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변화, 진화 (1)
모든 게 암담한 상황.
절망뿐이 남지 않아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그 순간에.
갑작스럽게 내리쬐는 한 줄기의 햇빛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말한다.
[ 메아리의 성장이 끝났습니다. ]
한 번의 메시지.
그리고 이어지는 끝도 없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이라고?’
정우는 이 변화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
기적과도 같은 변화.
그 시작은 마력부터였다.
뿌득!
무한히 회복시킬 것 같았던 마력회복물약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바닥을 드러냈던 마력이 한순간에 차오른다.
한계에 다다랐던 육체가 새로운 힘을 얻고, 잘게 떨리던 하체가 굳건히 바닥을 지탱한다.
뿌옇게 변했던 눈앞이 돌연 선명해졌으며.
‘마력의 흐름이… 또 변했다.’
집중해야만 보이던 근육의 변화.
마력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메시지 가운데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도드라진 건.
갑작스러운 변화에 반응하듯, 거친 일격을 가한 도살자의 움직임에 반응하면서였다.
수많은 경험.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종이, 도살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우의 반응은 그보다 더 빨랐다.
도살자의 붉은 일격을 피하며.
도드라진 메시지를 읽었다.
[ ‘회랑의 열쇠’가 변화합니다. ]
시간의 흐름을 달리 가져가는 회랑의 존재.
방대한 정보 외에도 크나큰 이점을 지닌 그것 또한 메아리의 성장과 맞물려 재등장했다.
하체를 쓸어 오는 일격을 뛰어 피한 정우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다.
블링크.
불과 조금 전만 해도 시전 시간이 필요했던 그것이.
“……대체.”
도살자조차 어리둥절해할 정도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뿅!
그런 효과음이 어울릴 만큼 산뜻한 표정으로.
-메아리, 재등장! ٩( °ꇴ °)۶
또 성장하여 이젠 중학생 정도의 모습이 된 메아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등장과 동시에 상황을 눈치챈 메아리의 표정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급변한다.
싸늘한 냉기.
그녀의 주변에 맺힌 건, 보랏빛의 은은한.
‘오러?’
“…뭐냐!”
갑작스러운 보랏빛 안개에 도살자가 경계했다.
정우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보랏빛 안개는 도살자를 압박해 들어갔다.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도살자는 그것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의 마력과 움직임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을 보았기에, 도살자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게.
‘기회다.’
정우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기적과도 같은 변화.
그 속에서 당장 필요한 것들을 뽑아낸다.
예전의 정우라면 알지 못했을 것들.
하나, 지금의 정우는 다르다.
회상을 통해서 자신의 전생과 비슷한 상황을 인지한 이후부터.
정우의 모든 것은 진일보했다.
특히나 마력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급변했다.
그것은.
인지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회랑 열쇠의 변화 이후에 정우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 권능 ‘통로’를 습득하였습니다. ]
통로의 권능화.
권능이라는 단어에 정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의 폐쇄를 보며 떠오른 권능이 무려 이계의 지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녀의 비기인 통로가 권능이 되었다면.
‘어떤 능력이 있는 건지, 지금 보여 봐라!’
얼마나 능력이 상승했는지 절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통로를 생성시켰다.
쯔억!
기묘한 소음과 함께 생성되는 그것을 본 정우의 눈이 커졌다.
* * *
폭발은 곧장 보고가 되었다.
서울 근교라고 치기엔 기이할 정도로 외진 지역이었지만.
밤하늘을 번쩍일 정도의 폭발과 굉음을 막는 건 무리였다.
협회에선 즉각 사태 파악에 나섰고.
‘……이거 골치가 아프군.’
철원의 지하에 숨어 있는 사내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짚었다.
설마하니.
‘잘못 판단한 걸까? 도살자의 적의가 그 정도였다고?’
도살자가 정우를 죽이겠다고 결정했을 줄은 몰랐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보이는 광경이 바뀌었다.
