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박쥐무리 (3)
“혈족(血族) 말하는 거죠?”
“맞아요. 나이트 길드에 찾아갔다고 하더니, 의외로 많이 알고 계신데요?”
“흐흐. 이번에 승진해서 좀 관계가 있거든요.”
“승진이요? 축하드려요. 그러고 보면 이번에 B급으로 승급까지 하셨죠?”
“너 승급했어?”
정우가 화들짝 놀랐다.
“어. 운이 좋았지.”
이진수가 찢어진 눈을 더 찢으며 웃었다.
“축하한다.”
간만에 좋은 소식이었다.
정우는 환하게 웃으며 이진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유 대리님이 너 바쁘다고 해서 연락을 못 했네.”
“그랬군.”
“야, 내 승급은 나중에 축하하고. 아무튼 혈족이라는 특이한 직업이 신경이 쓰여서….”
“쓰여서?”
“불렀어.”
“…불러? 어딜? 던전에?”
“아니. 이번에 각성한 주제에 무슨 방어전이냐. F급이나 돌면서 관리를 해야겠지만.”
“그래서?”
“대충 모레쯤 불렀어. D급 방어전이니까 하루 이상은 걸릴 것 같아서. 미리 와서 대기하라고.”
“왜?”
“…왜긴.”
이진수가 힐끗 안 팀장을 보았다.
‘마력. 이 멍청아.’
‘봐달라고?’
‘너 마력 보는 거 더 강화된 거 아니었어?’
‘됐어. 알았다.’
‘오케이.’
“뭔 남자 둘이 그렇게 속삭인대? 잠이나 더 잘까요?”
“하하. 에이. 뭐 이런 것 가지고 그러세요. 비밀이란 게 있는 법이죠.”
“흐응. 귀 닫고 있을게요.”
창밖을 보기 시작한 안 팀장을 힐끗 보며 피식 웃은 이진수가 정우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부탁한다. 한번 봐봐. 우리 쪽에서는 특별한 걸 못 느꼈어.”
“…후우. 알았다. 방어전이 기대가 되긴 하는데….”
“방어전 솔직히 별거 없다.”
“…응?”
“섬멸전과 비슷해. 주어진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 빼면.”
“그래? 언제 가봤어?”
“야, 내가 여태까지 돈 던전만 해도 수백 개야. 그중에 방어전이 한 번 없었을까.”
“흐음. 하긴. 나이트 길드니까.”
“흐흐. 이제야 날 존경할 마음이 드냐?”
“언제는 내가 존경스럽다며?”
“……내가?”
“어. 네가.”
“그나저나 불새 길드는 튜토리얼 때문에 그런 거야?”
“말 돌리기는. 어. 그 후로 몇 번 연락이 오갔었어. 어쨌든 날 덕분에 버려지지 않았으니까.”
“으음. 그래. 그렇게 생각해서 나쁠 건 없지. 이 세계가 은혜는 만들어도 원한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 세계거든.”
“무협 소설 같네.”
“흐흐흐. 그보다 더할 때도 많아.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나 처음에 각성했을 때만 해도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았냐면…….”
간만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방어전 던전에 도착했다.
“오, 한정우 플레이어!”
“김기태 팀장님. 오늘도 잘 부탁드리죠.”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덕분에 오늘 제대로 성장 한번 해보겠는데요?”
“하하. 그러면 다행이고요.”
김기태와 인사를 나눈 정우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공 팀장님. 이제야 보답을 하네요.”
“하하하. 방어전 던전에 꽂아줄 정도로 거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거물이라니요.”
분위기는 좋았다.
정우는 예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력을 검사했지만.
‘억제제를 사용한 사람은 없어. 악의를 가진 사람도.’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좋은 분위기로 총 여덟의 인원이 던전에 입장했다.
[ 방어하십시오. ]
입장 문구 대신 떠오른 메시지에 정우는 물론, 불새 길드원들도 흠칫 놀랐다.
“방어전은 원래 이래. 퀘스트가 아예 없어.”
“…그래?”
“하하. 깜짝 놀랐네요.”
“공략 끝나면 회식 한번 하는 걸로 하고, 준비부터 하죠.”
김기태가 차분히 위치를 지정했다.
넓은 들판.
딱히 특징적인 무언가가 없는 장소였다.
