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급 던전의 찬탈자-147화 (147/293)

147화

-마나 (1)

아스라이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 한 줄기의 끈을 발견한 정우는 악착같이 그것을 붙잡고 버텼다.

땅속에 묻힌 감자처럼, 줄기만 보일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그것의 표면이 슬쩍 도드라졌다.

무의식 안에 가라앉았던 기억.

자신의 최후의 순간.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살의를 간직한 눈동자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두 눈이 뽑혀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그 눈동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후욱, 후욱!”

언제고 본 적이 있는 그것과 동일했다.

숨을 몰아쉰 정우를, 메아리가 부축했다.

“…인님. 주인님!”

멍한 귓가로 들리는 음성에 뒤늦게 반응한 정우의 탁한 동공을 본 메아리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차라리 유혹이라면 즐겁게 진행하련만….

메아리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정우는 아예 뒤로 누워 버렸다.

지끈거리는 기억을 밀어내고 심장 소리가 뇌리를 가득 채워 나갔다.

눈동자의 마지막 말.

강제로 열어 본 기억 속에서의 그것이 심장을 옥죄었다.

정우는 심장을 쥐어뜯을 듯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곱씹으면서.

“내가 가졌어야 할 자리를… 찬탈하려 한다. 왕이었던 자여!”

* * *

생각을 정리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곳이 어둠의 영역과 비슷한 마력의 흐름을 가지고 있고, 머맨이 은신을 습득할 정도의 이변성을 지니고 있다면.

“아군이 위험해….”

“…아군이요?”

총리의 계획 따위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지도 몰랐다.

강세기.

빌런과 조우하여 인간을 넘기고, 뱀파이어의 새로운 육체의 개조를 지시한 그는 과연 세뇌당한 인물이었을까?

정우는 의심이 들었다.

총리가 연류된 건 사실이었고, 그가 모든 걸 지시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지만.

강세기의 움직임이 모호한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를 염두에 두지 못할 정도로 급박했다.

“이진수…….”

정우는 이 전투에 참여한 친구의 이름을 탄식처럼 내뱉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몬스터들의 돌진과 공격을 막아야 할 친구의 안위가 떠올랐다.

‘마나…….’

[ ‘마나’를 활성화하십시오. ]

재촉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 개념을 시스템이 어떻게 아는지, 트라우마를 통한 강제적인 상기(想起)에서도 알 순 없었지만.

이미 한번 연 고리의 흠은 정우의 개입을 반기기라도 하듯 쩍 벌어져 유지되고 있었다.

마Д : жы

깨어짐으로.

다른 모든 것들은 정상적으로 표시되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손을 댄 마력만큼은 기이한 형태로 깨어져 있었다.

벌어진 틈.

거대한 고리를 인위적으로 열어젖힌 결과물을 보며, 정우는 이것을 봉합하기로 결심했다.

‘염동.’

실험 삼아 진행한 스킬의 활용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이 열어 버린 고리를 닫고 다시 활성화시켜야지만, 사용이 가능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애당초 망설일 일도 아니었다.

엘릭시르.

마력의 실로 모든 육체를 관통시켜 마력 그 자체의 통로가 되고자 한 작업이자, 과연 덕분에 막대한 시간을 버티게 만들어 준 불로불사의 방법.

그걸 진행하다가 든 불안감으로 망설이다가 택한 방법이, 의외의 해결점처럼 ‘마나’라는 결과물을 제시했을 뿐이다.

‘제시? 아니…. 강요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정우 스스로가 마력이라는 수치를 파고들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내용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우는 결정했다.

이대로 마나를 완성하기로.

마력이라는 고리에 기어이 새로운 고리를 걸어.

“…다음 경지로 나아간다.”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성으로 다짐한 정우의 결정은 빨랐다.

찬탈.

눈동자의 주인이 언급한 단어가 심장에 박혀 들었다.

메아리가 상체를 일으키는 정우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그는 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러고는 차분히 자리한다.

