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마나 (2)
레이드(Raid)는 다수의 플레이어가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것을 뜻했다.
상대가 같은 다수가 될 수도,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었지만 협력하여 공략하는 개념 자체가 레이드라고 불렸다.
던전을 공략하는 단위 중, 레이드라고 불리는 건 단 한 가지.
보스(Boss)뿐이었다.
말 그대로 우두머리인 그것들은 던전의 마력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어서, 던전의 등급이 곧 객체의 강함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스.’
이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보통 보스는 던전의 최후 지점에 존재했다.
보통이라면 핵의 위치.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미국의 미해결 지역에서 보스는 제 영역만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체 뭐야?’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미해결 지역. 그것도 보스 레이드가 실패해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를 처리해 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수많은 변화들.
그게 한순간에 의심되고 확인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까득!
김하란의 판단은 옳았다.
아군이 퇴각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무의미한 죽음에 화가 나서 더 시간을 끌었던 것도 있었다.
냉정하게 보면.
‘실책이야….’
김하란의 도주 시점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었다.
뱀처럼 꼬리는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고요해 보였다.
상체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그저 천천히.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주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보스를 중심으로 느껴지는 마력은, 아지랑이같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또렷했다.
‘…….’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유서린은.
‘……죽겠구나.’
자신의 결말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기를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모든 놈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왕은 나아오고 모두는 물러서서 만드는 건, 하나의 결투장.
이것이 증명하는 건 하나.
“……하.”
유서린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개 처형이라도 하시겠다?”
예로부터 자주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힘 빠진 상대의 우두머리를, 아군의 우두머리가 죽임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상대에겐 두려움을 선사하는 방법.
“몬스터 따위가….”
유서린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상황은 좋지 못했다.
마력, 체력, 정신력.
그 어떠한 것도 저 괴물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판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걸었다.
‘도주는 불가능. 놈들의 그 특이한 이동 방법은 내 속도보다 빨라.’
심지어 보스에게는 어떠한 능력이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팔 하나라도 잘라야지.’
유서린은 여기서 보스 레이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결말은 정해져 있겠지만, 전력이라도 낮추겠다는 생각으로.
“광인(狂人).”
버서커 계열의 최고 스킬.
모든 능력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한편 제한 시간을 선사하는, 초강수를 둔 유서린이.
파앙!
바람처럼 사라졌다.
히죽, 웃은 보스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간다.
쩌엉!
어느새 꺼내 든 얇은 세검이 그녀의 검과 부딪쳤다.
우득!
반발력을 느끼며 뒤로 튕겨 나간 그녀가 주륵 미끄러지다 다시 사라진다.
팡, 파파파팟!
왕의 주변에 먼지가 튀어 오르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 있는지 묵직한 일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까득, 가가가각, 챙, 콰직!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도 않는 무지막지한 일격이 지면을 갉아 내고 위태롭게 서 있던 건물을 무너트리며.
쿠우웅!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지만….
캬카-!
보스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쿠웅!
튕겨 나간 유서린이 바닥을 몇 번 구르다가 튕기듯 일어섰다.
애검 소드 브레이커를 든 손아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반쯤 앞으로 굽은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최종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정신이 번쩍 든 건, 결코 좋지 못한 일이었다.
광인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 그 자체였으니까.
팔?
틀렸다.
‘…강, 해.’
만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팔은커녕 생채기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유서린의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죽는다.
이미 결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훅, 다가오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검을 틀어쥐며 상체를 곧추세웠다.
검을 늘어트리고 상체를 흔드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카캬-!
보스는 입을 벌리며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건지 아니면 조소에 가까운 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뾰족한 이빨을 타고 유서린을 자극했다.
“젠…장.”
S급 플레이어.
한국의 미래이자 세계 최고가 될 재능을 지닌 인물.
그런 평을 들으며 살아왔고 실제로도 ‘벽’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래서… 뭐?’
눈앞의 물고기도 찢어 버리지 못하는 힘이 너무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파스스.
그녀의 발밑의 지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일격.
그것의 준비만으로도 그녀가 왜 S급 플레이어인지 여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문명은 이능을 이기지 못하고 과자처럼 부서질 따름이었다.
묵직해진 검을 머리 위로 천천히 올리고, 하체를 낮춘 뒤에 중심을 앞으로 쏟아.
‘간다……!’
콰앙!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갔던 그녀가.
콰앙!
또 다른 굉음과 함께 뒤로 튕겨 나왔다.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의 반발력.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든 생각은 다른 게 아니었다.
“……뭐야?”
바로 의아함.
보스에게 도달하지도 못한 채로 무언가에 가로막혀 뒤로 튕겨 나간 이 상황이….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로 위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는.
* * *
“제가 맡을게요.”
부유 마법을 사용한 정우가 유서린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말했다.
놀란 표정의 그녀 외에도 보스 역시 시선을 옮겼다.
어딘지 모르게 놀란 듯하면서도 불쾌해 보이고, 분노하기까지 하는 묘한 눈빛으로.
“……누구?”
