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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106화 (106/293)

106화

-변화, 진화(2)

메아리를 성장시켜라.

그런 내용의 퀘스트는 완료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상은 유보가 되었고.

정우는 약간 잊고 생활을 했었다.

도살자와의 전투.

궁지에 몰렸을 그때에.

유보된 보상이 밀려들었다.

당시 퀘스트의 보상은 신체능력이나 마력의 성장이 아니었다.

‘잊어버린 지식의 일부.’

기억이 아닌 지식.

정우는 그 말이 체감이 되었다.

지팡이를 내려찍는 순간, 통로와는 다른 별개의 발광체들이 도살자의 주변에 떠올랐다.

빠르게 형태를 갖춰간 그것은.

“뭐냐…! 이게 뭐냐!”

정우에게 한 팔이 잘려 당혹과 분노를 터트리며 아직도 분전하고 있는 도살자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각각의 마법진.

언제 이 마법을 배웠고, 언제 이 마법을 사용했는지 떠올리라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 마법의 원형.

이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런 지식들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발광하던 마법진들이 일제히 마법을 쏟아 낸다.

처음은 화염.

수십 대의 화염 방사기를 동시에 작동한 것처럼, 불길이 도살자에게 쇄도했다.

위험을 직감한 도살자의 판단은 빨랐다.

불길이 쏟아지는 순간엔 게이트가 사라진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타악!

몸을 움직였다.

공간을 잠식시킬 정도로 상당한 불길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다 위협적인 위력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살자는 오히려 지금을 기회로 여기고 자리를 이탈하고자 했다.

쩌어엉!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불길을 베어 내며 마법진을 박살 낼 것처럼 휘두른 도끼가 어처구니가 없게도 튕겨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킬 또한 마법진을 기준으로 생성된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소멸해 버렸다.

그나마 스킬에 적중당했을 때엔 격렬히 저항하듯 발광을 해댔지만.

그 번쩍임이 끝났을 무렵엔, 도살자는 다시금 자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파지지직!

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전기가 주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화염에서 번개.

번개에서 광풍.

그리고 냉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격은.

쩌적!

기어이 도살자의 두 발을 묶어 버렸다.

스킬, 콜로세움.

이계의 정우가 알고 있던 지식의 일부.

그것이 처음으로 전개가 되었다.

얼어붙은 두 발.

움푹 파여 뜯겨 나간 옆구리와.

붉고 퍼렇게 변해 버린 전신까지.

툭.

덜덜 떨리는 손이 도끼를 놓쳤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었다.

스킬이 해제되어 상대를 구속하는 막까지 사라졌지만.

도살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우를 보며.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듯.

분노와 오만으로 얼룩졌던 눈동자엔 ‘두려움’이란 감정이 깃들었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정우는 천천히 다가가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질문 중의 하나를 골랐다.

단연코, 가장 중요한 질문.

“덧씌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 풀어 주지.”

“……!”

풀어 준다고?

도살자의 얼굴이 그런 의문을 가득 담아 펴졌다.

불신, 우려, 좌절과 분노까지.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진짜로, 풀어 줄 거냐?”

“이제는 널 다시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대신… 몇 시간 뒤엔 널 잡으러 가지.”

모욕적인 말.

하지만 도살자는 침음을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많은 도주를 경험한 그다.

생명의 위기를 겪은 적이 많았다.

자존심을 다 버리고 구걸하며 기회를 노릴 때도 많았다.

도살자의 표정이 달라졌을 때.

-푸흡! 우리 주인님도 참 고약하다니까?

메아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때 느끼는 감정은.

걱정보다 강력했으니까.

순간적으로 몽롱해진 눈빛으로, 도살자가 말했다.

“……오버레이는….”

덧씌우기를 오버레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우는 찰나, 제임스 밀러의 단어가 이상했다는 걸 깨달았다.

플레이어는 실시간 동시통역기가 부착된 것처럼 언어에 대해 자유를 얻는다.

