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변화, 진화 (4)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도 잘 몰라요. 그저 아버지께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걸 따랐을 뿐이에요.”
-그 우물 안 개구리의 선견지명이라고? ◝₍ᴑ̑ДO͝₎◞
“……들었던 것보다는 좀 크군요. 버릇은 없는 것 같지만.”
-뭐? 나? 허……! 지금 이 꼬맹이가 뭐라고 그러는 거야?
“작은 건 당신 아닌가요?”
-진짜 어이가 없네?
메아리의 작은 손에서 보랏빛 안개가 넘실거렸다.
“그만.”
정우의 낮은 음성에 둘은 서로를 노려보고는 획 하니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속으로 고개를 저은 정우가 다시 레베카를 보았다.
“어떻게 나온 거지?”
“저도 몰라요. 그저 아버지께서 뭔갈 느끼시더니, 저보고 통로를 지나가 보라고 하셨어요.”
“…….”
정우는 말문이 살짝 막혔다.
대체 어떻게 바뀌었을 줄 알고 대뜸 자신의 딸을 이동시킨 건지.
‘대책이 없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정우에게는 이지스의 그런 행동이 굉장히 무모해 보였다.
마녀의 통로가 결국 공간 이동의 정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저런 공간 이동이 아니었다.
“차원 이동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감행할 줄 몰랐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었죠. (◍●◡ु‹◍)☆
어느 정도의 기억을 되찾은 메아리 역시 이지스의 생각에 조소를 보냈다.
어리둥절해하던 레베카의 안색이 점점 새하얘진다.
“…자, 잠깐만요. 그럼 이게… 검증된 게 아니었어요?”
“아니지.”
-풉. 검증은 무슨. 아! 방금 했네. …검증. 축하해!
“……!”
충격을 받은 레베카에게서 시선을 뗀 정우가 넋이 나간 듯 멍한 도살자를 내려보았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짧아요. 대충 10분 정도?
“그럼….”
잠시 뭔가 고민하던 정우의 눈이 번쩍였다.
“…한번 시도해 봐도 되겠군.”
-에? 뭘요?
“통로.”
정우는 도살자를 둘러멨다.
그러고는 남은 한 손을 회전시켰다.
통로는 공간 이동과 동일했다.
입구와 출구의 좌표를 알아야 했고.
좌표까지 마력을 전달해야 했다.
‘그게 맞지.’
하지만 정우는 협회에서 보았던 공간이동마법진을 떠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형편없어 보이던 공간마법진.
하지만 그 체계만큼은 선명히 떠올랐다.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흐름.
그게 이젠 확실히 보였다.
‘지식은 힘이지.’
정우는 공간이동마법진의 발동을 떠올렸다.
한국 전역에 깔려 있는 협회의 좌표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씨익.
입가를 올리며 웃은 정우가 여전히 얼이 빠진 레베카를 끌어당겼다.
“이동하자.”
우웅!
통로의 생성.
통로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만족스럽게 본 정우가 공간을 넘었다.
[ 스킬, 공간 이동을 습득하였습니다. ]
단 한걸음에 모든 게 바뀐다.
공간이동마법진을 통했을 때와는 다른.
“이게 공간 이동이지.”
자연스러운 흐름.
일반인조차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공간 이동에 정우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디예요?
“버려진 장소.”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건물.
덩그러니 놓인 그 건물의 앞에서.
정우는 익숙하게 한 장소로 움직였다.
끼익.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 정우의 앞에 나타난 건.
-게이트?
“내 시작. 강해져야 했던 이유.”
G-00.
“방치된 튜토리얼이야. 지금 시간이면 괜찮을 테니, 얼른 들어오라고 해.”
정우는 도살자를 내려놓았다.
털썩.
“레베카.”
“…네.”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레베카의 표정이 다부졌다.
빠득.
‘…다부진 게 아니고 열받은 거군.’
“회랑에 접속하지. 너에 대한 것도 정리하고 올 테니까…….”
도살자를 힐끗 보았다.
“지켜.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릴지도 모를 저놈에게서.”
“알겠어요!”
정우의 말에 레베카는 고개를 숙였다.
예상보다 절도 있는 모습으로.
만족스럽게 웃은 정우가 열쇠를 돌리며.
[ ‘회랑’에 접속하시겠습니까? ]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은밀한 연락.
유지석은 연락의 주인을 떠올렸다.
“앤드류….”
서류에서 시선을 뗀 그는 창밖을 보았다.
일본이 있는 동쪽이었다.
“그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지.”
그는 과거의 앤드류를 떠올렸다.
초창기 미국은 인재 영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약속된 막대한 부와.
국가 영웅으로 대한다는 조건에 넘어간 이들도 많았다.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모든 강대국들은 약소국의 인재를 탐냈다.
그리고 그 대상엔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크기의 영토.
경제력과 국력 모두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는 한국은, 예상보다 많은 인재들을 빼앗겨야만 했다.
앤드류가 강세기에게 접촉했던 것도 그때였다.
별다른 진전도 없이 일본에게 빼앗겨야 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지석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세기를 영입하기 위해서 판을 깔던 앤드류의 실력을.
한 주의 플레이어 협회장까지 된 그는 강세기의 영입 실패를 공공연하게 자신의 큰 오점이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그런 앤드류였다.
“강세기의 주변이 이상한 건 확실한 모양이구나.”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항상 예민했다.
얼마 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태도를 중립적으로 바꾸지도 않았을 정도로.
강세기 주변에 한국 국적의 플레이어가 맴도는 것을 총리가 알게 된다면.
“좋을 게 없지.”
그래서 유지석은 앤드류에게 연락을 했다.
미국이라는 거대 공룡을 등에 업고.
