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일본 (3)
달무리가 진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
높은 빌딩 위에 선 사내는 조용하고 어두운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스윽-.
그런 사내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마중을 가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네.”
사내는 복면을 내렸다.
훤칠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하지.”
그렇게 말한 사내는 곧장 난간에서 한 걸음 허공을 디뎠다.
추락.
선 자세 그대로 추락하는 사내의 발끝이 허공의 어딘가를 디뎠을 때.
쩌적-.
비스듬하게 생긴 얼음을 타고 사내가 미끄러졌다.
스키를 타듯.
턱.
고층 빌딩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닥을 디딘 사내의 앞으로.
스으으-.
조용한 소리의 검은 중형차가 다가와 섰다.
문을 열고 탑승한 사내가 뒷자리에서 등을 기댔다.
‘선택은 했다.’
연락이 온 순간부터 사내는 모든 걸 결정해야만 했다.
어쩌면.
‘근간을 뒤흔들지 모를 거대한 일에 뛰어들었어.’
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분명히 뒤집힐 거였다.
‘…타국의 입장에 대해서 무언가를 결정할 줄은 몰랐다.’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하지만 조국이 저지른 범죄까지 사랑하는 이는 아니었다.
역사란 승자의 것이라지만, 승자조차 그릇된 역사 안에선 떳떳하지 못한 법이었다.
과거에나 모든 걸 지웠을까.
정보가 발달한 지금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아둔한 짓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사랑할 수가 없었다.
패배하더라도 떳떳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도 나온다고 하던가?”
“네. 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게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겠지.”
“…길드장님께서도 이미 판단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내렸지. …내렸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국이 아닌가.”
조국의 치부를 사방에 알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영웅으로.
어떤 이들은 배신자로 낙인을 찍을 터였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코웃음을 치며 조소를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패배자였다.
조국의 안전에 도움이 되고자 길드까지 만들어서 협회와 공조했던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변할 때까지 몰랐을까.
왜.
‘총리의… 이상함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았을까.’
사사키는 그 사실에 가슴이 저려 왔다.
차량은 조용히 도로를 달렸다.
사사키는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들었다.
총리의 명령에 따라 홋카이도에서 끝도 없이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런 것치고는 성장은 거의 없었다.
홋카이도에도 몬스터만의 영역이 많았다.
던전 브레이크의 후유증.
사람은 살 수 없으며 몬스터의 영역이 된 장소.
사사키에게 내려온 명령은 던전 브레이크의 처리.
성장은 막으면서도 위험도는 높은 장소가 대부분이었다.
던전 브레이크에서도 성장을 하려면 어쨌든 모든 몬스터를 없애고 던전처럼 클리어를 해야 하니까.
사사키는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한 시간 반이나 이동을 했다.
마정석이 발견된 이후, 그에 따른 사업에 영향을 받은 건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일본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실패했던 경험을 되살려, 재빨리 마정석 자동차에 집중했고.
나름의 성과를 보이며 초고속 전기차를 완성시켜, 도로까지 정비해 놓았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총리의 가장 큰 업적을 이용하는 게 그가 적대시하는 나라는 게.”
후유 길드의 사사키 후유.
에이엔 길드의 야마구치 유이.
카제 길드의 나카무라 안.
타이요우 길드의 모리 마사유키.
네 길드는 비밀리에 협력하는 사이였다.
당당하고 떳떳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협력자들.
사사키는 비밀리에 그들과 대화를 나눴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과거엔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며, 때로는 체제전복으로 불렸고.
혁명으로 분류되기도 하나.
사사키가 꺼낸 단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징벌(懲罰).
“도착했습니다.”
열차에 준하는 속도로 이동해 도착했다.
은밀하게 움직인 상황.
후유 길드원들이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끝도 없는 몬스터의 향연에서 몸서리칠 터였다.
차에서 내리는 사사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작은 상선에 올라타 섬으로 이동했다.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사키는 무거운 눈으로 내륙을 주시했다.
총리.
그가 있는 방향을.
* * *
앤드류는 넥타이를 고쳤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군.”
“지고 들어가는군요.”
로렌의 말에 앤드류가 피식 웃었다.
“지고 들어간다는 건 없어.”
“그런가요? 어차피 여긴 협상 테이블이 아닙니까.”
로렌의 시큰둥한 태도에 앤드류가 고개를 돌렸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정장의 모습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외딴섬.
쓰러진 나무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 것치고는 묘하게 계약을 앞둔 직장인과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왜 그러는 거지?”
앤드류의 말에 로렌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협회장님이 이렇게 고분고분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네의 충성심은 고맙지만 오히려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군.”
앤드류의 말에도 로렌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숙소로 찾아온 인물.
그를 통해 들은 대략적인 내용.
그리고 협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모든 건 내 판단일세.”
앤드류는 고민했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강세기로부터 시작한 의심.
그에 따른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호한 대답이 아닌.
“진실을 들을 수 있어. 그에 따른 이득 또한 내 역량에 달렸겠지.”
