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박쥐 무리 (4)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자신들을 둘러싼 공간의 중력이 몇 배나 강화된 것처럼 무거워졌다는 것을.
“지금. 공격.”
정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플레이어들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놈들이었기에.
근거리 플레이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크아-학!
뒤편에서 학살되는 일족을 보던 워리어가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달려들기 시작했다.
“워리어!”
“내가 맡음. 다른 쪽부터 처리!”
“……뭐?”
단호하게 말한 정우가 지팡이를 들고 무너진 놈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너진 자세로도 무기를 휘두르며 정우를 노리는 오크들의 집념은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였지만.
‘염동.’
날아오던 무기가 돌연 방향을 바꿔 동족의 몸을 찍어 버리자 놈들 역시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꾸는 데 온 힘을 할애해야 했다.
‘그래비티!’
정우는 달리는 와중에도 중력 마법을 사용하며 달려드는 놈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내리꽂았다.
푸욱!
오러가 감싸진 지팡이의 끝이 오크들의 급소를 사정없이 찌르거나 베고 지나갔다.
‘쓸 만하군.’
온전히 베는 무기가 아님에도 창과 비슷한 사용법으로 휘두른 지팡이에 오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정우!”
이진수의 고함을 들으며 희미하게 웃은 정우의 움직임은 가벼웠다.
빌런들을 대거 잡은 상황.
아직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수치의 변화와는 달리 육체는 이전과 달랐다.
마력 역시.
‘연이어 마법을 사용했지만 아직까진 괜찮아.’
혼전을 생각하고 미리 마력회복물약을 마셨지만, 사실 마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성장한 것 같은데 수치는 변화가 없고, 그럼에도 어느 순간 수치가 확 올라갔었던 상황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닥터 브라운의 아티팩트 실험과.
‘시체에서 얻은 정보를 보면… 이건 내 깨진 그릇을 붙이는 중이다.’
그릇이 붙는 순간 남은 마력이 신체와 마력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릇이 수복되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니.
‘가벼워.’
몸이 가벼워졌다.
상태창의 수치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컨디션은 더없이 좋았다.
비스듬하게 뛰어오른 정우의 지팡이가 지면을 쓸며 튕겼다.
녹색의 피부만큼이나 진한 녹색의 피를 뿌리며 나뒹구는 오크의 비명에 미소를 지으며.
쿠웅!
지면을 딛는 즉시 정우가 지팡이 끝을 내리쳤다.
“프로즌 필드.”
쩌적!
정우를 중심으로 반경 10m의 지면이 얼어붙었다.
반경 안에 있는 놈들 역시 신체의 일부가 얼어붙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매직 미사일.”
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퍼지는 매직 미사일의 수가 하나씩 늘어난다.
처음에는 수십 발에 불과했지만.
“매직 미사일!”
연이은 마법의 사용.
정우 특유의 재능을 이용한, 변형의 재변형까지 이룬 매직 미사일은.
시간차 공격처럼 허공에서 머물거나 조금 더 먼 곳에서 생성되어.
가히 폭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오크는 단단했다.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무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특유의 단단하고도 질긴 피부 때문에 어느 정도의 충격을 감소했다.
하지만.
“……!”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났을 때의 일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공격은 가히 폭격이었다.
다급히 움직인 오크 워리어가 대뜸 도끼를 집어 던졌다.
동족의 어깨를 가르면서까지 쇄도하는 도끼의 위력을 본 정우는.
‘막기 어려워.’
이 일격에 담긴 파괴력을 파악했고.
아주 가볍게.
‘염동. 그래비티.’
그것의 각도를 바꾸었다.
도끼의 힘이 대단하여 아예 아래로 떨구지는 못했지만, 염동으로 방향을 바꾸고 그래비티로 짓누른 도끼는.
휘리리릭, 쿠웅!
정우의 좌측을 길게 가로지르며 동족의 등과 머리를 쪼개어 버렸다.
피식.
당황하는 오크 워리어의 모습을 본 정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달려든다.
“크, 크라-학!”
당혹과 분노로 얼룩진 놈이 근처의 오크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들고는.
지축을 흔들며 달려든다.
