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99%의 기억 (3)
“…너, 너……!”
경악에 가까운 표정.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
아니, 익숙한 게 있었나?
와락 달려와 안기는 몸은 가볍고 작았다.
움찔.
그래서 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격정이라는 생경한 감정으로 떨며 울고 있는 이 암컷을 죽여 버릴 뻔했기에.
벗어났다.
모든 걸 끝냈다.
마지막 근원은 없애지 못했지만, 더 이상의 균열은 막아 냈다.
이제 이동하자.
그런데 어디로? 어떻게? 왜?
모르겠다. 하지만 이동하자.
평화로웠던 것 같다. 평화가 뭐지?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 그런 게 있어?
움직이지 마. 반응하지 마. 죽여선 안 돼. ……그런데 왜?
난…… 모든 걸 없애야 했는데?
“……이상해.”
“이상할 수밖에 없어. 5년이야.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알아? 멀쩡히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반년이라며!”
“……그, 그만큼 힘들었다는 소리? 흑. 내가 다 슬퍼.”
“육체 개조를 끝냈어야 했어!”
“가능은 했고?”
“……일단은 쉬게 해. 우리도 그럴 때 있잖아. 쉼 없이 전투를 벌이고 나면 그 감정에 휩싸여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걸리던 거.”
“너나 그렇지. 찢어 죽이는 걸 좋아하는 야만인이니까.”
“…야!”
“조용히 해! 지금 무슨 짓이야. 아무리 멍청이라도 핸리 말이 맞아.”
“멍청이? 이 자식들이!”
“시끄러! 이 꼬맹이들이 어디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른 카심이 개입하고서야 소란은 잠잠해졌다.
조용해지자 우울함이 감돈다.
무려 5년.
반년 안에 모든 걸 끝내고 돌아오겠다던 친구이자 자신들의 주군은, 무려 5년이나 지나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감정을 잃은 채로.
“엘렌.”
“말하시오.”
“상태 이상, 치유…. 모조리 다 해.”
“이를 말이오. 걱정 마시오.”
“좋아. 해산하지.”
11인의 원탁 회의.
다니엘이 사라진 이후로 지속되던 회의가 끝났다.
“‘그 자식’은 여전해?”
회의가 끝난 뒤 안나가 날 선 투로 물었다.
소드 마스터이자 용병대장이었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렸다.
칼자국이 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 안 나온 거 보면 알잖아?”
“빌어먹을!”
안나가 화를 냈다.
엇나가기 시작한 한 놈이 마음에 걸렸다.
다니엘이 도시를 완성시킨 이후부터 줄곧 신하의 예를 지키던 한 놈이.
“왜 그러는 거야? 진짜로!”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바꿨다.
“여전히 자리에 없어?”
“없어.”
“네가 못 찾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나라고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우리 도시를 제외한 나라도 존재하고. 몬스터가 가득한 오지도 많지.”
“완전히 굴복시켰어야 했어.”
“누굴? 그 녀석을?”
아이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었던 놈이야.”
“…그래서 말하는 거야! 다니엘. 너무 물렀어.”
“희한하네. 네가 가장 다니엘의 편에서 입을 놀렸던 거 아닌가?”
“아, 씨! 몰라. 지금은 그냥 그래.”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다니엘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위험하지.”
여태껏 버틴 게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오만했고.
그 오만이 오만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과거엔 숭배를 받았던 존재였으며, 반신이라고까지 불리던 자들의 로드였으니까.
“신경 써서 관찰해야 해. 혹시나… 딴마음을 먹은 거라면… 우리가 먼저 막아야 해.”
“으음. 결국 다니엘의 상황이 문제군.”
“내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볼게.”
“그래. 너만 믿지.”
마지막으로 아이작까지 물러나자 회의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안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서늘한 눈빛.
무미건조한 감정까지.
과거 전기에서나 등장하던 영웅의 면모를 보이던 이의 변화는 그녀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다니엘. 제발, 내가 알던 사람으로 돌아와.”
모든 걸 다 들었다.
소란도.
감정의 혼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는 이런 힘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이런 게 가능해졌다.
원래 불가능했던 것은 맞을까?
모르겠다.
모든 걸 다 모르겠다.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의 안쪽이 간질거렸다.
병에 걸린 건가? 아니면 균열 속에서의 상처가 도진 건가?
웃긴 일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가만히 누워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아니, 몇 초나 되었을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난, 무엇을 믿고 그리도 자신만만해했었던 걸까?
그곳은 지옥이고.
내 힘조차 통하지 않던 절망이었다.
많은 걸 버리고 많은 걸 습득했다.
해석하면 할수록 수많은 것들을 내던져야 했다.
이제는 무엇을 내던진 건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것들을 버렸다.
무엇을 버렸지?
그리고 무엇을 얻었지?
아무리 자문자답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이곳을 만든 걸까?
저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이곳을 만들었던 것 같은데….
5년이라.
그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건가?
얼마나 겪었었지?
균열에 입장을…… 내가 언제 했더라?
일만 년까지는 센 것 같은데…… 그 후로 얼마나 더 지났었던 거지?
모르겠다.
또 모르겠다.
하지만 왜 시간이 차이가 나는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그게 유지가 된 거지? ……왜.
아, 그래.
이젠 내 영혼에 각인된 거구나.
시간의 축이.
* * *
“허억!”
-주인… 님?
“왜, 왜 그러세요?”
입을 쩍 벌리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정우를 향한 걱정이 쏟아졌다.
정우는 숨이 턱턱 막혔다.
