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코드명, 헌터 (4)
“왔냐?”
“어. 근데 뭘 기대하냐?”
“…아, 이진수 플레이어. 진짜 놀랐잖아요.”
“어라? 그냥 걸어서 천천히 들어왔는데, 문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
“종이라도 달아 놔요!”
“그건 저 말고 정우한테 말해요.”
“……그런 말까지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받아서.”
“아하. 그러니까 돈 안 주는 저는 만만하시다?”
“아무래도요?”
“유 과장님 원래 이래?”
“어. 원래 그래.”
정우의 말에 이진수가 픽하니 웃었다.
“만만한 저는 나가 있을까요?”
“아뇨. 볼일은 다 끝났어요. 어차피 제가 이진수 플레이어도 관리하잖아요. 나가 있을 필요는 없죠.”
“참 고맙습니다.”
이진수가 이죽거리듯 농담을 건네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독특하시다니까. 유 과장님도.”
“이진수 플레이어도 그래요.”
“근데 여기서 제일 독특한 건 정우 아닐까요?”
“어머? 간만에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간만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거든요?”
“일주일이면 충분하죠.”
“한마디를 안 지네요.”
이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유아영은 그런 이진수에게도 서류를 넘겼다.
“김기태 팀장과는 할 만해요?”
“할 만해요. 그 형님이 원래부터 센스가 좋았으니까요.”
“영입을 시도했었다는 보고도 올라와 있어요.”
“와. 그걸 보고했어요? 여기 비밀도 없는 무서운 데구만?”
“이제 알았어요? 흐흐.”
유아영이 음산하게 웃었다.
질색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는 이진수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일이 너무 많네.”
“협회의 비애죠.”
“김 팀장과 합을 맞춰 본 후에 편수 형님과도 합을 맞춰라. 그러고 난 뒤에야 저 몸값 높아진 놈이랑 팀을 할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죠. 검증이라고 해야 할까요?”
“…경력직도 소용 없구만. 무섭네, 협회.”
유아영이 싱긋 웃으며 이진수를 향해 주먹을 들어.
“화이팅.”
응원했다.
“……잘못 온 거 같다, 정우야.”
“흰소리 그만하고 앉아.”
“자리, 비켜 줘요?”
“네.”
“…그럼 나가 봅니다.”
쾌활하게 굴었던 유아영이 마른침을 슬그머니 삼킨 후 자리를 비켰다.
익숙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정우 역시 예전의 모습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게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가끔씩.
‘…위압감? 아니면… 뭐라고 정의해야 하지?’
기이한 감각들이 유아영의 입을 툭툭 틀어막았다.
이진수에게 과장되게 행동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잉.
유아영이 나가자마자 이진수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눈치 보시네.”
“그런가?”
“어. 몇 살인지도 모를, 이계에서 온 내 친구여.”
“웃기고 있네.”
정우가 이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살살 친 거 아니었냐?”
“살살 쳤어.”
“…너 근력이 몇이냐? 그러고 보니 수치를 들어본 적이 없네? 왜 안 물어봤었지?”
“관심이 없었나 보지. 근력은 61이네.”
“…수치 괜찮네?”
“그래?”
“어. 너… 마법사잖아.”
이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봤자 작아서 조금 커진 수준에 불과했지만.
“마법 계열은 근력이 형편없어. 61이면 B급보다도 높을걸?”
“그래? 음. 난 다 60대인데?”
“하나도 빠짐없이?”
“그래 봤자 스탯이 네 개잖아.”
“…그렇게 평균적으로 성장할 수 있나? 신기하네.”
“음.”
갑작스러운 내용에 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던전을 공략하거나 빌런을 잡거나.
비율을 맞춰서 진행하지 않았음에도 거의 균형을 맞춰 성장하였다.
“정우야.”
잠시 생각하던 이진수가 은근히 물었다.
“너 예전이랑 비교하면 지금의 수준은 어떠냐?”
“처참하지.”
“그 정도야?”
“이계에서 난 신으로 불렸어.”
“뒤늦게 웬 중2병이냐. 하. 근데 그 정도 격차라면….”
“아직 멀었지. 빨리 강해져야 하기도 하고.”
