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마나 (7)
김하란은 애국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각성 전 그의 직업은 군인이었고, 특수부대원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초창기엔 누구보다도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의 성향과 활동 때문이었다.
보상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의 생활.
때문에 자국 대신에 타국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의 행보는, 수많은 국민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았었다.
때문에 냉정하게만 보면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굉장히 저평가된 인물이기도 했다.
유서린은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지석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며, 오히려 김하란은 유지석을 은인으로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정하의 ‘해독제’의 출처가 바로 협회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소와는 달리 후퇴하는 아군 사이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텼던 것이다.
“그때 말을 들을 걸 그랬어요.”
유서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김하란은 그녀가 말하는 그때가 자신이 도주하던 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안, 하오.”
김하란은 고개를 떨궜다.
유지석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조금만 의심했다면.
아마 그는 유서린의 목덜미를 잡아끌어서라도 같이 도주했을 터였다.
하지만 유지석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딸을 잃었다고, 같이 전투를 벌였던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로 악하지 않았다.
선후를 구분하고, 정의를 판별하며, 참과 거짓을 분별할 정도의 인격자였다.
그렇기에 몇 번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각자도생을 결정했다.
같이 도주했다면 나았을까.
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한 명의 미끼는 필요한 상황이었다.
저주는 쌓였고 육체는 지쳤으며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유서린의 표정에는 한 줌의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플레이어란, 원래 그런 거니까요.”
그녀 역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복수.
그것을 위해서라면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복수를 선택할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자식을 위하는 아비의 마음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김하란을 외면한 채로, 수하이자 동료가 된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유서린의 표정을 본 김하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김하란을 뒤로한 채, 유서린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정우의 등장과 전투로 이어진 내용에 김하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국인이 맞소?”
“맞습니다. 김하란 플레이어.”
“대체… 어떻게 내가 모르는 6번째 S급이 있을 수 있지?”
김하란은 혼란스러웠다.
유서린 역시 자신만큼이나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아무리 지쳤다고는 하지만, 경험과 기감까지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지칠수록 발휘되는 것은 기본기.
전투의 경험 역시 그런 기본기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조우한 보스의 등급을 잘못 판단했을 리가 없었다.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지녔으며, 동일 등급의 플레이어보다 몇 수나 뛰어난 힘을 지닌 놈들이 바로 ‘보스’라는 개체였다.
“그 보스가… 그 정도의 실력이었단 말이오?”
유서린은 보스를 자신과 동률로 놓았다.
무려 징벌의 처녀와 동급이었다는 소리에 김하란은 실소도 터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는 그녀의 수준을 높게 보았다.
물론, 이번엔 둘 다 죽을 위기를 겪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놀람은 더욱 컸다.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야 가까스로 승리할 것 같다던 상대를, 눈앞의 상대는 그리 시간을 들이지 않고 죽였다는 건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놀람은 일렀다.
“그것도 말씀드려야죠.”
정우의 말에 유서린이 침음과 함께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김하란의 표정 역시 굳었다.
“머맨과 세이렌의 구분법에 대해서 알려드린 것… 기억하시죠?”
“…기억하고 있소.”
“그럼 저와 전투를 벌였던 놈의 특성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근접 전투라면….”
김하란은 아둔하지 않았다.
유서린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머맨!”
“……맞아요.”
“으음…. 이곳은 분명히….”
“세이렌의 영토, 라고 불리죠.”
정우의 말에 김하란은 신음을 흘렸다.
엄연히 이곳의 주종은 세이렌이었다.
보다 수가 많고 외형상 강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곳의 주체는 엄연히 세이렌이라는 소리였다.
그 말인즉슨.
“……보스가 아니다?”
말도 안 돼!
김하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정황상 헛소리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세이렌과 머맨은 능력이 전혀 달랐다.
보스급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확실한 거요?”
“확실합니다.”
“이유는…… 후우. 물어볼 필요도 없었군.”
김하란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던전 브레이크의 핵이 무엇인지 알려진 건 없었다.
다만 핵이나 아티팩트.
혹은 보스 중 하나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차라리 보스를 죽인 마당에 핵이나 아티팩트만 남았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막상 죽인 놈이 보스가 아니라는 사실엔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김하란은 그제야 이들이 자신을 먼저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보스 레이드.”
“맞아요. 저희는 물론이고 일본의 강세기와 합류해야 해요.”
“S급이 네 명이나 필요하다는 소리요?”
“아무래도 우리는 지쳤으니까요. 안전한 게 우선이죠.”
“…으음. 좋소. 문제는 저주 아니겠소? 공략 대장도 겪어 봤겠지만, 일반적인 세이렌조차 저주가 쌓이니 버거울 정도였소.”
“그건….”
유서린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정우가 나섰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어떻게 해결한다는 소리요?”
“원래 김하란 플레이어와 함께 합류하려고 했던 영국의 로건도 광역 저주를 사용할 수 있어요.”
“로건? 으음. 그라면….”
“나쁠 건 없죠?”
“썩 괜찮은 플레이어요. 조금 꺼려지는 것만 빼면, 실력이야 나무랄 데가 없소.”
김하란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적의 수는 수백이오. 거기다가 과연 세이렌 보스가 머맨 보스보다 약할 거라고 보시오?”
“때문에 보스는 제가 상대할 겁니다.”
