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하데스 (2)
정우를 중심으로 퍼진 지면의 진동은 그 위를 뒤덮었던 냉기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쩌적, 와장창!
유리 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진 프로즌 필드의 중심에서, 강세기는 오묘한 눈빛으로 정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혈관이 도드라진 붉은 눈동자는 일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기에 정우는.
‘명령인가?’
강세기의 상태를 미뤄 짐작했다.
솔직히 정우는 강세기를 의심하고 있었다.
일본을 찾은 플레이어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협회 소속인 직원이 전무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은 인접 국가인 만큼 좋든 싫든 여러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날 찾아왔지.’
강세기는 자신을 찾았고, 자신에게 알려져선 안 될 진실을 전달했다.
쪽지라는, 누구나 읽을 수 있고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유실의 위험도 흔해 빠진 방법으로.
처음에는 별달리 의심하지 않았다.
후에 듣기로는 유지석 협회장 역시 나름대로 검증을 거쳤고, 강세기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결정된 토벌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한국에서 넘어온 빌런들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손에 죽은 빌런의 기억에서 강세기를 보았다.
아무리 세뇌가 되었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깊게 관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의심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의심을 유지해야 하는 건지, 정우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딱 봐도 이지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버서커가 딱 저러했다.
이지를 상실한 채로 자신 외의 모든 것에 적의를 품고, 스스로의 안위를 등한시한 채로 상대의 목숨을 노렸다.
물론, 버서커가 아닌, 세뇌의 영향이었겠지만 현재 이지를 상실한 것 같은 형태는 비슷했다.
“한번…….”
말끝을 흐리던 정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확인해 보죠.”
그리고 들린 음성은, 정우가 서 있던 자리와는 정반대에서 맺어졌다.
정우의 움직임에 반응한 건, 세 명의 S급뿐이었다.
블링크로 공간을 넘자마자 넘실거리는 전격이 두 손에 맺혔다.
“쇼크 웨이브(Shock wave).”
전격이 맺힌 양손이 교차한다.
박수를 치는 듯, 서로 교차한 전격이 물결처럼 퍼졌다.
강세기의 프로즌 필드를 완전히 밀어내며, 강세기의 전신을 경직시켰다.
하지만 강세기 역시 정우의 공격에 자극을 받은 듯, 가볍게 경직을 떨쳐 내고는 양손을 휘젓는다.
‘얼음꽃.’
한 줄기의 얼음이 지면을 따라 빠르게 흐르다가, 정우의 코앞에서 상승하여 꽃이 피듯 얼음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쩌저적.
엄청난 한기가 찰나의 순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정우를 삼킨 얼음의 꽃이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났다.
“정……!”
이진수가 경악하며 외치다가 멈칫했다.
얼음 속에서 붉은 점 하나가 일렁거렸기 때문이다.
작게 생겨났던 점은 이윽고 덩치를 불려 나가며.
파아아앙!
얼음을 녹이고 부수며 뜨겁게 불타올랐다.
“으윽!”
낮은 등급의 플레이어들이 얼굴을 가리며 다급히 물러났다.
“…이, 이건…… 수르트의?”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아스팔트를 녹이는 불덩이는, 불의 왕이라 불리는 수르트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성인 열 명은 고스란히 삼켜 버릴 정도의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화염구가 급속도로 작아지더니.
쿠우우-!
강세기를 향해 쏘아졌다.
가히 총알 같은 속도.
하지만 강세기는 허공에 생긴 얼음을 밟아 뛰어오르는 것으로 가볍게 화염구를 피했다.
“……!”
강세기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거의 직각으로 꺾인 화염구가 강세기를 따라 상승했다.
쩌적, 팟, 쩌저적, 파앗!
강세기는 얼음 발판을 만들어 내고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지만.
히죽.
정우의 여유로운 미소만큼이나 빠르고 가볍게, 화염구는 강세기의 뒤를 쫓았다.
칫.
혀를 찬 강세기의 양발이 허공을 걷어찼다.
화염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쩍!
돌연 생긴 균열이, 허공을 찢어 버리듯 커졌다.
얼음벽.
강세기가 만든 얼음에 화염구가 부딪쳤으나.
치이이이이이익!
의외로 폭음은 일지 않았다.
“……녹으면서, 줄어들고 있어.”
얼음벽은 녹았고, 화염구의 덩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백중세.
폭음조차 일지 않을 정도로 둘의 힘은 비슷했다.
“…에, 에스….”
“S급이다!”
또 다른 S급의 등장.
심지어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S급의 등장에 한국 플레이어들은 경악과 감탄을 내뱉었다.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소란이 생겨난 일본 측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존재감과 몇 번의 공세에서 그 위력을 짐작했지만, 막상 파급력은 서로의 공격이 동시에 소멸된 것에서 발생했다.
솔직히….
모두는 얼이 살짝 나가 있었다.
얼음벽이 다 녹아 구멍이 뚫렸을 땐, 화염구도 자취를 감추었다.
강세기는 손을 털었다.
쩡!
스르르.
생겨나는 수십 개의 얼음 화살.
그것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우를 향해 짓쳐 들었다.
정우 역시 손을 털었다.
“매직 미사일.”
이윽고 생겨나는 수십 발의 반투명한 미사일 형태의 화살이, 각자의 궤도로 움직여 얼음 화살을 일일이 요격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주변을 울렸다.