앤드류는 작금의 상황에 관심이 많았다.
이 판을 짠 이는 분명히 한국의 협회장, 바람술사(Wind Mage) 유지석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지석은 믿을 수 있어.”
“미스터 유가 굉장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뭐 때문에 그렇게 믿으시는 겁니까?”
이런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올 정도로, 로렌의 삼킨 말을 읽은 앤드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자네와 나의 차이가 아니겠나? 자네도 나와 같은 안목을 길러야 성공할 걸세.”
“…그 자리엔 관심도 없습니다. 협회장님처럼 살기에는 세상에 좋은 게 너무도 많아서요.”
“뭐? 하하하.”
앤드류가 즐겁게 웃었다.
어쨌든 상사의 태연한 태도에 로렌은 불만을 살짝 지웠다.
앤드류와 로렌.
그리고 앤드류의 경호원 셋.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경호원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경계의 태세.
“…플레이어입니다.”
경호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앤드류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갑자기 뚝 생겨난 것처럼, 일반인인 앤드류의 시야에도 잡힌 인물은 사내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복면을 써서.
‘닌자?’
닌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경호원의 선글라스 안쪽 눈동자가 반짝였다.
상대를 알아본 것이다.
“…사사키 후유. 일본의 A급 플레이어입니다.”
일본의 영웅.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등급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내.
“반갑소. 앤드류라고 부르면 되오.”
앤드류가 먼저 이름을 밝히며 천천히 걸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사이.
사사키가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사키 후유입니다. 반갑습니다. 앤드류 협회장님.”
짧은 악수를 끝으로 사사키가 일부러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뒤편으로 수하들이 나타났다.
둘.
그리 많지 않은 수에 앤드류의 경호원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의 상사 앤드류는 이 자리를 전혀 위험하지 않은 자리라고 밝혔지만, 경호원의 입장에선 아니었으니까.
누가 나올지 알 수가 없었고, 함정이 아니라는 확신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출발했고, 미리 도착했다.
“우리뿐이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앤드류의 말에 사사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늦는 모양이군요.”
“음…. 그렇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소리였다.
슬쩍 본 경호원 역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엔 사사키와 앤드류 일행뿐이었다.
“혹시 한 가지를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시죠.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같은 입장이라는 소리니까요.”
사사키가 줄곧 예의를 차리자 분위기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누구의 요청이었소?”
앤드류의 질문에 사사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이내, 앤드류의 두 눈엔 자신을 떠보는 의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사키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한국입니다.”
“음……. 같은 인물이겠구려. 자네와 나, 둘을 움직일 사람은 흔치 않으니.”
“그런가요?”
그렇게 말한 사사키가 고개를 돌렸다.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세군요.”
앤드류가 그 말에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정확한 답변을 들은 셈이었다.
“그렇구려. 유독 매서운 바람이오.”
앤드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같은 입장이라는 건 확인했고… 그래.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 자리까지 나왔소?”
가벼운 어투.
하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내용이었다.
어디까지 아느냐, 그것에 대한 질문이었으니까.
사사키는 앤드류의 질문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국의 병폐를 꼬집는 자리였고, 그 병폐를 도려내기 위한 자리였다.
매우 필요한 자리였고 순간이었지만.
‘이 자리가 일본인만의 자리가 아닌 게 너무도 가슴이 아프군.’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것에 사사키는 가슴이 무거웠다.
“그분께 모든 내용을 들었습니다. 총리의 폐단에 대해서…. 여차하면 나라를 뒤흔들 각오를 해야 한다고, 까지요.”
“으음…….”
앤드류의 눈빛도 무거워졌다.
“그대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던 사사키는 문득 자신이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어를 아십니까?”
“하하. 상당히 늦은 질문 아니오? 예전에 꽤나 유망한 헤드헌터였소. 나름대로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니, 편하게 대화를 하시오.”
“다행입니다.”
사사키와 앤드류는 가볍게 여러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20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사사키와 경호원이 일제히 반응했다.
“…설마.”
“왜 그러시오?”
“협회장님. 공간이동입니다.”
“공간이동?”
앤드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간이동.
한국과 같은 영토가 좁은 곳에서나 전국을 커버할 뿐, 공간이동의 거리엔 한계가 역력했다.
“…이건 일부러 알리는 겁니다. 이동하겠다고….”
사사키는 공명하듯 떨어대는 공간을 보며 말했다.
“으음… 일본에서 이 섬까지 공간이동이 가능하오?”
사사키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플레이어 외의 편의 시설에 대한 일본의 능력은 나름대로 뛰어났다.
하지만 공간이동은 아니었다.
공간이동진을 설치하는 건 엄연히 플레이어의 몫.
뛰어난 플레이어.
“그것도 마법사가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엔….”
마법사의 부재는 공간이동의 축소라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기에 이만한 거리를 뛰어넘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사람이라면.
“직접 온 것이오?”
바람술사 유지석 정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모두 집중하는 사이.
네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유지석은 아니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사키는 경계를 풀며 눈을 부릅떴다.
“…한정우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