단번에 쪼갤 듯 떨어지는 도끼를 피한 정우의 손이 퉁, 튕기고.
퐁!
아주 작은 물방울이 허공에서 맺혀 오크 워리어의 눈앞에서 터진다.
짧은 틈.
‘약화! 환각! 매혹!’
세이렌 때문에 습득한 저주 3종 세트를 퍼부으며 정우의 신형이 아주 가볍게 놈의 무릎 옆을 지나 뒤로 돌아갔다.
콰득!
“…크학, 학!”
통증에 고개를 치켜들면서도 놈의 무기는 통나무 같은 허리와 함께 빠르게 회전하여 등 뒤의 정우를 노렸다.
‘빠르지만….’
단조로운 공격에 바닥을 구른 정우가 자신의 옆에서 화들짝 놀라며 주먹을 드는 오크에게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퍼퍽!
우그러드는 두개골에 감탄할 새도 없이, 분노한 워리어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피해 가던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진수가 버거워 보인다.’
의외의 승기에 입을 쩍 벌리던 김기태와 불새 길드원들이 주변을 처리하며 이진수를 돕기 위해 움직였지만.
부족장은 차원이 달랐다.
쩌엉, 쩌엉!
방패를 가격하는 도끼질은, 영화에서나 보던 토르의 그것을 닮아 있을 정도로 묵직했다.
귀가 아플 정도의 굉음과 함께 마력의 충격파가 주위를 흔들었다.
B급으로 성장한 탱커 이진수가 놈의 공격에 움찔거리며 비틀거렸다.
김기태의 공격이 예리한 공격이 아니었다면.
이진수조차 위험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의 연속이었다.
‘버스 흉내 내더니… 곤욕을 치르고 있군.’
친구의 욕설이 들리는 느낌이었다.
부웅!
살기가 느껴지는 공격에.
정우가 다시 반응했다.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마력이, 고개를 돌려도 이곳의 모든 정보를 가득 물어다 주었다.
‘보지 않아도 돼.’
마력이 느껴지고.
그것의 흐름이 잡히며.
살기가 느껴지고.
생기와 사기가 구분이 되니까.
‘두 종류의 마력이 뒤엉켜 있다.’
아라크네의 마력과 언데드의 마력이 이제는 온전하게 자리 잡은 것만 같았다.
[ 스킬 ‘육감(六感)’이 생성되었습니다. ]
변화하는 감각 속에서.
정우의 움직임이 보다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말도 안 돼.”
김기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D급의 사막 고블린 족장과 싸워 승리한 전적이 있는 정우였지만.
김기태는 당시 같은 던전에 진입했음에도 정우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유서린 씨가… 일부로 전화한 이유가 있었어.’
그녀는 이번 던전에서 한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며 김기태에게 따로 연락을 취했다.
‘지원팀…. 차출에 수락해야겠군.’
뭔가 위대한 성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유명한 뇌신이나 마왕도 이 정도의 성장폭을 보이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막상 직속 상사가 되는 유서린조차.
격변의 시대는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켰지만, 안정된 이후부터 영웅은 거의 탄생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이들은 있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영웅이라 불릴 정도의 특출난 능력을 지닌 이는 손에 꼽을 정도.
그중에서도 S급이 된 이는 유서린이 전부였다.
D급의 보스를 혼자서 상대하는 게 E급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크윽!”
“아차!”
이진수의 억눌린 침음에 김기태는 아차 하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기계적으로 날리고만 있던 화살이 빠르게 변화한다.
마력을 머금고.
이진수를 피해, 이리저리 휘어져 부족장의 급소만을 노리기 시작했다.
“…후우! 고맙다.”
위기에서 벗어난 이진수가 긴 한숨과 함께 몇 없는 공격 스킬로 검과 방패를 휘둘러댔다.
“탱커 1, 지원!”
“……!”
“탱커 3에게 붙는 오크들을 끌어당겨!”
“아! 오, 오케이!”
사색이 되었던 불새 길드원이 다급히 움직여 오크들에게 도발을 시전했다.
“…주변부터 처리한다. 공 팀장, 불새 길드 지시!”
