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마나 (3)
볼에 난 상처를 쓴 정우가 왕을 노려보았다.
회전하는 물방울은 마법이 아니었다.
스킬. 그보다 더 진화된 능력.
“권능까지?”
유서린의 육체는 피범벅이었고 상당히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체 더미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지 궁지에 몰리지 않을 적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능은 진정으로 경지를 넘은 이들만이 다루는 능력이었으며,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플레이어로 비교하자면, 스킬을 S급까지 성장시켜서 기어이 그 벽을 뚫고 스킬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가져야 했으니까.
“은신에 오러도 모자라 권능까지….”
세이렌의 영토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곳이었다.
“매직 미사일.”
벌떼의 향연은 사라졌다.
어지럽게 웅웅대며 움직이던 매직 미사일이 특유의 소음을 없애고 고요히 정우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마치.
“비슷하지?”
왕의 권능처럼.
당황하는 왕을 본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과 유서린의 전투를 지켜보던 참관자들.
자신들의 왕이 이길 거란 확신에 차서 마력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는 참관자들을 본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여덟으로 보이는 ‘미러 이미지’를 유지한 채로.
‘환상.’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을 앗아간 정우는 반대로 몸을 날렸다.
왕이 아닌, 관객들을 향해서.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왕이었다.
고작해야 3초가량.
왕이 정우의 환상에 속은 건 그 정도의 시간일 뿐이었다.
정우는 나지막한 감탄을 내뱉었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왕의 승리를 바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놈들은, 왕과 대치하는 환상에 빠져 전장을 주시할 따름이었으니까.
왕의 다급한 고갯짓을 보며.
“내리쳐라.”
정우가 명했다.
쿠르르릉!
순식간에 생성된 먹구름으로부터 번쩍임들이 기세를 펼쳐 나갔다.
콰르르륵! 쩌적, 촤차차차찻!
이윽고 떨어지는 번개 다발.
그것은 가히 천상에서 내리는 천벌처럼, 가만히 서 있는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이 하늘을 보며 경악하고, 자신들의 처지에 절규하며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달려오는 왕의 검을 피한 정우가 고요히 떠 있는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것은 은밀한 비수와 같았으며, 전신을 노리는 거대한 충격과도 같았다.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막대한 힘을 감히 경시하지 못한 왕이 다급히 검을 휘두르고 권능을 사용하여 매직 미사일을 막아 냈다.
돌진은 멈췄고.
저지 또한 실패로 돌아갔으니.
쿠르르릉!
남은 건 여전한 천벌의 관람뿐.
“블링크.”
어느새 이동한 정우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타올라라.”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열기가 곳곳에서 불기둥을 만들어 내며 치솟았다.
번개가 떨어지고, 불길이 타올랐다.
유서린은.
“한…정우가 맞는… 거지?”
멍하니 서서 지옥과도 같은 참사의 현장을 가만히 목도할 뿐이었다.
다른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어서.
“어떻게….”
불과 며칠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건지.
자신의 6년도 이룬 성장에 비하면 타인의 질시와 경탄과 부정과 의심을 가득 받을 정도로 짧은 세월이었는데.
“…이게, 말이 돼?”
한정우의 성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그것이었다.
사람이 전혀 달라졌다.
보스를 농락하고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저 사람을 D급 플레이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S급.
그것도 자신에 준하는.
아니, 섬멸을 요하는 전투에 한해서는 자신보다 더한 파괴력과 능력을 보여 주는, 마법사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미세스 질.
세계 최고의 대마법사인 그녀에게서.
“대마법사라니…….”
스스로가 내뱉었음에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조용한 표정에 생겼던 믿음조차 지금 이 상황에선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 정도로 작금의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불타고 타들어 가는 일족에 분노한 보스의 공격은 매서웠다.
불기둥을 꺼트릴 기세로 솟구치던 물기둥이 이내 뿌연 수증기와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 내며 소멸했고.
안개 사이로 뛰어든 보스의 푸른 검이 그녀조차 몇 번은 놓칠 정도의 빠르기로 정우를 베어 갔다.
그럼에도 정우는 몸을 움직이고, 마법을 사용하며.
“…미친.”
그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돌진하던 보스의 몸이 덜컥 멎은 채로 옆으로 비틀거렸다.
‘…염동력.’
그녀의 예상대로 염동으로 밀려난 보스를 향해 정우는 손을 내밀었다.
그곳에서부터 펼쳐지는 마법의 향연은, 부정하고 당황하던 그녀의 정신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답다.’
아름답고 위대해 보였다.
불꽃이, 번개가, 얼음이, 바람이.
섞일 수 없는 그것들이 서로 섞여 왕에게 쇄도했다.
쩌적, 쩌저적!
왕 역시 허무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얼음을 잘라 내던 검이 불꽃을 갈랐고, 바람을 밀어내던 검이 번개를 쳐냈다.
가히 경천동지한 능력.
하지만.
‘…느려진다!’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마력도 바닥이 났고, 스킬의 여파로 체력도 한계에 달해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지만.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그녀의 안력은 모든 것을 담은 채로 그저 경탄할 따름이었다.
보스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 한 수.
‘그게 없어!’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며 성장한 여력이 보이지 않았다.
태생부터가 강자로 태어난 듯, 보다 뛰어난 공격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쳐 내고 부수고.
잘만 방어하고 있는 보스의 모습을, 그녀는 ‘발악’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점차 느려지는 검은 몇 발의 마법을 쳐 내지 못하고 허용해 버렸다.
그게 스위치라도 된 듯.
“몰아쳐라.”
마법은 더욱 거세졌다.
