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하데스 (5)
팟!
허공에 수를 놓듯, 핏방울이 천천히 허공으로 튀었다.
팔이 베인 로건의 당혹함을 무시한 채.
자세를 한껏 낮춘 메아리의 왼손의 검이 기묘한 각도로 위로 솟구쳤다.
다급히 고개를 꺾은 로건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 검을 뒤따라, 오른손의 검이 로건의 복부를 그어 갔다.
로건의 지팡이가 복부를 막았지만.
“……!”
스릉.
살짝 꺾인 경로가 기어이 복부의 뼈 갑옷을 잘라 냈다.
울컥.
치미는 통증에 로건이 마력을 뿜어 메아리를 밀어냈다.
주륵.
고랑을 만들어 내며 밀려난 메아리가 검을 빙글 회전시키며 바닥을 갈랐다.
파스스!
덜컥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려던 뼈들이 무로 돌아갔다.
로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상대가 이 전투 중에 성장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성장이 자신의 목덜미를 낚아챌 정도라는 것을.
오버레이는 분명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착용자의 모습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력의 질과 스킬까지 고스란히 오버레이에 각인된 인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지금처럼 낭패인 상황에선 치명적이었다.
‘오버레이를…….’
벗어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아는 건지 틈을 주지 않는다.’
오버레이를 벗을 틈이 생기지 않았다.
빠르고, 치명적인 일격이 이어진다.
저주는 상쇄되고.
뼈는 부서진다.
유효타를 가했던 폭발조차 검격이 만들어 내는 바람에 밀려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지팡이의 힘을 빌려도.
한 마리의 유연한 고양이처럼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메아리에겐 닿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저주 외엔 별다른 힘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밀리는 건 자신이었고, 승기를 잡아가는 건 상대였다.
이미 불러낸 해골들은 전투의 여파에 땅으로 사라진 지 오래.
결정해야만 했다.
이대로 결착을 내느냐.
‘어렵군… 어려워.’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짧았다.
이로써 몇 달을 요양을 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치욕이로구나.”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이를 간 로건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더불어 치미는 막대한 마력에 메아리도 주춤거렸다.
메아리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린 시동어에, 지면이 들썩거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파괴된 지면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출렁거렸고.
상황을 눈치챈 메아리가 달려들기 위해 허벅지의 근육을 한껏 수축했을 무렵엔.
콰득, 콰드드득!
이미 수십. 아니, 수백 구의 시체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칫.”
메아리는 혀를 차며 자신의 발치에서 상체만 내민 채 허우적대는 해골 몇 마리를 갈랐다.
그사이.
우득!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준 로건이 자신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부악!
뜯어낸다.
찢긴 의복 사이로 움푹 파인 살점이 드러났다.
울컥 솟구치는 피는 이 상처가 그리 가볍지 않음을 알려 주는 징표와 같았다.
하지만 메아리는.
해골을 베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런.’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상황을 마주했음에 허탈함과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방법은.
파앗!
“……어딜 도망치느냐!”
도주였다.
솟구치는 마력.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하면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마치 악마와도 같은 형상으로 메아리의 등 뒤에서 포효했다.
* * *
정우의 이해도는 평범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났다.
이미 파악이 끝나다 못해 적응까지 된 아라크네의 마력은, 터무니없이 손쉽게 정우의 손에서 해석되었다.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반지의 마력 분포를 확인한 정우의 눈가에 수심이 생겼다.
‘한 마리가 전부인지도 모르겠군.’
다리를 가공하여 만든 반지의 수를 여덟 개로 예상하는 건 굉장히 낙관적이기만 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빌런이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뱀파이어는 빙산의 일각이야. 더 심각하고… 위험한 계획이 있다.’
정우는 처음으로 마왕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무슨 생각인 걸까?’
기억 속의 뱀파이어는 인간과 공존하기 어려운 포식자였다.
뱀파이어가 만든 농장은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추악한 현실이었다.
지구라고 다를 바가 아니다.
놈들은 피를 통해서 마력을 공급받고, 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마력의 손실을 겪는다.
즉, 약해진다는 소리였다.
‘그 자존심 높은 놈들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지구는 일반인과 플레이어라는 엄격한 구분이 존재했다.
일반인에겐 마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노릴 건 플레이어뿐이야.’
플레이어만이 그들의 마력 공급원이었다.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건 자명한 일.
과연 놈들이 접근한 곳이 강원도 철원 한 군데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정우는 다시 한번 반지를 보았다.
어지간한.
아니, 지구의 플레이어 중 과연 이것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려스러울 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반지는.
대륙에서조차 강자로 분류되며 기피 대상이 되었던 마녀 일족조차 무너트린 놈의 파편이었다.
물론, 이미 삼켜진 아이들을 무시한 채로 공격을 퍼부었다면 승리했겠지만.
결과론일 뿐이다.
환상으로 보았던 아라크네는 그런 마녀 일족의 성향을 이용할 정도로 지능이 높았으며 영악했다.
심지어 실을 통해 상대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도 지녔다.
더미를 만드는 것 외에도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놈이.
또다시 등장했다.
그것도 일본 총리를 통해서.
‘총리가 배후일 리가 없지. 빌런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해.’
정우는 시선을 옮겼다.
머리를 짚은 채로 휘청거리는 강세기의 주변으로는 더 이상 낮은 온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마력이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
유서린와 김하란이 강세기 주변을 맴돌며 상황 파악에 나선 것을 확인한 정우는 일본 플레이어들을 노려보았다.