불새 길드는 그리 큰 규모의 길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중소 규모에선 탄탄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미지도 괜찮고, 플레이어들의 분위기나 단합도 훌륭했기에.
“2시 방향부터 처리한다. 옆으로 세지 않고 조심해.”
공 팀장이 지휘를 맡자 운영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방어전이 아니라.
토벌전처럼.
나름대로 균형이 맞아갈 때였다.
갑작스럽게 전황에 이변이 생겨났다.
쿠르르릉!
저 멀리서부터 다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다른 무리?’
당혹에 가까운 심정으로 상대를 파악한 정우의 눈에 뚜렷한 열감이 서렸다.
‘이놈부터 빨리 쳐내야 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워리어를 피한 정우가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기사처럼.’
플레이어의 직업인 기사가 아니다.
이계의 기사.
마력을 다루며 오러를 두르고, 그것을 통해 마법과도 같은 힘을 보이던 그들의 움직임.
서적에서만 본 내용이었지만 다행히도 정우는 그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아라크네를 잡기 위해 동행한 검사.
‘레베카를 떠올려!’
그녀는 검에 오러를 둘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기억을 더듬으면 전신에 마력을 둘렀다.
플레이어는 그것을 ‘마력 강화’를 비롯한 여러 스킬로 불렀고.
이계에서는 그것을.
‘마력 로드.’
마력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정우도 개념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손과 발 등에 마력을 집중하여 능력을 향상시킨 경우도 있었다.
각력 강화, 근력 강화 따위의 각인도 그 때문에 벌어진 일.
하지만.
‘필요한 건 그 이상이다. 당장에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
레베카의 움직임을.
기억 속에서의 마력의 흐름을 떠올리며.
‘플레이어의 흐름을 각인한다.’
유서린.
대검을 손에 쥐고 빌런들을 압도했을, 그녀의 움직임을 ‘결과’만으로 유추하여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은 매우 빨랐고.
찰나의 순간 정우의 정신은 지금을 넘어 다음을 담았다.
과거였다면.
고작해야 며칠 전의 정우였다면 그저 무의미한 시도로 끝났을 일이지만.
톡, 토톡, 톡!
피가 톡톡 튀는 것처럼 들려오는 지금은 아니었다.
퀘스트의 보상을 받지도.
상당수의 빌런을 잡았음에도 마력이 30에서 딱 멈춘 상태인 것도.
여러 상태 수치가 전혀 변함이 없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깨어졌던 그릇이 복구되고 있었고, 정우의 예상대로 보상을 받기 위한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뚜둑!
정우가 인위적으로 흘리기 시작한 본인의 마력을 머금고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흠집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휘익.
서걱!
정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육감이 마력의 길의 올바른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마력은 보지 못했던 눈이, 스스로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뇌가.
변화하여 스스로의 마력을 확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름을 읽고, 흐름에 맡기며.
톡, 토옥!
끝도 없이 흠집을 자극해 나갔다.
갑자기 변화한 상대의 모습에 콧김을 내뿜은 오크 워리어가 동족과 함께 정우에게 들이닥쳤지만.
더욱 빨라진 정우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상처를 입는다.
다리가 베여 휘청거리고.
복부가 찔려 움찔거리며.
코앞에서 터진 마법의 여파로 어깨가 움푹 주저앉았다.
크, 크릉!
그럼에도 오크 워리어는 투지를 잃지 않았지만.
보다 빨라지고 자연스러워진 움직임을 놓치고야 말았다.
한 부락의 전사.
상당한 전투 경험을 가진 전투 종족 오크의 전사조차 정우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툭!
이전과는 달리 가볍게 명치를 건드리는 지팡이의 끝에서.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울컥 올라왔다.
피.
찰나의 순간 주입된 마력이 몸속에서 폭발했다.
소리도 없이.
반발도 없이.
오크 워리어는… 그제야 주춤거렸다.
이전과는 다르다.
이 순간.
눈앞의 인간은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부족장.
아니, 족장에 근접한…….
팍!
생각이 끊긴 오크 워리어의 몸이 기우뚱 쓰러진다.
“…블링크.”
오크 워리어를 쓰러트린 정우가 이동한 곳은.
“……정우?”
오크 부족장의 등 뒤였다.
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