“이번엔 백의 연금술사의 지원이 없나요?”
“없어요. 던전 입장권을 구매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크으. 그거 번개 장벽 진짜 좋던데 아쉽네요.”
김기태가 적잖게 아쉬워했다.
정우는 김기태를 뒤로 한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물의 정령.’
반지에서 물의 정령을 꺼냈다.
푸른색의 반투명한 일렁임이 나타났다.
힐끗 김기태를 보았지만, 그는 물의 정령을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내가 떠올린 지역으로 가서 지면에 물을 공급해. 가득.’
정우는 놈들의 접근을 방어하기 위해 지면을 진창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의 정령이 사라지자마자 곧장 마력이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정령을 감지하는 건 다른 문제인가? 진수도 모르네?’
“D급 정도면… 오크인가?”
방패를 점검하던 이진수가 중얼거렸다.
“오크?”
정우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 너 오크 한 번도 안 봤냐?”
“어.”
“흐흐. 한번 붙어 봐라. 당분간 녹색만 봐도 토가 나올걸?”
“음. 넌 예정대로 방어만 할 거야?”
“그래야지. B급인데? 여기선 성장도 못 해. 그냥 너 도와주러 온 거야.”
“감사의 인사라도 해?”
“됐거든? ……뭐, 찔리는 거 하나가 있어서 그거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일했어야 했으니까.”
“찔리는 거? 무마?”
“나중에 이야기하자. 어차피 말해야 하니까.”
“캐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참는다. 아무래도 몰려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몰려온다고? 너… 이게 느껴지냐?”
“어.”
“방어준비! 공용 포메이션 2!”
정우의 대답과 동시에 정신을 집중하던 김기태가 버럭 외쳤다.
이진수가 얼빠진 표정으로 정우를 보았다.
“탱커. 뭐 하냐? 방어 안 해?”
피식 웃은 정우의 말에 이진수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들어야 할 건 나도 있는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어. …아무래도 나한테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
“오케이. 회식 끝나고 2차 한 번 하면서 다 뱉어라.”
“너나.”
이진수의 등을 툭 친 정우가 훌쩍 몸을 날렸다.
우르르.
흙먼지가 생겨나고.
“…오크 라이더?”
매의 눈으로 전방을 확인한 김기태의 음성이 흔들렸다.
“진수야!”
“확인했다!”
김기태의 외침에 이진수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불새 길드!”
“준비 끝났습니다!”
공 팀장도 방패에 체중을 실어 충격을 대비했다.
삼각형 형태로 세 개의 방패가 밖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뒤를 불새 길드원과 정우가 받치고 있었다.
가장 중앙에서 김기태가 사방을 둘러보며 화살을 메겼다.
오크 라이더.
낮은 등급의 몬스터인 늑대 종류를 길들인 오크.
병과로 따지면 기마병과 비슷한 놈들이었다.
“한정우 플레이어만 따라오면 여러 일이 생기네요.”
“…그러게요.”
김기태의 농담에 정우는 멋쩍게 웃었다.
“오기 전에 좀 줄여 놔야겠죠?”
“지시하죠.”
늑대의 크기는 컸다.
적어도 멧돼지 크기 정도의 거대한 놈들 위엔 여러 형태의 갑옷을 입은 오크들이 커다란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어디 용병단이라도 턴 것 같은 모양새다.’
모든 양식이 달랐다.
도드라지는 특징이 보이지 않고 무구가 통일되지 않은 게 딱 중소 규모의 용병단과 비슷했다.
‘진수의 반경이 상당히 넓네. 예정대로 저쪽은 신경을 덜 써도 되겠지만… 불새 쪽 다른 한 명이 조금 불안하군.’
김기태는 나머지 탱커 쪽을 주로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지막 브리핑! 탱커 3은 무시. 탱커 1에 전력 집중. 탱커 2는 상황 보며 지원 요청.”
“오케이!”
“원거리, 근거리 공격 금지.”
“오케이.”
“근거리, 틈새 틀어막기! 흘리지 마!”
“오케이!”
“원거리 준비!”
김기태의 지시에 그와 정우, 다른 한 명의 마법사가 스킬을 준비했다.
정우는 천천히 마력을 풀었다.
거미줄 같은 마력이 플레이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방으로 퍼졌다.
“놈들의 움직임이 이상한데? 조금 느려졌다.”
