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코드명, 헌터 (2)
순백의 공간에선 연신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치이익.
무언가가 타는 듯한 소음과 매캐한 연기가 뒤따랐지만.
달그락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일반적인 연구실과 비슷했다.
여러 기구와 기계.
새하얀 복장으로 보안경 같은 것을 쓰고 태블릿에 이런저런 내용을 기재하는 모양새였다.
다만 연구실 안의 연구원은 한 명뿐이었으며.
새하얀 연구실 사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마법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
연구실 전체를 가득 채울 만한 마법진은 대마법사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연구실의 주인은 대마법사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공로조차 다른 팀에게 돌리며 연구와 훈련, 던전 공략과 빌런 사냥에 매진하는 이.
“왕님. 이건 이 정도만 조절하면 될까요?”
“…하아. 레베카. 그런 이상한 호칭은 좀 그만두면 안 될까?”
정우는 머리를 짚었다.
도움이 필요해 부른 레베카는 이지스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다만 억눌렸던 평소의 모습이 이따금씩 드러났는데.
“어때서요? 편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익숙해진 그녀는 정우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왕님이라는 괴상망측한 칭호로.
“…마음대로 해라.”
“드디어 항복이네요!”
주먹을 불끈 쥐며 반색하는 레베카의 손아귀에서.
쨍그랑.
주르륵.
“……레베카.”
병이 깨지며 담겨 있던 액체가 바닥으로 흘렀다.
“히익. 그, 금방 치울게요, 왕님.”
“치우는 건 나중에 하고. 맙소사. 하필이면 ‘라일 액체’네.”
“라일… 라일? 헉! 라일이요?”
중얼거리던 레베카가 화들짝 놀랐다.
라일 액체.
마법진을 다루다 보면 필요한 여러 물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이 스킬에 한정적인 능력을 발휘했기에 이계의 수준을 따라잡기란 상당히 요원한 일이었지만.
이계의 지식을 어느 정도 떠올린 정우는 예외였다.
그렇기에 지구에선 사용하지 않는 ‘라일’이라는 몬스터의 피를 정제하여, 마법진에 적합한 약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거, 희귀하다면서요.”
“희귀하지. …매우.”
그렇기에 현시점엔 매우 귀한 물건이 되었다.
이계에서도 드문 몬스터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서식지를 발견하고 관리하면서.
“그땐 조절을 했다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아무래도 몬스터는 던전에만 등장하니 말이야.”
“죽여 주세요.”
털썩.
레베카가 주저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죽일 것까지야…. 던전을 섭외해 보면 되겠지.”
아까운 마음을 버린 채 정우는 다른 실험에 착수했다.
‘라일이라…….’
라일의 값어치가 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보다 중요하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곧 나올 시간이군.”
“……뭐가요?”
의기소침해 있는 레베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네 신분패.”
“아……!”
그래도 기대가 되는 모양인지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젠… 던전도 도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려면 실력을 더 키워야 할걸?”
“…윽.”
레베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실력은 A급.
정우와 비슷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나머지 힘의 활용도는 일반적인 플레이어보다 떨어졌다.
특히나 그녀의 능력은 아라크네 때문인지 대인전보다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것도 너보다 커다란 놈을 상대로 한 전력밖에 없으니까,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지.”
“그래도… 마법사를 상대로는 전적이 괜찮아요.”
“플레이어와 마녀 일족은 능력 사용법 자체가 달라.”
“플레이어는 시전이 빠르고 효과적이나 단순하고, 마법사는 시전이 느리나 강력하고 효율적인 사용이 가능하고요.”
“잘 기억하고 있군.”
“그럼요. 저도 이제 플레이어니까요.”
풀이 죽었던 표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자신이 쓸모가 있는 장소를 찾았다고 해야 할까.
‘나쁘진 않지. 적응력이 빠르고 판단력도 훌륭하니까.’
이미 몇 번이나 빌런을 잡을 때 동행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등급의 빌런들을 상대하면서 경험을 쌓은 레베카는 썩 나쁘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다만 기억을 되찾은 후유증이랄까.