감정의 편린이.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장악하여 아래로 끌어당겨 버렸다.
잠깐 느낀 감정.
그 무미건조하면서도 두려워하던 감정이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대체…….’
정우는 혼란스러웠다.
회상으로 본 것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균열이라니.
“……게이트.”
“게이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게이트라니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의 게이트라니.
“…이계. 그 세계에도 게이트가 있었어.”
레베카는 입을 다물었다.
자세하게 질문해 줄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세계에 게이트가요? 기억을 더 찾은 건가요?
지구의 것과는 달리 이계의 것은 나무뿌리와 같았다.
단편적으로 본 상황이었지만, 근원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여러 줄기가 세상 전역을 뒤덮을 것처럼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기억을… 더 찾았지.”
분명히 기억을 되찾았다.
하지만 찾은 건 기억이 아니다.
감정.
‘……감정이야.’
안나를 비롯한 여러 친우들.
자신이 건설한 유토피아.
웃음을 잃지 않던 도시민까지.
긍정적이며 밝은 감정이 한순간에 매몰되어 버렸다.
만 년.
시간의 축을 비틀어,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간 다니엘은.
인간성을 상실해 버렸다.
‘…그 뒤를 모르겠어.’
강렬한 감정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토록 허무할 수 있는지.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
정우는 잘게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회상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을 정도로.
그 정도로 감정은 강렬했다.
‘……무엇일까.’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왜 그 끝에.
양손이 묶이고 양발이 잘린 채 패배자에 형태로 쓰러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감정을 잃었던 상황에서.
‘다시 감정을 되찾았단 말이야.’
종말의 순간에서 든 건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모든 것들을 없애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걱정했다.
그 감정은 본래의 자신의 것이었다.
익숙하고 친숙한 얼굴의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크게 자리했던 것은, 덧없이 스러진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어떻게 감정을 되찾은 건지 궁금해졌다.
일련의 과정.
그 부재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 회상의 법칙에 대해서는 알겠어.”
새로운 기억.
변한 건 기억뿐만이 아니다.
“회상의 법칙?”
-어떻게 진행이 되는 건가요?
“정보를 접하는 것. 그게 회상이라는 능력의 발동 조건이다.”
-……!
메아리와 레베카의 시선이 부딪쳤다.
정보.
기록.
무수한 목격자 메아리라는 존재와.
지식의 보고, 회랑의 소유권을 지닌 마녀라는 일족.
둘 다 회랑의 조건에 부합하는.
“맞아. 너희 둘. 어쩌면… 그 이전의 내가 계획한 것일 수도 있겠어.”
더없이 적합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장.
‘계획한 거다. 예전의… 내가.’
* * *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정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도살자를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꿈틀거리는 볼의 근육이 메아리의 능력에서 벗어날 것처럼 보였다.
정우는 아공간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멍한 눈빛이 이내 선명해질 찰나.
도살자는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부릅 눈을 뜨며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반응은 빨랐지만.
이미 준비를 끝마친 정우의 손길은 신속했다.
어둠이 베어진다.
마치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서걱!
뒤로 물러서며 마력을 끌어 올리려 준비하던 도살자의 몸이 휘청거렸다.
왼손으로 목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어 버릴 것 같았기에.
치밀어 오르는 통증.
순식간에 온갖 상념이 떠돌아다니는 정신.
울컥 솟구치는 피를 틀어막으려고 노력하던 도살자는 갓 태어난 노루 새끼마냥 덜컥거렸다.
“……왜…….”
케륵, 피와 침을 내뱉으며 도살자가 외마디 질문을 건넸다.
사로잡혔다.
잡혔다는 소리는 죽임 대신에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리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아무런 시도도 없이 자신을 베어 버릴 줄은 몰랐다.
아무리 도살자라 하더라도, 그건 몰랐다.
‘왜… 묻지 않아?’
아니, 그는 사로잡힐지언정 죽임을 당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박탈당할 뿐, 미국조차 자신을 잡아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빌런 협회와 도주와 관련된 수많은 기술들.
고문과 취조는 당연하겠지만, 언제고 도망칠 기회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어긋났다.
흐려지는 시야.
그 시야 너머로, 상대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한정우의 모습이 보이자 도살자는 그야말로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경험으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그의 순간적인 판단은 하나.
크르르!
낮은 울음과 함께 붉어진 안광으로 도살자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폭사(爆死).
너라도 같이 죽이고야 말겠다는, 집념 가득한 최후의 일격.
그럼에도 정우의 눈빛은 그저 태연했다.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히 피 묻은 단검을 아공간으로 보낸 뒤, 다시금 지팡이를 꺼내 들 뿐이었다.
검은 피부의 균열 사이로 붉은 발광이 생겨났다.
한껏 부푼 육체는 이전의 근육질 몸과는 전혀 달랐다.
풍선처럼 부푼 그것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불안감을 여과 없이 보이고 있었다.
‘죽여 버린다! 너라도 내가 꼭 같이 데려간다!’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때.
툭.
아주 가벼운 충격음이 도살자의 귀를 자극했다.
‘……!’
핏빛으로 붉어진 눈이 크게 확장된다.
스킬이 해제되고 있었다.
동귀어진의 수.
한번 발동이 되면 취소 자체가 불가능한, 최후의 선택이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그의 귀로, 정우의 싸늘한 조소가 들렸다.
“마법이라. 최후의 선택치고는 너무 별 볼 일이 없군.”
도살자의 최후의 선택을 무위로 돌려 버린 정우가.
한순간의 시체로 변해 버린 도살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사자 부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