“……나는 한정우 플레이어의 이름조차 처음 들었소. 그래서 의심이 들지. 과연… 가능하겠소?”
그 말에 정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가능합니다. 저 외에도 든든한 지원군이 하나 더 있거든요.”
* * *
“보입니다.”
“X발. 발 빠른 놈 먼저 가서 상황설명부터 해.”
이사의 말에 누군가가 일행 중에서 툭 하니 튀어 나갔다.
“체력이 남았어. 어려서 좋겠네.”
“…저분이 이사님보다 형님일 걸요?”
“……아, 그래? 아는 분이냐?”
“정수 아저씨라고….”
“아……! 그 형님이었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인 이사가 입맛을 다셨다.
“술부터 사드려야겠네.”
“머리라도 박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나 잘해라.”
일본 플레이어들의 진형이 보였다.
모두는 이사와 나이트 길드원의 만담을 듣고 있었지만, 웃는 이는 없었다.
삭풍이 부는 것처럼 분위기는 냉랭했다.
이사 역시 일부러 농담을 꺼냈지만 곧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다물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생겨났다.
혹시라도 유서린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품고서.
김하란과 유서린의 조합은 어떠한 던전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은 파괴력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맥없이 무너졌다.
“…X발. 어떻게, 은신을.”
“일본에서 숨긴 거 아니야?”
“……어. 가능성이 있어.”
“저 새끼들은 지금 습격당한 모습이 아니잖아.”
이사는 수군거리기 시작한 아군의 대화를 들으며 한숨을 팍 내쉬었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형님. 아무래도 수상하잖아요.”
“야, 이 새끼야. 분위기 흐리지 말고 그만해.”
“후우. 일단 뒤통수는 맞지 않게 조심해요.”
이사는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제 의견도 묻고, 신기하네요.”
“아, X발. 내 권위는 어디로 갔냐? 왜 이렇게 애들이 따박따박 말대꾸야.”
“그냥 그렇다고요. 저도 저 형님 의견에 한 표입니다.”
“…그래?”
이진수의 말에 이사에게 말을 건넸던 중년인이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살짝 미소를 지은 이진수가 고개를 돌려 전면을 보았다.
전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자신들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산발적인 전투를 벌인, 평범한 모습.
이진수는 그것이 눈에 거슬렸다.
‘일본 측엔 빌런이 있을지도 몰라.’
정우의 말을 떠올린 이진수는 눈가를 좁혔다.
빌런과 관련된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로 연속적인 일들이 발생하는 건, 격변의 시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왕이 어떤 연유인지 모를 이유 때문에 칩거를 시작하고부터, 빌런 협회는 네 명의 왕의 각축전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서로 세력 다툼과 영역 다툼을 벌이느라 빌런끼리의 사건은 종종 발생하긴 했지만.
라스베이거스 테러 이후로 지속적인 테러와 사건이 발생하는 건,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딘지 모르게 이진수는 머맨의 변화조차 빌런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한국의 빌런들이 일본으로 도주한 건, 도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빌런들은 일본에서 모종의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진수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사이, 먼저 나갔던 플레이어가 귀환했다.
“아, 아까 말한 건….”
쩔쩔매는 이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이진수는 귀를 기울였다.
비단 이진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속도는 늦어졌다.
“됐습니다. 공략대리님. 나중에 술이나 사시고, 일본 측에선 합류를 환영하긴 했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잠시 합류를 미뤄 달라고 하더군요.”
“…합류를요?”
“각 공략대장들의 합의가 먼저라네요.”
“공략대장의 합의?”
“어? 우리 쪽 상황 안 전하셨어요?”
“…전했다.”
이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 매국노 새끼가 그러던가요?”
“아니. 다꼬야낀가 뭔가 하는 새끼가.”
“…X 같네.”
이사의 욕설은 파도처럼 일행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연이어 튀어나오는 욕설과 함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러 온 건데….”
“저 X새끼들은 옛날부터 그랬다니까?”
“정보를 주거나 도와주려고 했는데… 우릴 패잔병 취급한다는 거지?”
“그냥 가죠? 차라리… 유 대장이나 찾으러 가요.”
“…거길? 야, 그건 좀…….”
분노를 터트리거나 새로운 제안을 하는 등, 일행은 부산스러워졌다.
이진수는 일본 진형을 살펴보았다.
때마침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건지 일본 플레이어의 행색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진수는 묘하게 그 차분함이 마음에 걸렸다.
흥미롭게 자신들을 보고 있는 모습.
그것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진수는 이사에게 중얼거렸다.
“벗어나죠.”
“아니, 그건 아니…… 어딜?”
“이 지역이요.”
“아예 후퇴하자는 거야?”
“네.”
“…야. 여기 공략 작전 시작된 거 한국에서 제안했다고 하던데?”
“면이야 상하겠지만, 우리도 많은 걸 잃었어요.”
그 말에 이사는 죽어 버린 플레이어와 두 명의 S급을 떠올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일본과 아군을 번갈아 보던 이사가 질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래. 후퇴하자.”
이례적으로 빠른 결정이었지만, 이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사를 좋아하는 건 이런 빠른 결정이 한몫을 했으니까.
약간의 소란이 일긴 했지만 대부분 이사의 결정에 찬성했다.
그렇게 방향을 틀던 한국 플레이어들은.
“……?”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기파에 멈칫했다.
그러고는 일본 측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X발. 이건 또 뭔 개짓거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