“본인 스스로의 능력도 뛰어난 인물. 여러모로 적격이군.”
그의 연락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후우…. 세기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군.”
강세기의 말에 대한 신빙성.
그게 앤드류의 연락을 통해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이 내용이 더 중요했다.
“미국을 끌어들일 수 있겠어.”
일본의 미해결 지역.
세이렌의 영토.
그곳을 공략하기 위한 지원.
유지석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플레이어의 등장은 한국의 새로운 도약의 시대였다.
수많은 피와 죽음을 딛고 일어난.
강대국으로의 도약의 시대.
하지만 유지석은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의 안정.
그건 매우 중요했다.
전쟁은 없어져야 하고, 무의미한 죽음 역시 사라져야 옳았다.
“……하지만 공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몬스터에게 빼앗긴 영토.
몬스터의 손에 빼앗긴 생명.
모든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유지석은 정말로 이 사태를 종결시키고 싶었다.
플레이어가 없던 시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몬스터를 죽이고, 인간의 탈을 쓴 그것들까지 끌어내려야 한다.”
그 시작은 일본이 될 것이었다.
당초 계획과는 멀어졌지만.
일본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S급 플레이어를 세뇌할 수 있는 물건을 발견한다면…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이 일겠지.”
전쟁은 발생할 거다.
아니, 이미 전쟁을 준비하는 그였다.
전쟁이 싫지만, 모든 게 종결되기 위해선 전쟁은 필수였다.
그 모순된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온 것 역시 무수한 전투의 역사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써야지.”
그렇기 위한 패였다.
앤드류 협회장은.
그렇게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유지석이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렸을 때.
띠리링.
벨이 울렸다.
“…신원을 파악하도록 하게. 한정우 플레이어의 위치도!”
폭발로 인한 출동.
역력하게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
수십의 시체까지.
유지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기민한 그의 두뇌가 이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며 경고를 보내 왔다.
한정우와 김훈이라는 플레이어의 동행.
그리고 터진 폭발.
전투와 시체.
하지만 그 와중에 한정우와 김훈의 시체는 없었다.
폭발에 휘말렸든가.
‘살아서 움직였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르트? 아니면… 일본?’
닥터 브라운 건까지 따지면 일본은 한정우를 못마땅하게 여길 터.
한정우를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수르트가 자신의 견제를 뚫고 사람을 보내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이중 던전의 공략자.
정세가 변한다.
불과 몇 달 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 * *
회랑은 고요했다.
여전히 순백의 공간에서 일언반구 입도 뻥끗하지 않는 마녀들의 조용한 독서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회랑으로 접속한다고?”
선택지가 사라졌다.
마녀의 마을.
회랑.
두 곳의 목적지가 다시 초창기처럼 하나로 돌아가 버렸다.
정우의 접속이 보고가 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스가 접속했다.
“마을로 오실 줄 알았소.”
반가운 표정의 그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열쇠가 변했다더니 다시 이쪽으로 접속시키더군.”
“음……. 그건 무조건 반기지만은 못할 일이구려.”
하루에 한 번, 접속이 가능한 회랑의 열쇠.
그것이 마녀의 마을로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면서, 정우는 열쇠를 이용한 만약의 순간을 염두에 두었었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도피처가 될지도 모를 장소로의 접속이 사라진 상황이라, 정우는 조금 당황해 버렸다.
하지만 이내 결론을 내린다.
“…통로 때문이군.”
“아! 그럴 수도 있겠소. 이미 왕은 스스로 문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이오.”
그는 이미 통로를 통해 마녀의 마을과 연결을 시켰다.
스스로 연결 통로를 만들 수 있었던 셈.
하지만 정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각성이며 퀘스트와 성장에까지 관여하는 것.
시스템.
정확한 이름도 없어 그저 그렇게 지칭할 뿐인 그것의 정체가 또다시 궁금해졌다.
시스템은 성장을 알렸고.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먼저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통보하듯이 메시지를 띄울 뿐이었다.
“……신.”
“무슨 말이오?”
“예전에 한 번 설명한 적이 있어. 플레이어와 던전. 그 모든 것들을 이루는 법칙.”
“시스템…이라고 부른 것 말씀이구려.”
“기억하고 있군.”
“이 사태의 원흉일 수도 있으니, 기억할 수밖에 없지 않소.”
‘원흉….’
정우는 이지스가 사용한 단어가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전 세계의. 아니, 한 행성의 법칙을 바꾸는 힘이야. 이계엔 ‘신’이 있었지.”
“왕께선 그중 한 신이 지구에 영향력을 미쳤다, 라고 판단하시는 거구려.”
“지구뿐만이 아니지. 이계와 지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시스템이니까.”
이계엔 신이 존재했다.
신이 존재하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신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정우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 극히 드문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것에.
‘…찾아봐야겠어.’
정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멀티버스이든 복사이든, 이계의 많은 것들이 던전이라는 형태로 지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게 과연 인간의 힘일까?
신이 지구에서 바라본 시점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은 정우도 알고 있었다.
신을 정의할 때 주로 사용되던 단어는 전지전능이 아니었다.
‘초월자.’
종을.
능력을.
수많은 조건들을 전부 초월해 버린 존재가 바로.
‘신이지.’
신으로 불렸다.
“역시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오.”
이지스가 중얼거렸다.
“좋아. 이곳의 지식을 빌릴 때가 됐어.”
“그전까지는 안 빌리셨소?”
“빌렸지. 아마… 내가 회상이라는 힘을 얻게 된 연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회상?”
“아, 평범한 지구인이 아니더라고. 내가.”
“…설마, 이쪽에서 먼저 넘어간 경우였소?”
이지스의 물음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하는 이지스.
“…어쩐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