뚝뚝 끊기는 음성으로 유서린이 침입자를 불렀지만, 오히려 상대는 손을 휘저어 유서린을 뒤로 밀어냈다.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염동’이었다.
얼이 빠져 있는 유서린을 뒤로한 채, 정우는 천천히 하강했다.
목이 꺾여라 하늘을 쳐다보며 점차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한 머맨의 ‘왕’을 보며, 정우는 싸늘하게 말했다.
“덤벼.”
차가운 어조에 보스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으며, 오러가 더욱 또렷하게 맺혔다.
머리에 쓴 왕관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푸른빛의 비늘이 견고한 갑옷처럼 차르륵댔다.
하나, 그뿐.
이 영토의 왕이자 주인인 보스는 검을 들어 어깨에 올리며 그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정우의 눈가가 좁혀졌다.
“그럼… 내가 가지.”
저벅.
정우의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었고, 그 어떠한 무기도 들지 않은 채로 손을 늘어트리고 무방비하게 걸을 뿐이었다.
유서린은 경악해 소리쳤지만, 그녀의 외침은 정우에게 닿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보호막’에 갇혀 있음을.
‘내가…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이걸 몰랐다고?’
경악과 충격.
-회복에 집중해요. 저 한정우입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정우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한, 정우라고?’
외형이 바뀐 건 차후 문제였다.
“…도망쳐요!”
그녀는 태연하게 앞으로 나서는 정우가 이해가 되지 않아 고함을 질렀다.
때마침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 아주 대담한 모습이었다.
어색하지만 낯익은 표정과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단단해 보이는 눈빛과 표정.
그것은 결코 그저 버티거나 패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승리자의….
‘단언….’
한정우가 아무리 이중 던전을 클리어하고 마왕과 견줄 재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멈춰 있던 성장이 시작된 이후로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 눈앞의 보스는 자신조차 만전의 준비를 해야만 상대가 가능한 강자였다.
플레이어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란 소리다.
“그런데…….”
왜….
“…믿음이… 생기는 거지?”
유서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퉁, 방어막을 짚었다.
* * *
그것은 탄생부터 강자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산고를 겪은 여왕의 품에서 눈을 뜰 때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해 동족이 조아리는 것은 당연했으며,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점차 강해지는 건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여왕이 왕관을 씌웠을 땐, 이제야 맞는 옷을 입었다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왕.
자신은 그것이 되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다.
이곳 영토는 그리 넓지 않았다.
바다는 의외로 반경이 좁아 활동하기가 불편했고, 지상은 의외로 반경이 넓어 움직이기가 좋았다.
때문에 왕은 지상에서의 움직임을 보다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학습했다.
하지만.
애당초 동족만이 있는 장소에다 경쟁이랄 게 없을 정도로 강함을 지니고 있는 왕이었기에.
“단련한 적이 없구나?”
순식간에 자신의 목을 쥔, 보이지 않는 손아귀를 느끼며 왕은 당황해 버렸다.
촤아아악!
단숨에 염동을 끊어 낸 왕이었지만, 처음의 오만한 눈빛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캬아-!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드는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려 위협했다.
그러나 상대는 태연했다.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서서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넸다.
“너희는 원래 해안가에 서식하지. 육지는 체질이 아니야.”
훈수를 두듯, 조용한 어투가 거슬렸다.
그렇기에 움직였다.
파앙!
공기가 밀려나고, 세상이 빠르게 흘렀다.
목표는 저 방자한 입.
별다른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 저 인간의 입을 꿰뚫고 마저 승리를 쟁취하리라.
예상대로 너무도 쉽게 꿰뚫고, 너무도 쉽게 승리를 쟁취했다.
오히려 허탈한 마음이 들 무렵.
“경험도 일천하고….”
“……!”
평온한 음성이 들렸다.
왕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려 상대를 찾았으나.
우뚝.
오히려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하나, 둘, 셋…… 여덟.
꿰뚫었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오히려 여덟의 수로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자세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왕은.
쿠르르르릉, 쿠릉!
진노했다.
검이 요란하게 떨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곡선으로 휜 상체가 곧게 서며, 당장이라도 모든 걸 베어 버릴 기세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콰드드드드드드득!
그러나.
“……!”
왕의 검은 그 어떠한 인간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 사실에 왕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판단력도 느려.”
냉정하게 판단한 상대의 손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짓눌러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왕은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에 허리가 꺾였다.
꺄드드득!
굽어진 등의 비늘이 짓누르는 힘에 밀려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치욕은 이내 분노로 치환되고, 분노는 막대한 존재감으로 변했다.
상대의 능력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만.
보글보글.
왕의 긴 꼬리 밑에서 시작된 물기가 이내 허공으로 올라와 빙글, 회전했다.
굽어졌던 허리가 천천히 펴지고, 회전하는 물방울의 중심에 선 왕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죽인다.
처음으로 품는 살의였으며, 진심으로 내뱉는 의지는.
팟!
물방울에 닿았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던 상대의 볼에 난 상처를 보며.
히죽!
왕은 드디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