휘이이잉!
토네이도가 생성되고.
불꽃이 사라진 대신 등장하는 건, 잘게 잘린 얼음들.
그녀는 신음처럼 그것의 정체를 입 밖으로 꺼냈다.
“……블리자드(Blizard).”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눈보라가 얼음과 함께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삐걱.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고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단단하게 접합했어야 하는 부위가 헐거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령(言霊, Passive Magic Skill)’을 습득한 건 분명히 엄청난 성과였다.
과거의 자신 역시 어둠을 공략하고서야 습득한 능력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언어가 힘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며.
언어 자체가 권능이 되는 능력.
세이렌의 영토의 모든 마력을 끌어다가 고리를 만들 기세로 휘몰아치던 정우의 집중이 깨어진 건, 바로 한국 플레이어 측의 위험 때문이었다.
정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경지의 완성에 제동을 걸었다.
반발력으로 지끈거리는 정신을 무시한 채, 미처 완성되지 못한 고리 하나를 오히려 부숴 버린 정우는 망설임 없이 좌표를 스캔했다.
하지만 지역의 특성 때문인지 좌표가 부정확했고, 결국 정우는 다른 방법으로 이동을 감행해야만 했다.
바로 비행 말이다.
비행 마법은 공간이동 마법과는 달리 나름의 효율성을 인정받은 부류였다.
다만 비행 마법과 더불어 기타 여러 마법을 사용해야 했기에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은 사용이 어려운 고위급 스킬이긴 했지만.
정우는 어렵지 않게 비행하여 이동했고.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과도기였다.
‘이전이라면 어렵지 않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아직은 고리를 완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버겁군.’
당황하는 왕의 모습을 보면서도 정우는 침음을 속으로 삼켰다.
수많은 마법을 사용하며 압박을 가했음에도.
비록 방어가 늦어져 지속적인 공격을 허용하고 있음에도.
저 왕관은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욱신!
심장 어름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등급이 상승하며 얻은 안정화조차 지금을 감당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정우는 예전이라면 전혀 들지 않았을 그것을 꺼내 들었다.
과거의 자신에겐 없던 능력이며, 친우들이 학을 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능력이지만.
고리를 형성하면서 강해진 오감은 분명히 이 능력이 필요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턱.
정우는 바닥을 디디며 곧장 아공간에서 창을 꺼냈다.
웅웅!
순식간에 맺히는 오러는 이전보다 무척 선명하여, 여전한 마법만 아니라면 창술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창을 든 채로.
타앗!
정우의 신형 또한 사라졌다.
바닥을 박찬 정우가 정직하게 일직선으로 들이닥친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돌진.
모든 것을 꿰뚫을 총알과도 같았다.
휘이잉!
정우는 하나의 바람이 되었고, 왕을 노리고 쏟아지는 여러 마법은 그런 바람을 교묘하게 피해 움직였다.
마치 스스로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유서린은 정우의 돌진에 깜짝 놀랐고, 본인의 마법이긴 하지만 이미 발현된 그것이 자연스럽게 길을 여는 듯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목을 꺾는 왕의 눈을 보며.
정우의 창이 회전했다.
가각!
창과 부딪친 검이 요란하게 울어댔으나.
퍼억, 휘청.
이윽고 충격에 몸을 떨며 허리를 꺾는 왕의 빈틈을 향해, 정우가 창을 내질렀다.
“찌르기.”
고리로부터 전해지는 막대한 마력이 몇 겹이나 응축되어.
하나의 빛처럼 쇄도한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
두 눈이 멀 정도의 빛에 왕은 다급히 검을 휘두르며 눈을 찌푸렸다.
검과 창날이 서로 맞닿은 순간.
“……!”
왕의 찌푸려졌던 눈이 부릅떠졌다.
스스스-슷!
아주 고요하고 불쾌한 소음이 뒷목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마력으로 느끼자면 이건.
죽음.
그것이 자신의 오러를 갉아먹으며 목을 꿰뚫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빛으로 가려진 왕의 표정은 생기를 잃어 갔다.
그리고 드리워진 것은, 다름 아닌 공포.
처음으로 공포를 느낀 왕은.
캬아!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순간적으로 빛을 밀어낼 정도의 마력이 왕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비스킷처럼 부서지던 오러 역시 점차 단단해졌다.
가각!
이윽고 다시 쇳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한 수….’
왕에게 없던 한 수.
그게 지금 각성했다.
하지만.
휘릭!
어깨를 틀고 팔꿈치를 굽히며 손목을 꺾은 정우의 창이 순식간에 흐름을 바꿨다.
뱀처럼 휘어지는 일격.
그리고 쏟아지는 마력까지.
“늦었어.”
정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울컥, 반쯤 사라진 상체의 일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왕을 버려 둔 채로.
왕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죽인 인간을 보고자 안력에 힘을 주었으나.
왕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화르르륵!
어느새 전신을 가득 채운 불꽃만이, 처음으로 느낀 패배감과 함께… 자신을 앞에서 아른거릴 뿐이었다.
털썩.
무너지는 왕의 모습을 본 몬스터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몇몇이 주춤 뒤로 물러섰고, 이윽고 더 많은 놈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시초였다.
“…이것들이 도망도 칠 줄 아는 몬스터였군요.”
기겁하며 도망치는 머맨과 세이렌의 등을 본 유서린이 어이가 없는 표정과 함께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정우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상처투성이였지만, 치명상은 없어 보였다.
마력이 흔들리긴 했지만, 요양만 하면 금방 제 컨디션을 되찾으리라.
“살아 있어서 다행이군요.”
유서린은 왠지,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