한정우란 사람은 매우 중요했다.
비단 수르트뿐만이 아니다.
‘뱀파이어의 적.’
자신들과 계약을 맺은 뱀파이어의 왕, 로드가 직접 살해를 명했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힐끗.
잠들어 있는 백작을 본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자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목숨처럼 따르는 로드조차.
원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한정우가 도살자를 이길 확률은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
한정우의 재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수르트의 판단보다도.
더 강렬하고 강대한 재능.
오싹할 정도의 강대함을 품고 있는.
‘천재(天才)!’
모든 건 그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적어도 사내에게는 그랬다.
도살자의 폭탄에서 살아나온 건 예상 밖의 일이다.
하지만 반가운 오산이었다.
그 뒤로 도망쳤으면 좋았을 것을.
‘……그나마 믿을 건 하나인가?’
사내는 보랏빛 안개를 떠올렸다.
그 안개는 ‘그녀’의 상징.
그 안개를 보았다는 것은.
‘그녀 역시 어느 정도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이지.’
정우의 성장이 날개가 달린 듯 급변할 거란 사실을 의미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녀의 등장과 더불어 눈이 사라졌다.
시선은 끊겼다.
상당히 많은 것을 손안에 쥐고 있었던 그에게 지금의 상황은 간만에 느껴 보는 불안이었다.
타인의 손에 원대한 계획의 성패가 일순간이지만 넘어간 순간.
사내는 이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짧게 혀를 찼다.
쯧.
단 한 번의 소음.
하지만 이곳에서 잠들었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고작해야 혀 차는 소리에.
“……너무 허약해. 이래서는 로드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겠어. 고작해야 이 정도로 기절하다니.”
기절했다는 사실을.
사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금 ‘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부디 그동안.
‘버텨 줬으면 좋겠군.’
정우의 선방을 기도했다.
기도.
그 어색한 것에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 * *
쯔억!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었다.
어둠보다도 더 어둡고.
빛보다도 더 반짝이는.
기이할 정도로 모순된 형태의 구멍.
‘……게이트!’
어지간한 성인의 상체보다 조금 더 커다란 그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게이트와 닮아 있었다.
통로가 생성되는 순간.
정우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통로의 마력.
그것을 이루고 있는 흐름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공간에서 꺼낸 여러 종류의 무기.
단검, 장검, 창.
하나같이 훈련용으로 쓰이는 것들이지만, 어느 정도 날카롭게 벼려진 무기들이.
툭 하니 통로로 내던져졌다.
보랏빛 안개를 경계하고 있던 도살자 역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다음으론 의심했고.
무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경악했다.
그 또한 플레이어.
플레이어란 존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그에게도.
‘……게, 게이트?’
저것만큼은 예외였다.
눈앞에서 생성된 저것은 그의 경험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였다.
그렇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돌파한다!’
보랏빛 안개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지만, 독무나 저주라 하더라도 자신은 능히 이겨 낼 능력이 있었다.
고작해야 E급에게서 생겨난 독무.
어딘지 모르게 주춤거렸던 본능과는 달리 그의 판단은.
‘돌진!’
예의 사라지는 듯한 돌진이었다.
흐읍!
숨을 들이켠 도살자가 마력을 움직여 피부에 둘렀다.
S급의 컨트롤엔 모자라지만 나쁘지 않은 운용법으로 전신을 가린 도살자의 신형이 빠르게 독무를 가로질렀다.
어렵지 않게 이 안개를 돌파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움찔!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근육의 힘.
저릿거리는 심장의 울림.
보랏빛 안개에 닿자마자 모든 것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히죽!
한 차례 꺾이는 무릎을 본 메아리가 환하게 웃었다.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는 놈들은 자고로 본능을 무시하는 법이지.
싸늘한 평가.
기억의 일부를 더 되찾은 메아리는 도살자의 결정에 조소를 날렸다.