스킬이 아닌 아공간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렸고, 정우는 그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여전히 이어져 있는 선들을 끌어다가 마력이라는 고리 안에 욱여넣었다.

파직!

전기 충격기에라도 당한 것처럼 몸이 한 차례 떨리고 튕겼다.

고리가 주는 반발력이 상당했다.

새로운 고리를 거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겨우 벌어진 틈새 사이로 흐르는 막대한 힘은 정우의 개입에 저항했다.

하지만 정우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육체를 터트릴 것처럼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력을 활용하여 쉴 틈 없이 전투를 벌였고.

그 와중에도 새로이 연구하여 기어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 승리한 것처럼.

정우의 집념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밤새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면서도, G급 던전에 입장 가능한 일반인의 신분을 놓지 못했던 것도.

그럼에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쓰러져서 기절할 정도의 고농도 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감행한 것도.

모두 다 정우의 성향이자 이계에서부터 축적된 의지였던 것이다.

둔기로 후려치는 듯한 묵직한 충격이 전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사방에서 휘둘러져 상처를 만들어 냈다.

통증과 격통.

정신을 앗아 가는 부정적인 감각들이 지속적이고 간헐적으로 전신을 자극했다.

그럼에도 정우의 정신은 보다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새는 그의 예상보다도 좁았다.

그렇다면.

그 틈새에 새로운 고리를 걸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리가 얇아야만 했다.

‘무조건 얇으면… 안 돼.’

자칫 헐거워져 버리면 크나큰 문제였다.

이계에서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헐거운 고리를 형성하여 폐인이 된 일들이 있었다.

고리의 생성은 그만큼 위험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하는 종류였으나.

‘안쪽에서 덩치를 키운다….’

정우는 자신을 믿었다.

마력에 선택받은 자.

축복과 경의를 받는 자.

그로 인해.

마법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의 인물이 된 자.

그렇게 불렸던 과거의 자신을 믿었고, 각성 이전부터 마력을 보았던 지금의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딸깍.

기어이 반발력을 이기고 끼어든 하나의 얇은 고리로 돌아왔다.

실 같이 얇은 고리.

그 고리가 마력이라는 수치의 고리에 걸려 있었다.

정우는.

‘아라크네의 마력.’

마력의 실을 조종하고, 그것으로 많은 걸 파악하는 아라크네의 감각을 불러왔다.

제대로 물린 고리의 흐름에, 새로운 실을 연결한다.

마치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듯, 공기 주입기의 선처럼 마력이 새로운 실을 따라 주입되기 시작했다.

실처럼 얇았던 고리가 이내 두꺼워지고, 틈새로는 결코 빠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쿨럭!

피를 토한 정우가 마지막으로.

‘…닫아.’

강제적으로 벌렸던 고리의 틈새를 힘으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연결한 팔찌의 고리를 오므리듯.

어지간한.

아니, 지상 최고의 마법사인 질 고메즈조차 가능할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예가 펼쳐진다.

고리를 타고 밀려드는 마력.

덩치를 키워 나가며 오히려 불안정하게 떨리는 흐름까지.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격한 흐름 속에서, 정우는 차분히 마력을 조종했다.

끼릭.

그리고 열렸던 고리를 닫는 순간.

모든 감각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보다 세밀해진 감각으로, 만든 고리에 또 다른 고리를 연결했다.

급속도로 덩치를 불려 가며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휘이이잉!

그 여파가 외부까지 닿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메아리가 다급히 난간을 붙잡았다.

흡입력에 미끄러지는 다리에 힘을 주고, 마력까지 사용하여 버텼다.

주변의 공기가 회전하고 비틀렸고.

“……존재감이… 강해지고 있어.”

정우의 존재감은 광풍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처럼 오히려 외부로 분출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거세질 것만 같던 광풍이 가라앉은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막대한 흡입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바람에 휘날려 솟구쳤던 여러 잔해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다급히 몸을 날려 정우를 보호하려던 메아리가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떨어지던 잔해는 물론 먼지마저 허공에서 우뚝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장면이었다.