하지만 부서지는 얼음이.
다시금 형체를 갖춰 간다.
“……으음.”
급속도로 가라앉은 냉기가 얼음 조각들을 붙이고 결합시켜서 만들어 낸 것은.
“…얼음 골렘?”
4미터가량의 골렘.
순식간에 완성된 골렘은 언뜻 고릴라의 그것을 닮은 거대한 팔을 휘저었다.
마치 얼음으로 이뤄진 보스 같은 위용으로, 정우를 압사할 것처럼 움직였지만.
오히려 정우의 눈초리는 짜게 식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작금의 전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일본 측에서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멍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공방은 빨랐다.
하지만.
‘강세기의 실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딘지 모르게 수준이 떨어졌다.
정우는 플레이어의 등급 체계에 대한 정확한 실력을 알지 못했다.
S급을 겪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 가늠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은 정우는, 이전과는 달리 모든 단계를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서린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해 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우는 이들의 대략적인 수준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현재 자신은.
이지스보다 한 수 뛰어난 수준이었다.
유서린은 물론이거니와.
‘수르트까지도 상대할 수 있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 역시 무시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얻은, 예기치 않은 성장이었지만 정우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때문에 강세기의 수준은 기형적이었다.
S급임은 확실했고, 위력은 엄청났다.
머맨의 왕과 싸우느라 고리가 살짝 헐거워지지만 않았다면 전투는 일방적이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얼추 비등해 보였다.
보여지기로는….
정우는 얼음 화살을 쳐 냈다.
얼음 화살에 담긴 위력은 상당했고, 손등을 욱신거리게 만들었지만.
‘느려.’
미세하게 삐걱거림이 있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조종…이다.’
정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제야 강세기의 수상한 행보가 이해가 되었다.
세뇌보다 강한, 조종.
더 악질이었다.
순간적으로 분노했던 정우였지만, 공간을 넘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물을 부으면 그대로 얼어 버릴 정도로 온도가 낮아졌다.
강세기의 눈동자에 생긴 핏줄 역시 도드라지다 못해 터져 버려 아예 붉은 눈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 사실에 반색하며 정우는 주변을 훑었다.
정확하게는.
일본 측 플레이어 방향을.
‘누구냐!’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곳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이들이 존재했다.
정확하게 판별해 내야만 했다.
세상을 쪼갤 듯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얼음 창을 몸을 비틀어 피하며, 실드를 전개했다.
쿠웅!
묵직한 굉음과 함께 얼음 골렘의 거대한 주먹이 방어막과 부딪쳤다.
정우는 한 손을 빙글 회전했다.
“……!”
강세기의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얼음 골렘의 발밑에 생겨난 마법진으로부터 상당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전개와 동시에 완성된 마법진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회오리치며 솟구쳤다.
파이어 필라(Fire Pillar).
마치 고통이라도 느끼는 듯 발버둥 치는 얼음 골렘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방어막.
결계사의 그것이었다.
얼음 골렘의 푸른 안광이 점차 빛을 잃어갈 무렵.
쿠릉.
천둥과 함께 만들어진 먹구름이 얼음 조각들을 뿌리기 시작했다.
“프로즌 템페스트(Frozen Tempest)다!”
강세기의 궁극기나 다름이 없는 마법이었다.
‘찾았……!’
강세기조차 준비가 필요한 스킬을 전개하면서 드러난 건.
강세기를 조종하기 위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정우는 분명히 그것을 발견하고, 그 흐름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파악했지만.
찰나의 파악이 끝난 뒤로 정우를 장악한 건 오히려 침음이었다.
“피해요!”
* * *
유서린은 비명을 질렀다.
무려 강세기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던 정우의 몸이 덜컥 멎었다.
무엇을 본 것인지, 살짝 커진 눈동자엔 당혹마저 담겨 있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우박들은 하나하나가 다 B급의 스킬을 뛰어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조차 쉽게 경시하지 못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하지만 멈칫한 정우는 반응은커녕.
뒤편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어딜 보는 거야!’
일본의 플레이어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할 따름이었다.
‘블링크를 믿는 거야?’
그녀는 정우의 스킬을 대략적으로나마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대련을 거쳤고, 당시 정우의 밑바닥까지 전부 긁어내었던 경험이 있던 그녀는 정우의 스킬 대부분을 알고 있었지만.
‘블링크는 무적이 아니라고!’
모든 공격을 그저 공간을 넘는 것으로 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마법사들은 공간이동을 습득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을 터였다.
블링크는 분명히 유용한 마법이었지만, 의외로 시전까지 딜레이가 필요했으며.
공간의 파악에 조금만 실패해도 이상한 장소로 이동하여 미리 존재하던 물체에 신체가 끼여 절단당할 수도 있었고.
더군다나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은 주변의 마력을 억제하고 제압하는 효과가 있어서, 블링크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우의 블링크는 그런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무모해.’
강세기의 공격 범위는 넓었다.
그 속에서 블링크를 사용하는 건, 대마법사 질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블링크를 하기 전의 특유의 동작이 보이질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비명을 지른 후 흐른 시간은 짧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강세기의 공격은 정우의 전신에 닿을 듯 쇄도했다.
순간적으로 검을 들고 휘두를 자세를 취했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오싹.
갑자기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이 그녀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기이한 형체의 무언가가.
압도적인 기세로 사방을 굽어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