“음. 네가 본 그 눈 있잖아.”
“어. 내 자리를 찬탈한 놈.”
“그래. 그놈. 그놈이 이쪽으로 넘어올 거 같아?”
“그것까진 모르겠어. 아직 나도 던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니니까.”
“멀티버스니 복사니, 별별 이야기를 다 했었잖아.”
“가정이지. 확정은 아니야. 대신에 그중에 하나는 분명할 거야.”
“차이가 크냐?”
“크지. 매우.”
정우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좋아. 그럼 강해져야지. 그런데 말이다.”
“음?”
“이게 사회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일인데 너한테는 별로 안 좋은 일이거든?”
“뭔데?”
“한국에 빌런이 별로 없어.”
정우가 피식 웃었다.
“알아. 그래서 대안도 마련했고.”
“뭔데?”
활발하게 움직인 정우의 손에 쓰러진 빌런의 수는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빌런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한국에서 은밀히 타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컨트롤 타워는 뛰어났지만, 범위는 좁았다.
타국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성장이 멈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마력 분해 장치를 팔 때, 조건을 넣었어.”
“헌터로 활동하게 해달라고?”
“맞아.”
“오! 머리 잘 썼는데?”
이진수가 감탄했다.
마력 분해 장치는 현재의 체계를 뒤흔들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마정석 분해 장치는 마정석을 작게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작은 크기의 전자기기 따위에 넣기 위한 작업들.
하지만 모든 분해가 그러하듯, 버려지는 부분이 생겼다.
마정석에서 버려지는 건 바로 마력.
보유한 마력의 누수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우가 만든 건 달랐다.
99%.
대부분의 마력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해의 형태에 따라서 크기만 줄이며 마정석의 마력을 대부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충격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물론, 지금이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각국의 플레이어 협회장과.
“협회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아주 커다란 기업밖엔 없지만,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고 하더군.”
비밀리에 보인 시연과 연구 결과를 본 그들은 그야말로 눈이 돌아가 버렸다.
“몇 가지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가격도 생각보단 저렴했거든.”
“얼만데?”
“한화로 천억.”
“…그게 싼 거야?”
“보다 낮은 효과의 일본 제품이 대여료만 일 년에 사백억이야.”
“엄청 싼 거구나.”
“그렇지.”
“와…. 그래도 천억이라니.”
“많지?”
“당연한 소리를 하냐.”
“그래서 말인데, 너네 집 이사했다.”
“……어? 뭐?”
“마음에 안 들기는 한데, 이승민도 이사했어. 일단은 우리 집 아래층인가 그럴걸?”
“갑자기 뭔 소리야?”
“대출금은 지금 집 팔아서 갚고, 나머지는 여유자금으로 삼촌 드리고.”
“한정우! 뭔 소리야? 네가 집을 왜 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정우의 그 말에 대꾸하려던 이진수가 멈칫했다.
눈빛.
그 속에 담긴 묘한 감정을 어쩐지 읽어 버린 듯해서.
“……그래. 고맙다.”
“그거 아냐?”
“뭐?”
“집 두 채를 구매했고, 내 대출금을 갚았는데도 통장에 돈이 안 사라지네?”
“…재수 없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안 가진다. 젠장. 대신에 갚긴 할 거야.”
“그럴 필요는….”
“난 플레이어로 갚을게. 네 앞은 내가 다 막아.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테니까… 악? 뭐야? 왜 때려?”
“맞을 소리를 하고 앉았으니까 그러지. 죽긴 누가 죽어?”
“아! 아악! 아파! 이 자식, 손이 왜 이렇게 매워?”
“더 맞아야 하니까 가만히 처맞아!”
연구실을 가득 채우는 비명과 고함과는 달리.
둘의 표정은 환하기만 했다.
* * *
‘진행한다.’
어두운 밤.
수풀이 우거진 산 중턱의 바위에 몸을 숨긴 이진수가 손짓했다.
강원도 태백.
높다란 산의 폐쇄된 광산이 이들의 목적지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빌런을 소탕했다.
그 결과, 빌런의 대부분은 해외로 도피했다.
하지만 모든 빌런이 해외로 도망간 건 아니었다.