외국어를 모르더라도, 한국어만을 사용하더라도 외국인과 평범한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뜬금없는 제3의 언어로 들리는 게 아니다.

영어를 들었으나 자동 번역이 되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제임스 밀러는 분명히 덧씌우기를 설명하며.

‘Fill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

충전재 혹은 속에 넣는 무언가를 뜻하는 단어.

‘제임스는 왜 굳이 그런 단어를 사용했을까?’

의문이 생겼다.

덧씌우기라는 단어만 놓고 보면 오버레이가 더 어울렸으니까.

그리고 들리는 단어.

“칭 샤오의…….”

오버레이를 만든 인물의 이름.

털썩.

도살자의 몸이 무너진다.

움찔거리는 다리 근육과는 달리 몸은 점차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은 밝았다.

진실로 목숨을 건졌다는 표정으로, 밝게.

눈을 감았다.

정우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전하네. 메아리. 아니, 퀸 마야.”

-주인님! 이제 기억을 되찾은 거예요? 저도 주인님이 기억을 잃었다는 기억을 되찾았어요!

메아리의 고유 능력 중 하나였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종족.

‘서큐버스’의 마지막 생존자를 본 정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 * *

“…잠깐!”

해후는 짧았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엔 주변이 이상했다.

-어? 누가 오네요?

‘인원이 많아.’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이 심상치가 않았다.

‘폭발 때문이겠지. 누굴까? 협회? 아니면 빌런?’

전투로 인한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폭격에 가까운 번쩍임이 사방팔방으로 퍼졌을 터.

‘메아리.’

-말씀하세요. 주인님.

‘네 능력 범위가 어디까지지?’

기억은 온전치 않다.

얻은 기억이라고 해봤자 죽음에 가까운 순간.

최후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당시의 기억이 전부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분기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부분이 달라졌지만.

적어도 메아리에 한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기억보다.

퀘스트로 얻어진 기억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메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기억은 힘과 비례하는바.

까맣게 잊고 있던 보랏빛 안개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유령과 같은 형국에서.

-숨겨줘요?

‘알면서 말하는군. 짓궂기는 여전하네.’

-히히. (ง˙∇˙)ว

현실에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바뀌었으니까.

정우는 도살자를 낚아챘다.

거리를 벌리는 건 무리였다.

접근하는 이들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도주를 허락하는 형세는 아니었으니까.

‘이놈까지 같이, 숨겨.’

-그건 좀 버거울 것 같긴 한데… 한번 해보죠.

서로의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결과.

둘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대화를 나누느라 사라진 보랏빛 안개 대신, 검은 안개가 슬쩍 생겨났다.

-이이익!

전신을 가리기에도 부족한 양.

그럼에도 메아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무리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이 고작해야 두 번째였다.

기억 속에서의 그녀는.

‘확실히 약하군. 너나 나나.’

-…….

메아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란 문자를 띄웠을 뿐.

악전고투에 가까운 노력 끝에.

검은 안개가 둘을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파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훅 들이닥쳤다.

조용한 소음.

도살자와 싸우면서 퍼트려 놓은 기감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다.’

이전의 정우는 창술사의 위치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계에서의 그는 마법사였고, 그의 재능은 상태창이 알려주듯 마법에 적합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아무리 준비가 부족해도, 처참할 정도로 예전에 못 미치는군.’

스스로의 수준이 못마땅했다.

정우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사이.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사방으로 퍼졌다.

몸을 숨긴 것 자체가 메아리의 힘이었기에 상대의 마력을 알아차리는 건 어려웠다.

‘여유가 없다.’

메아리는 지금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언제 이 힘이 끝날지는 정우도 몰랐다.

본인과 메아리 둘 다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정우는 자리를 옮기지 못했다.

“…설마 실패했나?”

우두머리의 중얼거림 때문이었다.

