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서큐버스 (9)
“내 정신에 침투해.”
“……네?”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도 나름 건재한 건물 옥상에 오른 정우가 대뜸 말했다.
습기가 가득한 지역이라 이곳저곳이 녹이 슬어 있었으며, 시멘트는 껍질이 벗겨진 나무처럼 삭아있었지만.
여러 전투와 충격 속에서도 나름의 상태를 유지한 걸 자랑이라도 하듯 홀로 높게 솟은 건물의 옥상에서 정우는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서큐버스의 힘을 떠올렸지?”
“……네.”
메아리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할이 중요해졌어.”
“제 역할이요? 무슨 생각이신가요?”
“내가 줬던 마정석을 꺼내.”
정우의 말에 메아리는 품속에서 마정석을 꺼냈다.
일전에 정우가 만든, 메아리를 위한 마정석.
전투에 유용하게 쓰려고 했던 그것을 손에 쥔 메아리가 불안하게 정우를 보았다.
이곳은 전투 지역.
언제 어디서 습격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위험 지역이었다.
“그 힘을 전부 사용해서….”
정우는 일말의 부정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묵직한 눈빛으로 메아리에게 말했다.
“내게 환상을 걸어. 네가 기억하는 과거. 내가 기억하는 과거.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모든 트라우마를 자극해.”
“……!”
단호한 그 말에 메아리의 몸이 덜컥거렸다.
* * *
몽마(夢魔)라 불리는 서큐버스는 환상에 능했다.
마력과 생명력을 취하기 위해 대상자의 꿈을 자극해야 했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 내기 위해서 지녀야 하는 필수 능력이 있었다.
환상과 그것을 주무르는 능력.
대상자의 생각에 따라 끝도 없이 변화하여 원하는 것을 이뤄내는 ‘조절’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 진짜 해요?”
“네가 떨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트라우마…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삼켜져 버린다고요.”
메아리는 우려 섞인 눈빛으로 정우를 만류했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주인님.”
“메아리. 시간이 없다. 바로 진행해.”
고집스러운 단호함에 메아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나 해요.”
만약을 대비하여 마녀의 마을로 이동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열쇠가 사용되지 않았으니까.
길은 열었다.
남은 건 기억의 자극뿐.
자신들의 안전을 빈 메아리의 양손에서 검붉은 안개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스스- 슷.
뱀의 날름거리는 소리 같은 그것은 그녀의 손아귀에 맺혔고.
“진짜 해요?”
마지막 물음을 끝으로 정우의 이마에 닿았다.
톡.
아주 가볍게.
화앗!
트라우마.
그것은 무의식까지 뿌리를 내리는 강렬한 기억으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정우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싶었다.
자신의 뇌리에 박힌, 무의식까지 끄집어내어서.
마지막 순간.
결박당한 이후가 궁금해졌다.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해…… 내.’
정우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주문을 외듯 되뇌었다.
* * *
이런저런 크랙이 가 있던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지탱이라도 하듯 휘감고 있던 넝쿨이 우드득, 끊어졌다.
뿌연 먼지와 함께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지면을 보며 일행은 뒤로 물러섰다.
“힐러!”
“외, 왼쪽이 비어!”
두 명의 S급 플레이어는 과연 그 이름값을 하듯 무지막지한 위용을 떨쳤다.
시뻘게진 두 눈으로 반짝이는 푸른 비늘 사이에서 붉게 빛나는 검은, 가히 사신의 낫에 비견될 정도였다.
쿵!
묵직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은근히 발광하기 시작한다.
유서린의 대표적인 스킬 중 하나인 ‘치유의 영역’.
플레이어들은 자잘한 상처의 치유를 보면서도 기뻐하지 못했다.
전투와 치유.
상반된 능력을 거의 동시에 발휘하고 있는 그녀의 부담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공략의 지휘를 도맡은 그녀는 플레이어의 죽음에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그에 반해 김하란은 거침이 없었다.
유서린의 광전사가 떠오를 정도로 막무가내식의 전투를 벌이는 그였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에 철저했다.
용병.
어지간한 피해는 무시한 채 적을 공격하고 또 공격하는 것에만 치중한 움직임은, 이곳에서 가장 난폭하면서도 빼어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수십에서 한순간에 불어나 수백에 달한 적들의 수는 기가 찰 정도였으니까.
김하란은 눈을 굴렸다.
한국인으로서 이들의 죽음과 고난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과 안위가 중요한 인물이었다.
따로 지킬 것이 있기에, 당장의 치욕과 모욕 또한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아직은 여력이 있었고, 플레이어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현혹당한 동료를 기절시키는 등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절하는 수가 늘어날수록 아군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쓰러진 아군을 지키기 위한 진형 역시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김하란이 보기에 지금은.
“유서린! 결단을 내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성기사의 높은 정신 방어력을 믿고 뛰어든 유서린의 검이 네 마리의 세이렌의 목을 갈랐다.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다급히 돌아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단 한 번.
경계를 서고 있음에도 놓친 단 한 번의 비수는 그야말로 심장을 파고드는 치명타가 되었다.
‘어떻게… 놈들이 은신을 사용하는 거지?’
몇 번을 되물어도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떠나 던전 내의 세이렌과 머맨은 단 한 번도 은신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모든 개체가 은신을 사용하는 건 아니야.’
그럼에도 은신이라는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벌어진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들은 마치 플레이어 같았다.
육체를 강화한 머맨이 선두에 서고.
일본의 플레이어들에게서 빼앗았던 무기를 든 딜러가 후위에 자리 잡으며.
보다 안전한 뒤편에서 세이렌이 저주를 흩뿌리는.