“책임자 나와.”
“…….”
일본 플레이어들은 아군의 살해에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저 손아귀가 자신의 목을 붙잡지는 않을까, 염려할 뿐이었다.
“이쪽부터 도와주시겠어요?”
정우는 일본 플레이어를 보며 손을 들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이진수였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이동하는 이진수의 곁으로 이사를 비롯한 나이트 길드원들이 붙었다.
‘확실히 인정받았던 모양이네.’
“……뭘 도와드릴까요?”
이진수의 존대에 정우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
“이들을 제압해 드릴 테니까 관리해 주세요.”
일본 플레이어들은 정우의 말에 움찔했지만, 저항의 결말을 떠올려 본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상황은 정리되었다.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단 한 명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것과 동일한 상황.
대상만 바뀌었다.
배신감과 더불어 가라앉지 않은 화 때문에 한국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이었다.
더불어 거칠었다.
이따금씩 일본 플레이어들의 불만과 신음이 터졌지만, 정우의 눈초리 한 방에 잠잠해졌다.
정우는 일본 플레이어들을 살펴본 뒤 방향을 돌렸다.
“…쓰러졌어요.”
“우린 아무것도 안 했네. 그저 혼자서 휘청거리다가 쓰러졌어.”
김하란이 어깨를 들며 말했다.
정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강세기에게로 다가갔다.
‘정신을 잃었다.’
정우는 강세기의 주변으로 천천히 마력을 뿌렸다.
여전히 고리가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덜컥거리던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상황이라.
‘흐름은 나쁘지 않아.’
강세기의 마력 흐름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경계해 주시겠어요?”
정우의 물음에 유서린이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뭘 하려고요?”
“원래 계획이요.”
“…여기서요?”
“네. 두 분이 잘 지켜 줄 거라 믿습니다.”
김하란이 어깨를 풀며 무기를 들었다.
“몬스터들이 몰려와도 일이 끝날 때까진 지켜주겠소.”
“금방 끝날 거예요. 그리고 몬스터는 몰려오지 않을 거고요.”
“그게 무슨 말이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우는 던전에 입장만 하면 모든 몬스터들의 적의를 한 몸에 받는 상황이었다.
기존의 법칙을 무너트리며 달려드는 몬스터에 골치가 아프기도 했지만.
하지만 적어도 지금에 이르러선 별다른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던전에 입장해도, 미해결 지역에 입장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느껴진다. 소란스러운 놈들의 움직임이….’
이곳의 마력으로 고리를 형성한 여파인지, 정우의 감지 능력이 상승했다.
졸지에 왕을 하나 잃은 놈들은 후퇴를 했고.
그게 바로 내란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도 몬스터의 기습을 받지 않은 이유였다.
몬스터들에 대해서 정리하며 강세기의 세뇌를 풀 계획을 세우던 정우의 고개가 돌연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덜컥거린 어깨가 그의 다급함을 알려 주는 듯했다.
몬스터의 움직임까지 느낄 정도로 감지 능력이 상승한 정우였다.
그렇기에.
돌연 덩치를 키워 나가는 또 다른 익숙한 형태의 마력을 감지하는 건, 필연에 가까웠다.
더불어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까지.
‘메아리!’
메아리가 쫓기고 있었다.
상당한 마력의, 언데드 혹은 네크로맨서에게.
정우는 후자에 힘을 실었다.
“네크로맨서….”
정우의 중얼거림에 유서린이 물었다.
“네크로맨서요?”
“…네. 네크로맨서의 기운이 느껴져서요.”
“아, 영국의 로건이 합류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를 잊고 있었네요.”
“로건?”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기운은 절대로 A급의 네크로맨서가 품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S급인데….’
S급의 네크로맨서라고 하면 단 한 명만이 생각날 따름이었다.
왕이라 불리는 한 빌런.
“……하데스!”
“하데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우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하데스가 이곳에 온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자세한 상황 설명은 나중에. 혹시 이쪽으로 일본인 여성 한 명이 오거든 보호해 주세요.”
“으음?”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은데….’
메아리가 입은 육체, 사다코는 매우 중요했다.
사다코의 개조를 억제하고, 사역의 실패에 대한 알람을 방해하는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강세기가 정신을 잃은 건 천운이었다.
애당초 이 계획이, 강세기 때문에 진행된 건이었으니까.
세뇌 때문에 저주 해제 자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길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을 놓칠 수 없었다.
때문에 정우는 강세기의 곁에 주저앉았다.
“저주 해제를 할 거예요.”
“어…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정우의 눈빛을 본 유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눌 대화가 많으니, 이거까지 같이 합쳐서 대화하죠.”
그러며 검을 든 채로, 정우가 돌아보았던 방향을 주시했다.
김하란도 머리를 긁적인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사방을 경계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정우는 둘의 행동과 이진수를 비롯한 한국 플레이어들을 살펴본 후.
정신을 집중했다.
세뇌란 건 간단히 저주 해제로 풀릴 게 아니었다.
스킬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주 해제가 가장 적합한 능력이긴 했지만,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타인의 행동을 강요하는 것.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여 적셔지듯, 세뇌는 시간이 필요하며 ‘물’이라는 흡수시킬 근원이 존재한다.
정우가 해야 하는 작업은 저주 해제가 아니었다.
물로 따지면… 제습이었으니까.
근원.
세뇌의 매개체가 되며, 강세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된 근원의….
‘명령. 그걸 지워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