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헌터 (1)
매번 강해지겠다고 다짐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은 정우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혀를 찼다.
“…아직 부족하군.”
그의 말에 이지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나… 참 어이가 없구려.”
이지스의 결정은 성공적이었다.
다니엘.
이지스는 분명히 청탑의 마스터이자 한 도시의 영주인 그에게 열쇠를 건넸다.
회랑의 열쇠가 정우의 아공간에서 등장한 것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란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고 이지스가 얼마나 놀라워했는지.
신이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강렬했던 다니엘의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이지스는 정우의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하기야… 우리 세계가 어떤 꼴일지 알 수 없으나, 왕이 온전했다면 이토록 무자비하진 않았을 거요.”
그는 다니엘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는 건 적었고, 접점은 부족했지만.
무려 <신이 된 사내>의 저자인 이지스였기에 나름의 감상은 충분했다.
그 결과.
정우는 이계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기억을 되찾는 것.
그건 중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구하는 거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우선 순위였다.
정우는 스스로를 다니엘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한정우.
지구의 부모가 지어 준, 자신을 뜻하는 이름.
때문에 정우는 이지스의 질문에 너무도 간단히 대답할 수 있었다.
다니엘인가, 한정우인가 하는 그 질문에.
“중간이 없다는 게 아쉽소. 분명히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은데….”
이지스는 정우의 말에 무한한 관심을 보였다.
마녀 일족 특유의 호기심이 솟구치는 듯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과 사건을 기록하고자 노력했던 마녀였기에.
이지스는 새로운 책의 집필에 무지막지한 관심을 보였다.
더불어 자신에게까지.
“아직 소득은 없나?”
“없소. 참 아쉽구려.”
정우는 회랑이라는 보고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모든 아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때문에 이지스와 예전에 대화를 나눴을 당시, 회랑과 현실의 시간 축이 살짝 비틀려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여덟 시간에 달했던 접속이 끝났을 때, 지구에서의 시간은 고작해야 2초가 흘렀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흐름이었고, 말도 안 되는 격차였다.
1일 1회의 접속 제한은 여전했지만, 활용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다만.
“시간의 축이 어디서 나왔는지 제대로 알면 좋을 텐데….”
“마찬가지요. 왕이여. 우린 그런 걸 들어 본 적조차 없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거지.”
“던전의 법칙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오.”
“그만한 힘을 아무런 대가 없이 얻었을 리가 없지. 더불어 또 존재할 리도 없고.”
“던전과 이계의 관계를 알아보기엔 적격이구려.”
“회랑에서 그에 따른 정보를 찾는다면 말이지.”
“……으음.”
이지스가 수염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니오?”
이지스가 턱짓했다.
반파되어 있는 뒷동산.
아라크네가 머물렀던 동굴에서 멀지 않은 장소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마법이 연이어 번쩍였으니까.
“부족하지.”
“그러시오? 당시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불과 얼마 전의 왕과는 천지 차이 아니오?”
“그래도 이건 없애기 어렵더군.”
정우가 상체의 인장을 툭툭 건드렸다.
“흐음.”
제물의 인장.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니, 성물만 구하면 충분히 없애지 않겠소?”
“없앨 수 있겠지.”
무려 S급 이상의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가 필요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정우는 따로 믿는 구석도 있었다.
‘각인은 저주와는 달라. 그렇기에 저주 해제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내게는 마력의 흐름을 각인하는 능력이 있다.’
인장의 마력 패턴을 역해제하여 파악하든, 정반대의 아티팩트의 능력을 접하여 그 패턴을 각인하든.
무엇 하나만 하면 시간문제일 뿐, 각인의 해제는 어렵지 않았다.
“그 무엇 하나가 문제구려. 생각보다 지구엔 다양한 성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
아티팩트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것들은, 하나같이 전술핵 이상으로 취급되어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도 있겠지만, 제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때때로 밝힌 것들도 많았다.
불행히도 그것들 중에서는 원하는 물건이 없었다.
“차라리 이걸 강화시키는 게 낫지.”
“지팡이 말이오?”
의외로 각인 해제에 필요한 기초 능력은 정우의 손에 있었다.
바로 지팡이.
그것에 달린 첫 번째 스킬.
“정화를 보다 강화시키면 아무래도 ‘성화(聖化)’도 가능할 테니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왕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겠소.”
“다니엘이라서?”
이지스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소. 모든 게 납득이 될 만큼.”
“더 멀었군.”
스스로를 본 정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충분하오. 왕이여. 우리가 만나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시오?”
“이제 8개월 정도겠지.”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 보시오?”
정상적인 성장이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심지어 마력 수치조차 능력에 비해선 현저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정우는 물론, 이지스도 확신했다.
이틀의 시간.
고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그 시간이.
“왕은 완전히 바뀌었소. 이전엔 단 한 번이라도 내게 닿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날 뛰어넘는 게 목표가 아니오?”
“넘기가 어렵군.”
“나야말로 자괴감이 드오. 연이 닿았다고는 하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 생각했던 이가… 오히려 내가 원하던 인물이었다니 말이오.”
가슴을 졸일 정도로 방법은 불안했지만, 자신들을 구한 이는 분명히 한정우였다.