김기태의 말대로였다.
너무 빨리 들이닥친 탓에 지면을 전부 바꾸는 건 무리였지만, 어느 정도 물러진 지면이 늑대의 기동성을 갉아먹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약화!’
정우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첫 선제공격은 정우가 가했다.
저주가 펼쳐지자 더욱 비틀거리는 놈들에 반응한 김기태가 명령과 함께 화살을 쏘았다.
“공격!”
하나의 화살이 수십 개로 나뉘어 기동성이 떨어진 오크들의 머리를 덮쳤다.
푹, 푸푹!
C급 플레이어가 준비하여 날린 화살은 꽤나 강력했다.
“매직 미사일.”
정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탱커 1, 불새 길드원의 앞쪽으로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벌 떼가 날아들었다.
파앙, 파팡!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이진수는 힐끗 뒤를 돌아보고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저 자식. 생각보다 더 강해졌는데?’
김기태보다 더 강력해 보였으며.
‘여력도 있어.’
이격을 준비하는 자세는 자연스러웠다.
부담이 안 된다는 소리.
‘공격력만 놓고 보면 B급이라고? 이제 E급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무리 내가 정우를 믿어도 그렇지… 저건 너무 사기잖아?’
김기태의 화살과 정우의 매직 미사일 사이로.
화르륵!
다소 부족해 보이는 화염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진창이 예상보다 효과가 좋네.’
라이더가 나올 줄은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기동성이 생명인 늑대들의 발길을 묶는 방법으로는 매우 적절했다.
때문에 효과가 뛰어났다.
“원거리 공격 강화!”
그 말과 동시에 김기태의 화살에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더 많은 마력.
하늘로 방향을 바꾼 그의 활이 번쩍 빛났다.
“레인 애로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사이로.
쿠웅!
묵직한 파동이 느껴졌다.
“…워리어?”
오크 워리어.
D급에서도 당당히 보스를 도맡고 있는 오크 족의 전사가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화살을 튕겨 냈다.
“젠장! 방어전은 이게 마음에 안 들어. D급이면 등급에 맞는 놈들만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이진수의 음성이 들려와 고개를 돌린 정우의 눈에 녹색의 거체가 들어왔다.
다른 것들보다 커다란 늑대 위에서.
짐승의 두개골을 투구로 쓴 거체가 수하들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목에 걸린 이빨 목걸이가 요란했다.
“부족장!”
김기태가 경악하며 당황했다.
부족장은 C급의 보스다.
방어전이라고 해도 등장할 만큼 가벼운 놈이 아니었다.
방어전은 밖에서 감지된 마력보다 강한 놈들이 등장할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등급 위의 보스가 나온 적은 극히 드물었다.
보스 자체가 지닌 마력이 상당했기에, 어떻게든 게이트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경 축소!”
김기태의 비명 같은 지시에 빠르게 진형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아직 놈들이 다가오지 않은 상황.
“공 팀장! 워리어 탱 가능해?”
“…70.”
70%로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이진수.”
“60!”
“…솔로잉 말하는 거지?”
“아니. 일단 근처에 놈들까지 다 묶어둘 거니까, 최대한 워리어부터 정리하고 붙어!”
“아! 오케이! X발. 다행이네! 탱커 1 일반 오크 끌어당기고. 탱커 2 워리어 담당해!”
다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기이한 색의 화살촉을 꺼낸 김기태가 화살에 그것을 끼우고는 다시 겨눴다.
“워리어부터 조진다.”
“…오케이!”
긴장이 피어올랐다.
정우는 진창을 벗어나 다시 기동성을 되찾아 가는 오크들을 보았다.
‘저주에 대한 저항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자체적으로 마력도 몸에 두르고 있어. 골치 아프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크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지만.
‘정보는 아니거든. 번식력이 어떻게 된 건지, 토벌에 빠지지 않는 놈들이니까.’
놈들에 대한 정보는 많았다.
부족장과 워리어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정우가.
타닥, 크허엉!
일제히 도약하는 늑대들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차분히 마법을 사용했다.
증폭과 공명을 거친 마력이.
일제히 주변에 내려앉는다.
“그래비티.”
쿠우웅!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놈들에 아군마저 당황할 때.
꿀꺽.
마력회복물약을 마신 정우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매직 미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