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세이렌 여왕 (1)
검은 세상에 조금씩 소음이란 것이 들려왔다.
저 멀리서부터 들리는 것 같은 먹먹한 소리였다.
익숙하면서도 꺼려지고, 불쾌하면서도 당연한.
빌어먹을 소음이었다.
‘어머니.’
후회는 없다.
시간을 되돌려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 터였고, 어머니의 목을 붙잡은 놈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릴 터였다.
하지만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너한테는 이야기했을 텐데…….’
미련이 남았다.
그와 함께였다면 어쩌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현명했고, 강했으니까.
평소에는 미풍과도 같았지만 적을 상대할 때는 거센 태풍이 되는 사내였다.
냉정하기가 삭풍 같았지만, 평소엔 봄바람마냥 부드럽기만 했다.
그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던 것이 유일한 후회였다.
그라면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고, 어머니의 구출에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넌 너무 과신하는 버릇이 있어. 냉인(冷人)아.”
‘오랜만이군.’
친구의 음성이 떠오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멍한 소음만큼이나 머리는 항상 멍했고, 생각은 느렸으니까.
‘그러고 보면 오늘은 머리가 꽤 맑군.’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몇 번 정신을 차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법을 모색해서 끝내 온전한 대화를 나눌 수준을 만들었다.
‘그걸… 그 애송이에게 사용했는데…… 전해졌으려나?’
그 뒤로는 기억이 끊겼다.
경지에 오른 이후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이 끊긴 건 처음이었다.
사고라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멍한 머릿속은 그저 한 가지 사실만 되뇌고 있을 뿐이었다.
‘총리…….’
눈앞에 있다면 사지를 갈가리 찢어 제 입에 처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상대.
그에 대한 복수.
그것이 그나마 정신이 들었을 때에도 죽지 못했던 원인이었다.
군인으로 살아서 애국을 목표로 했고, 조국의 행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혹사를 견뎌 냈다.
그랬던 자신이.
‘일본이라니…….’
억울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분쟁 중인 독도와.
끝도 없이 행해지는 분쟁과 날조.
도발과 무시.
전범 국가인 일본은 아직도 당시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새 시대의 주역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으니까.
실제로 세뇌된 이후부터 정신을 차리기까지 자신의 행적은 철저히 일본의 회복에 치우쳐졌고, 한국과의 분쟁에 소모되었다.
얼마나 무능하면 귀화까지 선택했겠나! 이 재능 넘치는 천재가!
일본의 도발에 자신이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고 증오스러웠다.
‘…죽일 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과신을 했고 상대를 얕보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뇌.
‘오늘은… 이상하군.’
소음이 조금 더 강해졌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
“……곧.”
‘한국어?’
자동적으로 해석되는 언어였지만 이해의 영역이지 소리의 영역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들리는 건 분명히 한국어.
끊기고 먹먹하지만 모국어조차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어둠을 밀어낸다.
눈동자를 뒤덮고 있는 눈꺼풀을 밀어내는 만큼, 소음의 크기는 커졌고.
정신을 집중하는 만큼, 어둠은 흐릿해지더니 이내 밝은 빛을 만들어 낸다.
끔뻑.
뿌연 시야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하늘.
“……하늘?”
화들짝 놀라 일어나 마력을 일으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늘이 보이는 상태라면 쓰러진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무너진 건물들.
전투가 벌어진 모양인지 뒤집혀서 부서져 버린 도로엔 크레이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리는 음성.
“…정신을 차린 건가요?”
“……!”
한국어가 맞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음성이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천천히 음성을 좇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여성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유서린.
친구…였던 이의 딸.
“…서, 린?”
“그 표정을 보니 확실히 해제가 된 모양이네요.”
한숨을 내쉬며 건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제?
“세뇌는 해제했습니다. 강세기 플레이어.”
하지만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멍하던 평소와는 달랐다.
뿌옇던 평소와는 달랐다.
선명했고, 또렷했다.
“…세뇌가…….”
“해제했어요. 부탁대로.”
그제야 보이는 얼굴은….
“애송이…….”
“…네?”
자신의 지푸라기였다.
* * *
“애송이긴 했죠.”
정우는 유서린의 농담 섞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법이 풀릴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거리를 더 벌렸잖아요. 얼굴, 밝히기 싫은 거니까.”
쪽지를 받을 때의 자신은 분명히 애송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많은 게 달라졌네.’
이제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빠르고.
빠르게.
“음. 여긴…?”
“기억이 아예 없는 건가요?”
“흐릿해. 모호하고.”
유서린은 강세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과거를 되짚는 내용들이었다.
정우는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모호한 상태였다?’
그건 다른 문제였다.
세뇌라는 것은 결국 ‘대전제’를 심어 주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대전제를 생각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세뇌의 골자였다.
마치 온도가 올라가는 물에 앉아 있는 개구리처럼.
때문에 막상 세뇌가 풀리더라도, 이미 상승한 온도가 낮아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억을 하는 것은 물론, 모든 걸 자신의 의지대로 행했다고 봐야 옳았다.
세뇌가 약해지는 시기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세뇌에 걸린 대상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기에.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또 다르군.’
온전하지 않은 기억에 정우는 나름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건 세뇌와는 또 다른.
‘그래. 차라리 하나의 인격체를 덧씌우는 느낌이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덧씌운다.
이상하리만큼 그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좋군.”
크게 호흡한 강세기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생각대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 건가?”
“음….”
강세기는 유서린에게 전반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한국으로 귀국한 뒤, 제대로 된 검사를 받고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를 요청했다.