보랏빛 안개.
‘환혹(幻惑)’은 중독이나 감염 따위의 증상과는 다르다.
정우의 그것처럼 스킬의 영역을 벗어난, 권능의 일종이자.
그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본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맛이 어떠냐? (੭•̀ᴗ•̀)੭
그 일대는 거의 ‘무조건’에 가까운 강제성을 띠는 환혹의 효과를 받는다.
보랏빛의 효능은 하나.
‘걱정.’
정우를 얕잡아보면서도 쉽게 제압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도살자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능력이었다.
걱정을 품는 순간 권능은 효과를 발휘한다.
마력이 독무를 제대로 막아 줄 수 있을까?
저주는 아닐까?
이 보랏빛 안개가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한정우는 왜 갑자기 기운을 차린 것인가?
저 게이트는 대체 무엇인가?
저것의 효능은, 효과는, 영향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걱정을 품을 만한 사안은 너무도 많았고.
걱정을 ‘확정’으로 바꿀 내용 또한 너무도 많았다.
걱정이 커져 의심이 된다.
그 순간.
의심은 ‘진실’이 된다.
환각과 진실의 경계를 허무는 힘.
그것이 바로 메아리가 되찾은 힘의 본질이었다.
덜컥거린 도살자.
정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입구와 출구를 동시에 생성해서 움직여야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 생성된 것은 입구 하나.
하지만 권능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나타나는 출구는 하나가 아니었다.
쯔억, 쯔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생겨나는 여덟 개의 출구.
아니.
‘출입구!’
쐐애액!
여덟 개의 통로에서 무기를 쏟아 냈다.
환혹에 속아 중독과 저주를 한 몸에 받아들인 도살자는, 그 와중에서도 몸을 움직여 반응했다.
하지만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통로에서 튀어나온 무기가 반대편 통로를 관통하여 전혀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다.
여덟의 공격이 순식간에 수배로 불어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연격.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되는 공격.
심지어.
스스스!
정우의 집중에 따라 오러까지 맺히는 이 공격은.
서걱.
사사사사삭!
“……크윽!”
도살자의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만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가히 ‘블리자드’에 버금가는 위용.
‘조금 더 바꾼다!’
하지만 정우는 만족하지 못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의 필살기에 가까운 위력을 보이면서도.
‘통로의 위치를…….’
그것을 진화시키기를 원했다.
스슥.
허공에 뻥 뚫린 여덟 개의 구멍이 한 뱡향으로 회전했다.
도살자의 상처가 커졌다.
스치고 지나가는 무기 외에도.
까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살자의 도끼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무기까지.
모조리 받아들인 통로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두 방향.
이내 세 방향.
“……크아아악!”
도살자의 입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을 무렵엔.
무려 여덟 개의 통로가 제각각의 방향으로 움직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소름 끼칠 정도의 변화.
-아아……!
그 변화를 본 메아리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몽롱해진 눈빛 속에서.
그녀는 정우의 과거를 기억해 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내가!”
으르렁대는 포효.
폭사하는 마력조차 의미가 없었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통로는 자유자재였고.
무기에 맺히는 오러의 양은 한층 두터워졌다.
그리고 그건 당연했다.
마력 : 50(+15)
마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30이 증가한 건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수치였다.
근력을 비롯한 여러 수치들의 한계와 동일한 수치.
[마력 성장(2)]
마력은 신체와 상호 관계에 놓입니다.
벽을 넘으시오.
등급 : C
보상 : 개안(開眼)
정신 사납게 퀘스트가 주어졌다.
새로운 벽의 등장.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감각에 정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사이.
폭풍처럼 통로 안에서 이리저리 도끼를 휘두르고 있던 도살자의 팔 하나가.
쩌억, 휘리릭, 철퍼덕!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대경하여 발작하는 도살자의 모습을 보며.
쿵, 정우가 지팡이를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