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 이유와 과정 따위는 일반인도 다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세부적인 용어나 작동 방법과 설정법 등은 모르지만,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구는 특이했다.
미사일을 만들지는 못해도 미사일에 대한 개념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게 지구였다.
이계에서 지식은 가진 자만의 전유물이었다.
마법은 마법사만이.
연금은 연금술사만이.
하물며 제련조차 대장장이만의 전유물이었다.
모든 건 도제(徒弟) 교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그렇기에 정우도 지구의 과학을 세부적이고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과학을 조건으로 여러 영화 등이 존재했고, 격변이 시작된 이후 과학은 이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무수한 가정과 실험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에게까지 퍼지는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규정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정보가 풀려났다.
지구의 정보와 이계의 정보는 서로 다르다.
마법사는 마법 외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정도로 깊이가 남달랐다.
정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구에서 생활하면서 그 편중된 지식의 흐름이 변화했다.
폭넓고 다양하게.
깊지는 않아도 방대하게.
그렇기에 얻어지는 사고는.
단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낸다.
어쩌면.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을지도 모를… 결론을.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저걸 막지 못한다면….”
“그럼 멸망이지.”
“기록을 남겨 놨어.”
“기록? 무슨 기록? 이상한 소리나 하지 말고 승리나 해.”
“듣기나 해. 아무튼 그 기록을 열람하면….”
“…….”
“도주할 방법이 생길 거다. ‘마녀’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의 방법을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게 가능해졌거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걸 이용해.”
“다니엘!”
“근데… 문제가 있어.”
“문제?”
“어디로 연결된 건지 모르겠어.”
“……뭐?”
“통로를 만드는 건 성공했어. 하지만 그 통로의 출구가… 보이지 않아. 이 세계 그 어디에도.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빌어먹을!’
떠오르는 기억에 정우는 욕설을 내뱉었다.
통로를 점검하며 행한 실험이 떠올랐다.
마킹을 한 물건을 통로로 넣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추후 전 지역의 공략에 성공한 어둠의 영역에서조차.
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녀의 통로를 연구하여 독자적으로 만든 새로운 통로.
이제야 기억이 떠오른 그것이.
‘이쪽으로… 연결이 되었던 거라면?’
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지 않던 친우들을 떠올린다면, 도주한 게 아닐까 하는 가정이 세워졌다.
최악에 가까운 자신의 결말.
그 이전에 통로를 통해 친우들이 넘어갔다면?
그렇다면 이 팔찌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날뛰는 물의 정령을 힐끗 본 정우가 자신을 향해 두려운 눈빛을 보내는 세이렌 하나를 날려 버리며.
학살의 시간이 도래한 이곳과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의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사람이 사는 도시였다.
몬스터라는 존재 따위는 환상으로 치부되어, 각종 영상이나 소설 등에나 등장하는 허구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가 되고.
실체가 되어 터전과 생명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정적인 가정이나,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을 앞둔 사람처럼.
그리고 그건 변론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나 때문인가…….’
지구와 이계는 접점이 없었다.
여러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자신이었다.
어둠이라는 것 때문에.
그곳에서 등장한 악마 때문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자신이었다.
그에 반해 지구엔 차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기본 가설 정도는 지나가는 일반인조차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만연한 정보이기도 했다.
지구의 체계와 이계의 체계가 어느 시점에서 맞물렸다면.
교차하였다면.
그리고 자신이 만든 통로가 하필이면 그 지점을 관통했다면.
자신이 보낸 물건으로 만들어진 통로가 벌어지고 벌어져서 몬스터를 받아들일 정도로 커졌다면.
그로 인해 마력이 흘러들어와 이곳의 인간들을 변화시켰다면?
‘G급 던전은? 그건 뭐지?’
끝도 없이 흐르는 부정적인 가정 사이로 유일한 의문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친우들이 통로를 넘어왔다면.
친우들 성격상 이곳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을 터였다.
신이라 불리는 초월자들 역시 그곳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을 테니, 친우들의 이동에 편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의 힘이라면.
불가능하지 않았다.
G급 던전이라는.
‘최후의 보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