‘어지간해서는 만족스럽지 않단 말이지.’
친우들의 실력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상으로 보았던 S급의 실력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이들.
‘대마법사나 바람술사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처지진 않아.’
S급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이들의 수준과 비교하면.
“나 왔다!”
모두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왔냐.”
“레베카 씨 표정은 또 왜 이래? 뭐 잘못했냐?”
“…아. 잊어가고 있었는데.”
이진수의 말에 원망과 자책으로 고개를 떨구는 레베카였다.
“네가 더 나쁜 놈이다.”
“내가 뭘?”
이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우는 그런 그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찾아왔지?”
“김 플레이어 만나서 받아 왔지. 녹초가 다 됐던데?”
“아직 부족해.”
“…징하다. 징해. 그만큼 하는 것도 악착같은 거야. 내가 널 봐온 세월이 얼만데….”
이진수가 혀를 내둘렀다.
정우는 친구의 말 중 ‘세월’이라는 단어가 새삼 마음에 걸렸다.
그날 이후.
정우는 이진수와 시간을 가졌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모든 것을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부분은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말한 전적도 있었고.
무려 세 시간 동안 이진수와 대화를 나눈 정우의 표정은 다소 풀렸었다.
전생이라고 다를까.
지금의 정우는 이진수의 친구였고, 한 가족의 장남이었으며, 플레이어였다.
이계의 지식을 되찾았다지만 정우가 가장 우선하는 건 여전히 아버지의 구출이었다.
차라리 그 방법에 더 다가갈 수 있는 지금이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표정을 읽은 이진수가 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생각에 정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 뭐부터 하면 되냐?”
짝, 박수를 친 이진수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지.”
“뭘? 아! 던전?”
끄덕.
내용을 알아들은 레베카가 눈을 빛냈다.
“플레이어증 건네 줘.”
“아참, 레베카 씨. 여기 이거 받아요.”
이진수가 품에서 플레이어증을 꺼내 건넸다.
“이거면 저도 던전에 들어갈 수 있나요?”
“없어도 가능했을걸요?”
“에? 그럼 왜 그전에는….”
“말은 똑바로 해. 없으면 못 들어가. 앞에서 막을 거거든. 몰래 들어가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그렇군요. 여기에 적힌 A가 등급인가요?”
“맞아요. 참나. 이거 몇 달 만에 갑자기 짐짝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야.”
“……착각은 아닌 거 같은데?”
이진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호위라며 데려온 레베카와 함께 유서린을 찾았을 때를.
유서린은 레베카의 재능을 확인했고, 몸소 부딪치며 확인을 마쳤다.
그리 우락부락하지 않은 두 여인의 전투는 예상외로 격렬했고, 파괴적이었다.
도끼를 사용하는 유서린과.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대검을 사용하는 레베카의 격돌.
이진수는 둘의 전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자는 당연히 유서린이었다.
레베카는 상당히 분개하며 전의를 불태우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푸딩 하나에 무장해제 되어 버렸지.’
전투가 끝난 뒤, 유서린과 꽤나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버렸다.
푸딩을 주고, 받아먹으면서.
‘문제는 레베카 씨가 아니야. 저놈. 진짜 달라졌어.’
유서린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레베카에게서 항복을 받아 냈던 그녀는 그대로 눈을 돌려 정우를 불렀고.
정우는 그녀의 호출에 기꺼이 응대했다.
승자는 여전히 유서린이었지만.
끝도 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마법과 공간이동.
그리고 염동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그녀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넌 그 징벌의 처녀에게 감탄사를 받아 냈잖아.”
“그야 기억 때문이지.”
“…후우. 이해는 한다만 여전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뭐가?”
“너. 기억을 찾은 이후로 뭔가 더 쉴 틈이 없어졌거든. 그전에도 그랬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 절박해졌다고 해야 하나?”
연구와 훈련, 사냥과 공략만 진행하는 정우를 떠올린 이진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잠은 자냐? 나 왜 너 자는 거 한 번도 못 본 것 같냐?”