“걱정 마시오. 왕께서 더 성장하면, 우리 모두가 다 왕의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오.”
* * *
“대체 어디 갔었어요?”
유 과장이 달려와 물었다.
어찌나 격하게 달려온 건지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공부는 끝난 건가요?”
“그게 중요해요? 지금 난리가 났었는데?”
정우의 말에 유 과장이 눈을 흘겼다.
“얼른 따라와요.”
대뜸 정우의 손목을 잡고는 재촉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대장이군.”
“대장이요?”
“빌런 전담팀의 대장이니까요.”
유서린의 집무실 앞이었다.
“들어와요.”
기척을 느낀 건지 문 너머 유서린의 말이 들렸다.
정우는 유 과장과 눈을 마주치고선 집무실로 들어갔다.
훑어보는 유서린의 시선이 정우의 눈을 관통했다.
‘감별이라.’
“……!”
흠칫.
유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킬이 제대로 안 먹혀.’
그녀는 소파에 앉는 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살자를 잡았어요.”
그런 그녀의 귀에 정우의 말이 들렸다.
“…그랬군요. ……에?”
뒤늦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물게 얼빠진 소리.
여러모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비서 유 과장은 정우를 추궁했다.
“도살자? 제가 아는 그 도살자 맞는 거죠?”
“언제, 어떻게? 한정우 씨 수준으로 어떻게 도살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거죠?”
“엑? 얼마 전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월급엔 조금도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았네요.”
“……너무 대놓고 기도하는 거 아니에요?”
유 과장이 질문을 던졌고, 정우도 차분히 대답을 했다.
그러는 사이 혼란은 가라앉았고, 어느 정도 정보도 모으게 되었다.
‘그 빌런 시체도 한정우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사관들이 보내온 전투의 흔적과.
“일치한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믿기가 어렵군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럼 뭐가 중요하죠?”
정우가 유 과장을 힐끗 보았다.
“크흠. 건강한 모습을 봤으니 일단 나가 있을게요.”
눈치 있게 유 과장이 물러나자 정우가 상체를 기울였다.
“덧씌우기. 방법을 알아냈어요.”
“……!”
유서린의 눈이 커졌다.
덧씌우기는 유지석과 유서린 모녀가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이었다.
제임스 밀러와 통화까지 하며 여러 사안에 대해 토론을 진행했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정우의 말을 듣자.
“……이, 이건 예상보다 더 심각하네요.”
단순히 타인의 마력을 덧씌운다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박쥐의 손아귀에서 구해 낸 사람들 중 대부분은 목숨을 건졌다.
김훈만큼 빠르게 정신을 차린 이가 없었지만, 이제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한편.
빌런과 뱀파이어의 연관 관계가 확정되었다.
피와 지문 등 여러 정보는 김훈과 일치했다.
간략한 취조 섞인 대화에서도, 미리 기록된 내용과 다른 부분은 전혀 없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바꿀 수 있는 거지? 도살자는 흑인에 거구고, 김훈은 한국인에 그리 커다란 덩치도 아니었어.’
키와 근육, 몸무게와 인종까지.
모든 것들이 달랐다.
하지만 모든 데이터는 김훈이라는 인물의 진위 파악에 실패했다.
데이터가 잘못되었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진짜로 김훈의 데이터를 사용했든가.
유서린의 질문에 정우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도플갱어. 그것이 나오는 던전을 찾아야 해요.”
“…도플갱어?”
처음 듣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개념만큼은 인간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존재가 아닌가.
그녀는 어렵지 않게 도플갱어의 특징을 떠올렸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도플갱어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거죠.”
인장과 비슷한 것을 떼어 내는 순간, 김훈은 도살자가 되었다.
정우는 그 순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김훈이란 존재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인형 탈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찾을 수 있죠?”
“제임스 밀러에게 연락을 취해서 자료를 받아요. 형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인장이 있어요. 덧씌우기. 놈들은 ‘오버레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장이 단서예요.”
“아니. 한정우 플레이어. 그 인장은 이미 파악이 끝났어요.”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직 주변에 있다?”
“당연하죠. 마법이든 스킬이든. 아니면 아주 간단한 염색이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놈들은 그 인장을 숨겼을 거예요.”
“아무래도 고위급 인사를 주로 봐야겠군요.”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오랜 시간 동안 요직에 몸담은 이들은 탐색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정우에게 말했던 그녀는, 그의 답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장 보고를 내렸다.
빌런 대책반 2팀.
그들이 적임자였다.
“대외적으로는 그들이 1팀이에요.”
“차라리 그러면 절 5팀이나 10팀쯤에 배정하는 게 낫지 않았어요?”
“내부적으로는 다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유서린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급한 일을 진행했다.
그러면 남은 건 호기심과 의문뿐.
“마력이 얼마나 성장했죠?”
“9예요.”
“A급과 B급의 빌런을 잡았는데도 숫자는 별로 안 늘었군요.”
정우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리고 그런 것치고는 많이 변한 것 같고요.”
“그런가요?”
유서린은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정우를 주시했다.
여전히 스킬은 애매하게 작동했다.
S급 플레이어에게도 통했던 스킬이었다.
‘내 스킬을 방해할 만한 능력을 얻은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하는 정우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검증부터 하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