여러 이유로 한국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놈들은, 정우를 피해 강원도로 도망쳤다.
강원도 태백의 광산으로 속속들이 모여드는 것을 확인한 정우는.
‘시작하자.’
빌런 소탕 작전을 진행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1팀에도 지원을 해둔 상태.
태백시에 모여든 플레이어의 수는 지원팀까지 합쳐 스무 명이 넘었다.
정우는 따로 길을 냈고, 그의 곁엔 이진수와 레베카만이 동행했다.
‘이번 집결지만 털면, 당분간 한국은 빌런 청정 지역이 될 거야.’
컨트롤 타워를 확인한 정우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빌런 청정 지역.
표현이 웃기지만 그 누구도 해당 단어에 웃지 못했다.
바라마지않는 순간이었으니까.
소수의 인원은 1팀과 이제 신설된 2팀에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
힐끗.
수풀 사이로 보이는 희끗한 움직임을 확인한 정우가 수신호를 보냈다.
노련하게 자리 잡는 이진수와 레베카를 본 정우가 지시를 내린다.
휘익.
정우는 검게 칠한 단검을 던졌다.
마법으로 단검의 소리를 죽이고, 염동으로 방향까지 조절한 단검이 은밀히 날아.
푹!
“……큭?”
은신한 채로 주변을 경계 중이던 놈의 목을 그어 버렸다.
어느새 다가간 레베카가 목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놈을 끌어다 숨겼다.
턱.
이진수가 그녀를 보호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은신을 쓰는 건 비단 적뿐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압박을 가하며 셋이란 숫자를 죽였을 때.
삐이-익!
폐광 안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야!”
앞서 진행하던 이진수가 숨죽여 소리쳤다.
순식간에 파악을 마친 정우가 입을 열었다.
“레베카. 오른쪽이다.”
“앞장설게요.”
평소의 대검 대신 얇은 세검을 든 레베카의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파앙!
공기를 밀어내듯 바닥에 움푹 발자국을 찍으며 쏘아지는 레베카의 돌진.
“으… 또 먼저 가네.”
이진수 역시 돌진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둘을 본 정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마력을 읽었다.
공기처럼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읽은 정우의 눈이 번쩍였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적의 뒤편에 도착해 있었다.
“매직 미사일.”
나지막한 중얼거림.
쉼터였는지 그럭저럭 커다란 공동에서 입구를 향해 각자 공격을 준비하던 이들이 뒤늦게 반응했다.
“헉! 뒤, 뒤다!”
“X발, 저 새끼. 헌터다!”
코드명 헌터.
빌런 사이에선 유명해진 인물.
모든 이들이 정우를 향해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죽여 버려!”
“저 새끼만 죽이면 돼!”
정우를 피해 모인 인원치고는 공격이 꽤 강력했다.
매직 미사일이 파훼되는 것을 보며 정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에어 돔.”
공동을 가득 채우는 공기.
“운디네.”
정우의 부름에 나타난 물의 정령이 에어 돔의 안쪽에 무지막지한 물길을 쏟아 냈다.
“…이, 이게 뭐야!”
“정령?”
철벅.
금방 바닥이 축축해지자, 빌런들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정우는 단번에 이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전격, 냉기, 공기.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힐끗.
그의 시선은 오히려 놈들의 등 뒤로 향했다.
통로에서 느껴지는 감각.
빠르게 쇄도하는 그것을 느끼자마자 정우는 에어 돔의 일부를 해제했다.
화악!
그 순간, 번쩍이는 선이 놈들의 등 뒤를 수놓았다.
“아, 아악!”
“뒤, 뒤쪽에도 적이……!”
“젠장! 방어해!”
레베카의 공격.
뒤를 이은.
“으라햐!”
이진수의 물소 같은 돌진에 빌런들은 우후죽순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미 고위급 빌런은 해외로 도주한 지 오래인 상황.
여기에 모인 이들은 정우 한 명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이들이었다.
둘은 빌런을 무력화시켰고.
정우는 쓰러진 놈들의 목숨을 전부 끊어 버렸다.
시체만이 남은 장소에서.
“사자 부활.”
또다시 빌런의 시체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