‘남다르군.’
정우는 유서린의 태도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속사정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친의 죽음에 강세기가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가 갑작스럽게 귀화하지만 않았다면.
이미 계획된 공략에 참여만 했었다면.
그랬다면…….
그런 수많은 가정이 그녀를 잠식하며 강세기에 대한 원망을 키웠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강세기가 피해자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때문에 유서린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우는 그 사실에 자꾸만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대화를 나누죠.”
유서린은 김하란과 강세기. 그리고 정우까지 불러 자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묻고 싶어서요.”
“퇴각에 대해서요?”
“맞아요. 퇴각할지….”
“공략할지?”
강세기의 물음에 유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이곳의 변화는 수상하군.”
“수상한 건 하나 더 있어요.”
정우가 말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정우에게 향했다.
“수상한 것?”
“그게 무엇이오?”
정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형이요.”
“지형?”
“같이 본 자료에는 던전의 발생지로 향할수록 ‘환경’이 변화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실제로 미해결 지역은 지구보다는 던전의 생태계에 가깝죠.”
“…음. 확실히……. 이 정도까지 진행했는데도 빌딩이 그대로 있군. 물론 무너진 잔해지만.”
“던전 브레이크는 해당 던전의 마력이 지구로 흘러들어오는 걸 말해요. 더불어 몬스터도 넘어오는 거죠.”
“그래서요?”
“몬스터의 수준은 던전의 수준과 동일하죠. 보스도 아닌 놈이 보스와 같은 능력을 지녔고, 심지어 그것이 S급에 다다를 정도라면….”
“……이곳은 이미 변했어야 했다? 던전처럼?”
유서린의 중얼거림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던전 브레이크는 던전을 지구에 덧씌우는 작업이다.
단번에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동화되어 가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던전을 재현해 낸다.
지구의 땅 위에.
실제로 다른 미해결 지역은 던전의 지형과 환경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유독 이곳만이 변화가 더뎠다.
“왜 그런 것 같나요?”
“답은 간단해요.”
정우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치된 도시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환경은 사람의 인식을 속이는 장치에 불과했다.
‘머리를 잘 썼어.’
세이렌의 영역이 바다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주효했다.
나름의 편견이 사고를 굳게 만들었다.
주로 공략에 참여한 이들이 일본인이라는 것도 사고의 폭을 좁게 만든 셈이었다.
던전의 마력은 지구를 던전처럼 바꾼다.
이곳의 마력은 보스가 아닌 몬스터조차 S급으로 만들 정도로 풍부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형의 변화는 적었다.
“그 말은…….”
“네.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지 모르지만, 놈들은 이곳의 마력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건 우리의….”
더듬거리는 김하란을 향해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몬스터가 성장이라니.
그것도 던전의 마력을 통해서.
“플레이어와 같은 방법이죠. 시간을 주면 위험해요. 하나라도 제거했을 때, 밀어붙여야 해요.”
“그거… 확실한 건가요?”
“가능성이 가장 높죠.”
정우의 대답에 모두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이는, 강세기였다.
“그래 봤자 일본의 일이야. 우리가 여기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으음…….”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기억해 보세요.”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정우의 어조가 단단해졌다.
“일본에선 몇 번이나 이곳의 공략을 진행했어요.”
“그랬지.”
“그리고 몇 번이나 실패를 겪었죠. 그럼에도 일본은 자체적인 공략에 열중했어요.”
“하긴. 사실 지원을 받았으면 미리 공략했을 거예요. 뒤늦게 지원 요청을 했지만, 조건이 이상하긴 했었어요.”
“그랬지. 소탕 작전인데 지원 병력을 우선적으로 뽑았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꼭 차지해야만 하는 게 있다는 소리죠.”
“이곳에?”
“이곳에.”
“…아티팩트?”
“음.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때 발견했다면, 가능성도 있소.”
“하지만 무슨 아티팩트인지도 모르는데?”
“알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알 수 있다라….”
“그래서 한정우 씨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공략해서?”
“가져와야죠.”
“엿 먹인다?”
강세기가 박수를 쳤다.
생각만 해도 통쾌한 모양이었다.
“이곳의 마력은 몬스터에게 집중되고 있어요. 그에 따른 보상도 아마 놈에게 집중되어 있겠죠.”
“보스.”
“총리가 노리는 물건을 강탈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가장 중요한 건, 이 현상이 과연 일본에서 끝나느냐 하는 것이죠.”
정우는 유서린을 가만히 주시했다.
“얼마 전에 벌어진 던전 브레이크를 떠올려 봐요. 마력의 폭증, 갑작스러운 등급의 상승. 하지만 주변은….”
“……변한 게 없었죠!”
눈을 치켜뜨던 유서린이 반문했다.
“하지만 게이트는 사라졌는데요?”
“듀라한을 잡아서요?”
“네.”
“그게 아니라면요?”
“네?”
“애당초 게이트가 존재했던 던전이었고, 보스가 아닌 핵이 존재하는 던전이었다면? 그리고 그 장소가 지상이 아니라 지하였다면?”
“……그 뱀파이어를 말하는 건가요?”
“뱀파이어?”
유서린의 질문에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뱀파이어. 인식 방해까지 걸어 놓으면서 누군가가 놈들을 돕고 있어요.”
그 말에 모두는 하데스를 돌아보았다.
모든 힘을 잃고 넋을 잃은 채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그를.
“어쩌면… 또 다른 격변의 시대가 오는 걸지도 몰라요. 대비하려면 알아야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