원래 이러한 세상이라는 것처럼.

그녀의 왕이자 주인인 정우가, 그 속에서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 * *

몸을 비틀어 회전한 검에 허리가 꺾인 머맨이 동료와 엉켜 나뒹굴었다.

“…….”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려다가 굳게 닫은 김하란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움직였다.

일격에 수십씩 베던 검이 무뎌졌다.

그저 허리를 꺾어 버리며 날려 버리는 게 전부일 정도로 상황은 형편없었다.

쩌엉!

플레이어의 것이었을 곡도가 자신의 검을 막아 내자 김하란은 확신했다.

“……이탈하겠소.”

결정을 내린 그의 움직임은 달라졌다.

끝내 숨겨 두었던 힘을 꺼내 한쪽의 진형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다시금 기운을 차린 사자는 늑대의 목을 물어뜯으며 전진했다.

몬스터의 진형을 무너트렸지만, 그 자리는 금방 회복이 되었다.

유서린은 김하란의 이탈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전투는 오랜만이었다.

미해결 지역인 세이렌의 영토의 머맨과 세이렌은 A급 몬스터는 아니었다.

일본이 자체적으로 판단한 등급은 그러했지만 실제로는 B급과 A급의 사이.

정확히는 B급에 가까운 몬스터였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상대하기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공격과 서포터의 조합이 너무도 위험했다.

미해결 지역은 하나같이 S급으로 분류된다.

그 안의 몬스터 등급이 어떠하든 던전 브레이크를 막지 못했고, 심지어 공략에 실패해서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 S급으로 분류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던전과 던전 브레이크는 장단점이 뚜렷했다.

그나마 던전 브레이크에 비해 던전의 위험성이 낮았으나 한번 입장한 이후에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든 공략을 하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출구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매우 중요한 단점이 있었고.

‘…던전 브레이크는 그래도 후퇴가 가능하다는 게 큰 장점이야. 모두 무사히 돌아갔어야 하는데…….’

지구와 연결된 만큼 반경만 넘어가면 놈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고맙게 느껴졌다.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확실히 지능이 향상되었다고 느끼는 점은, 세이렌들이 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하란은 모르겠지만 유서린은 어지간한 저주 따위에는 면역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성기사(Holy Knight).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세이렌의 공격 따위는 무시하면서 머맨에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버거울 정도로, 머맨의 수는 많았다.

‘여러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골치가 아파.’

머맨은 외형상 세이렌과 크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또렷한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스킬’을 사용할 때부터였다.

머맨은 육체 강화에 온 마력을 쏟아 부어 근육질의 거한의 육체로 변모하고.

세이렌은 현혹의 영향인지 보다 아름답게 변모한다.

하지만 아무런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놈들은 그저 어설프게 인간의 얼굴을 따라 한, 물고기일 뿐이다.

‘…생선은 다 먹었네.’

질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죽였는지 모를 정도로 싸웠으며,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지쳤다.

그럼에도 얻은 건 없지 않았다.

‘…어디선가 계속 생성되고 있어.’

미해결 지역은 공략이 불가능한 장소인 만큼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은신이라는 스킬을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뼈아픈 실책이다…. 다 내 실수야.’

합류와 동시와 죽어 버린 플레이어들.

그들의 억울하고 허무한 죽음이 그녀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도망가야 옳은 상황.

그러나….

‘…조금만 더.’

발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왜 오지 않지?’

갑자기 시작된 대치.

거리를 벌리며 경계하는 태세였지만 묘하게 무언가가 달랐다.

꼭.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스르르.

썰물처럼 길이 생겨나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릿!

‘……강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면을 주시했다.

다른 놈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

하지만 하나의 차이점이라면.

‘…왕관.’

머리에 쓴 왕관과 함께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라는 것이었다.

‘S급 보스!’

유서린은 입술을 짓이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