“자고 있어.”
“…진짜지?”
“그래. 사람이 안 자고 어떻게 버티냐?”
“그렇지? 그래. 자면서 살아야지.”
이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정우가 수면을 취하는 건, 회랑 안에서였다.
회랑에서 수면을 취하는 건, 실제로 수면을 취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엄청난 시간의 차이.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서 또다시 지식을 탐구하였음에도, 현실의 시간은 채 10분이 흐르지 않았을 정도였다.
회랑에서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시간의 차이는 줄어들었지만.
‘시간의 축을 비트는 힘이 부족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여러모로 아직은 부족한 게 사실이었지만, 효과는 지대했다.
‘다행히 회랑 안의 책, 80%는 다 읽었어.’
현실의 시간이 고작해야 열흘이 흘렀을 뿐이다.
각성하고서부터.
상당히 짧은 시간.
‘시간과 정신의 방 같은 느낌인데… 이 개념을 조금 더 잡고 싶군.’
회랑의 기록에는 굳이 열람이 필요 없는 여러 기초지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래도 모든 걸 다 읽어 보긴 할 테지만….’
회랑의 용도가 애매해지는 순간이 머지않았다.
정우는 그 사실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아쉬워. 생각보다 기억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었는데….’
회랑 덕분에 얻은 기억이 몇 개 더 있었다.
큰 도움이 안 되는 소소한 기억이었지만, 기억을 얻을 때마다 늘어가는 간접 경험과 여러 지식들은 분명히 달가운 일이었다.
“아, 김미연 플레이어 있잖아.”
“어.”
“그만 좀 굴려. 사람이 아주 초췌해졌던데?”
호오, 정우는 속으로 음흉한 눈빛을 보냈다.
‘이것 봐라?’
“…너 지금 뭔 생각하냐?”
“응? 그렇게 힘들었나? 이런 생각?”
“그래? 음…. 아무튼 작작 시켜. 자칫하면 내가 너 뒤치다꺼리할 것 같아.”
“싫어?”
“…끄응. 아니, 그건 아닌데….”
“너 돌아갈 곳도 없잖아.”
“……!”
이진수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나이트 길드의 유망주.
B급 플레이어가 된 그는, 짧은 고민 끝에 망설임 없이 나이트 길드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막대한 위약금이 발생했지만, 나이트 길드의 길드장이 모두 처리해 준 상황.
그로 인해 협회에서 소소한 이득을 얻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중요한 건 별다른 제재 없이 길드를 탈퇴하여 협회로 이적했다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진수는 정우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정우와 같은 팀.
모든 성과는 1팀에 포함되는, 숨겨진 1팀.
대외적인 시선 때문에 다른 번호를 사용하지 않은, 한정우만의 팀.
이진수는 그 팀의 일원이 되었다.
“…정우야. 나 이진수야.”
“알아. 지금은 내 팀의 일원이지.”
“…….”
“얼굴 풀어. 그나저나 던전, 구해졌지?”
“능글맞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어. 구해졌어. 확실히 협회가 좋긴 좋아. 던전도 딱딱 구하고.”
“그만큼 길드에 배려도 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이 던전은 왜 들어가려고 하는 건데?”
“말했잖아. 지하 유적에 가보겠다고.”
“잘 판단해야 해. 유사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길이 없으면 결국 게이트가 안 생겨. 마찬가지로 위에서 모든 몬스터 다 잡았는데 지하에 들어가기 전에 게이트가 생기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음. 진짜로 내가 같이 안 들어가 봐도 되겠냐?”
“어. 마력억제제 쓰면 되긴 하는데, 이번엔 나 혼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끄응. 그래. 알았다. 요즘에 널 보면 알아서 다 잘하는 거 같아서… 안심이 안 되면서도 되네.”
“모순이군.”
“그래. 모순이지. 그럼 네가 바꾸면 되겠네.”
“안심만 시켜라?”
“어.”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의 눈빛에 정우는 볼을 긁적였다.
“…글쎄.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