실패라는 단어에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메아리의 눈이 커졌다.

정우의 결정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기습한다.’

검은 안개는 존재를 지워 준다.

우두머리의 수준이 어떠한지 알 수는 없지만.

정우는 생각을 굳혔다.

능력을 유지하느라 얼굴이 붉어진 메아리와 눈을 마주친 정우는.

파앗!

단번에 땅을 박찼다.

정우가 아는 한 가장 조용한 기습을 펼친다.

통로.

순식간에 상승한 마력과 함께 전개되는 통로가 일격을 가했다.

휘익!

“……!”

확실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한 우두머리는 오히려 반격까지 가해 왔다.

[ 악의(惡意)를 각인하였습니다. ]

단검이 상처를 냈지만 그리 깊지는 않았다.

정우는 블링크를 통해 반격을 피하며 무거워진 눈으로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삐익!

짧은 소리.

정우는 그것이 수하들을 부르는 호출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넌 한정우?”

‘이놈도 강하다.’

우두머리의 말에 정우는 더욱 빠르게 몸을 털었다.

매직 미사일의 향연.

자세를 낮춘 우두머리의 손에서 빛이 번쩍였다.

‘단검술. 암살자치고는 매우 빠르다.’

매직 미사일을 쳐내는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적어도 B급.’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네가 이겼다고?”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 우두머리를 보며, 정우의 손이 웅웅 발광했다.

번쩍거리는 손아귀를 힐끗 본 우두머리가 자세를 잡는다.

‘마법이 생각보다 강하다.’

E급으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그 수십 발의 마법이 전부 다 묵직했다.

‘달라…. 정보가 잘못된 건지, 아니면 저 ‘먹이’가 감히 우리를 속인 건지 확인해 봐야겠어.’

휘이익!

짧게 휘파람을 분 우두머리의 신형이 후욱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정우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왼쪽.’

속도만 놓고 보면 도살자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뒤로 몸을 날린 정우의 손에서 파지직, 번개가 친다.

‘마력의 실을 따라 퍼져라!’

마법의 의념.

생각에 따라 같은 마법도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었다.

정우의 마법은 사방으로 퍼진 전선을 타고 넘나드는 전기와 같았다.

그 방대한 마력의 실이.

하나의 거대한 전도체가 되었다.

“……크윽!”

그것만으로도 우두머리는 접근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후우욱!

미약한 바람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뒤쪽.’

아주 자연스럽게 사각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 하나 있었다.

‘둘.’

하나가 곧장 둘로 늘어난다.

사방으로 퍼졌던 수하들이 귀환한 것이다.

정우의 손발 역시 바빠졌다.

지팡이를 창처럼 휘두르며.

오러와 마법을 연이어 전개한다.

“……이런.”

우두머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각보다 강했기에.

불과 몇 분의 전투.

심지어 일방적이라고 예상했던 전투의 과정이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푹!

꿰뚫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이는 수하였으니까.

벌써.

‘…셋.’

A급 플레이어를 상대로도 자신이 있다고 여겼던 우두머리로서는 치욕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나왔다.

‘진짜로… 도살자를 잡았단 말이다.’

이건 큰 사건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수르트의 수하가 아니더라도.

‘이건 전달해야 한다.’

수하들을 힐끗 본 우두머리가 이를 갈았다.

이들을 단련시키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조리 잃는다면 피해는 상상 이상일 터.

하지만.

‘…왕께 보고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떠올렸다.

수르트와는 전혀 다른 노선의 주인.

불과 몇 달 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정도 재능이라면 위험하다!’

수르트가 이 재능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떻게 바뀔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어쩌면.

‘판도가 바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우두머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가한 후.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텅!

투명한 막.

갑자기 생겨난 그것에 얻어맞고는 뒤로 나뒹굴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돌연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지지만 않았다면.

“하아. 이제야 알겠군.”

기이한 의미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면.

그는 온전히 도주에 성공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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