플레이어의 진형과 매우 흡사했다.
가각, 서걱!
유서린이 검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꽃이 튀더니 이내 무기와 함께 반으로 갈라진 머맨이 툭 하니 아래로 떨어졌다.
촤악-!
이따금씩 등장하는 은신한 머맨은… 그야말로 턱 밑에서 치고 들어오는 비수와 같았다.
김하란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 필요한 건 결단.
그것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빠른 결단이 필요했다.
“후퇴! 후퇴한다!”
진격만을 반복했던 한국 플레이어들은 상당한 사상자와 함께 처음으로 후퇴를 지시받았다.
유서린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지자 플레이어들은 쓰러진 아군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포위되지 않기 위해 조금씩 물러나면서 전투를 벌여 왔기에 다행히 퇴로는 확보할 수 있었다.
약간의 전투는 벌여야 했지만, 전면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이 없는 수준.
“젠장!”
땀으로 범벅이 되고 먼지가 묻어 새카매진 얼굴로 이진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형진은?”
“……X발!”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살점이 붙어 있는 목걸이 하나를 붙들고 눈물을 삼키는 동료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지옥의 형상에서.
이진수는 하늘이 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부서져 버린 방패를 버려 둔 채로, 동료를 부축한 이진수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 마리의 사자는 늑대들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비산하는 몬스터의 신체 부위와 터지는 마력.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굉음이 둘의 생존을 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황급히 퇴각하면서도 진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정도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나마 생존할 수 있었던 셈이었다.
조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던 이들의 부재에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그나마 건재한 몇몇이 퇴각하는 전면으로 달려 나가 포위망을 형성하려는 몬스터들의 전신을 베어 나갔다.
하늘을 수놓으며 쏟아지던 마법도.
시각을 앗아 가던 화살도 전부 사라진 채로.
모두는 퇴각에 집중하며 최대한 마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애를 썼다.
고작해야 3시간.
그동안 벌어진 전투는 그토록 처절했다.
뒤따르던 머맨과 세이렌들이 걸음을 멈춘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후위의 플레이어들 몇몇이 움찔거릴 정도로, 자신들을 노려보던 몬스터들이 긴 꼬리를 흔들며 방향을 틀었다.
“구, 구해야 해!”
“X발, 어떻게!”
목표는 명확했다.
유서린과 김하란.
도주하는 패배자들을 내버려 둔 채로, 두 명의 강자들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게 틀림이 없었다.
A급에 달하는 몬스터.
그것들이 수백이 모이자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플레이어와 몬스터. 그리고 던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급은 마력이 기준이 되었다.
머맨의 전투 능력과 행동력은 B급 이하.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 성장을 거듭한 머맨의 마력 등급은 A급.
A급 플레이어라면 그리 버겁지 않게 잡아내야 할 놈들이었지만.
“세이렌…. 세이렌!”
저주를 흩뿌리며 아군을 농락하는 세이렌이 가담하자 왜 이곳이 미해결 지역인지 모두는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낙관은 사라지고 충격과 치욕만이 자리했다.
촤아아악!
푸른 핏물이 재촉하는 신호처럼 허공에 퍼졌다.
“빨리 물러나. 그래야 도망치지!”
어깨에 큼지막한 상처를 입은 이사의 외침에 플레이어들은 아예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의 모두는 초인이었다.
기절한 동료를 둘러메고 달리는 속도는 빨랐다.
다행히 놈들은 더 이상 일행을 따라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두 명의 거인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을 할 뿐.
한순간에 조용해진, 반파된 도로 가운데에서.
“…….”
꽈득!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부상자들 치유하고, 기절한 놈들 저주 해제라도 걸어.”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이트 길드의 이사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누구도 반발하지 않은 채, 능수능란한 그의 지휘에 맞춰 부상을 파악하고 치유의 순서를 정하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미쳐 버리겠네……. 일본 놈들은 언제 온대? 그쪽도 이런 상황인가?”
“…모르겠습니다. 연락책도 없는 상황이라서…….”
“젠장!”
이사가 걷어찬 돌멩이가 파스스 가루로 변해 바람에 휘날렸다.
“이거 진짜 위험해.”
그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격변의 시대 직후 각성한 2세대 인물.
초창기의 전투에 합류하여 수많은 전투를 겪고 성장하여 거대 길드의 이사까지 도맡은 이였기에.
“외부에 이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이전에는 없던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몬스터의 움직임이 어떠한 사실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마력의 수치 이상.
미징후 던전의 지속적인 출몰.
던전 브레이크의 생성 가속화.
하나하나가 다 골치가 아플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었고, 나이트 길드 역시 그런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2팀으로 나누자. 1팀은 혹시나 모를 추격대를 저지하고, 2팀은 부상자와 함께 빠르게 전선을 이탈한다.”
선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약간의 잡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별이었다.
이진수는.
“그거 내놔. 내 거 부서져서 버렸으니까.”
2팀에 속한 탱커의 손에서 작은 방패 하나를 빼앗았다.
“2팀, 이탈.”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한 2팀을 보는 1팀의 눈가엔 주름이 잡혔다.
약간의 거리가 생기자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한 1팀은 마른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할 분위기로 주변을 경계했다.
긴 도로 한가운데에서 1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S급은 무시해. 둘만 있으면 도망쳐도 진작 도망칠 테니까. 문제는…….”
이사는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갈등으로 점철된 시야가 동쪽으로 향했다.
“일본이야.”
한국보다도 전력이 떨어지는 일본.
과연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그 상황에서.
“뭐 해요? 상황이 나으면 지원을 요청하고, 상황이 안 좋으면 지원해서 탈출해야 할 거 아니에요!”
이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