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급 던전의 찬탈자-88화 (88/293)

88화

-살의 (2)

유서린 역시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세뇌.’

강세기를 세뇌한 물건이 총리에게 있다면 F급 정도는 어렵지도 않게 세뇌할 수 있을 테니까.

‘…강세기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긴 한데.’

정우의 표정이 너무도 다급하여 유서린은 속내를 숨겼다.

빌런 전담팀보다 먼저 만들어 놓은 전담 지원팀에 연락을 취하자.

“……진짜군요.”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닥터 브라운에 대한 소식을 알려왔다.

유서린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비타를 조작했다.

[ 美 인재 강탈에 난색을 표하다 ]

[ 천재 과학자 브라운의 의외의 결정 ]

[ 일본, 닥터 브라운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다 ]

[ 브라운 박사, 일본의 선진 시스템에 반해 귀화를 결정하다 ]

떡하니 자리한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이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세상은 한 차례 들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닥터 브라운의 귀화는 급진되었다.

미국 외교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닥터 브라운의 의사를 다시 확인하겠다고 나섰다.

“한정우 플레이어의 예상이 맞군요.”

“…….”

정우는 사정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콰앙!

바닥에 깔려 있던 잔해가 정우의 발길질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젠장! 설마 미국도 무시할 정도라니. 본인 입으로 귀화를 인정하면 그만이라는 거야?’

욕설을 삼킨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런의 집결지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막상 그곳에 연구 장치가 있다는 게 의아했다.

마정석분해장치.

‘작동시켜 봐야 알겠지만, 형태는 비슷해.’

그게 왜 필요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젠장.”

애써 참던 욕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마정석분해장치가 드문 건 아니다.

모든 국가에서 우선적으로 연구하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나 길드가 보유할 만큼 관리가 허술한 것도 아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유지석의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에 이 정도 물건은 만들어지는 즉시 협회에 보고가 되고 관리가 들어가야 옳았다.

그게 여기에 있다는 건.

‘분리해서 조립했든가. 아니면 다른 데서 가져왔든가.’

정우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유지석이라고 해도 빌런 협회가 작정하면 놓치는 구석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벌써 몇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었고.

“일본에서 닥터 브라운을 만났을 때 별일이 없었나요?”

유서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었어요.”

“세뇌와 관련된 물건이 있는 건 확실하군요.”

“…차라리 한국까지 같이 움직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음…….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유서린은 말끝을 흐리면서 고민했다.

잠시 망설이더니 정우를 향해 말한다.

“아무래도 그랬으면 한정우 플레이어도 같이 포섭되었었겠죠.”

“…저를요?”

정우가 미심쩍다는 투로 반문했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컸겠군요. 어쩌면 둘이 같이 있던 상황을 노렸을 수도 있고요. 그 던전에 들어갔을 때, 타소가레 길드원이 하나 붙었다고 했죠?”

“…네.”

“어쩌면 한정우 플레이어에게 상처를 입힌 다음에 치료를 목적으로 묶어두고 세뇌를 시켰을 수도 있겠군요. 닥터 브라운이 진짜로 귀국하려던 것이었으면….”

“왜 절 세뇌하려고 했었을까요?”

“…한정우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있군요. 제가 왜 한정우 플레이어가 이제야 E급이 되었음에도 전담팀원으로 뽑은 줄 알아요?”

“그러고 보면 한번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군요.”

“두 가지 큰 이유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 이유군요.”

“…다른 사람?”

“한 분은 유지석 협회장님. 이중 던전 때문인지 한정우 플레이어를 높게 평가하고 계시죠. 그에 따른 대우도 어느 정도 해주고 있고요.”

“…….”

“그리고 다른 쪽은… 수르트예요.”

“……재능의 인정?”

“맞아요. 재능의 인정. 수르트의 인장을 받은 것만으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소리니까. S급까지 성장한다면 수르트가 분명히 접근할 테니까요.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도 나쁠 것 없죠.”

“안전지대는 한국이고요?”

“당연하죠. 그때가 되면… 아마 제물의 인장을 없앨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거예요. 저도 도울 거고요.”

“…유서린 플레이어가요?”

“보고 싶거든요. 빌런이 없는 세상을.”

“그런데 왜 저한테…….”

“협회장님께서 기대하시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죠.”

‘마왕을 넘어설 자격.’

유서린은 뒷말을 속으로 내뱉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말씀하세요.”

“저번에 보고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조건이 까다로운 강탈은 아닌 것 같고…. 대충 계산을 해보니, 습격을 당했을 때 이후더군요.”

“습격?”

“이리.”

“…아.”

“표정을 보니 대충 짐작했나 보군요. 맞아요. 전 한정우 플레이어가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고 마력을 흡수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올 거예요.”

유서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발 다가왔다.

정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다가 멈칫했다.

잘못한 건 없다.

성장의 방법이 왜 같은 플레이어를 죽여야 하는 건지, 아직까지 가늠이 서질 않았지만.

그릇을 수복시키려면 플레이어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빌런이라는 선택지를 택한 것뿐이었다.

“……제 판단이 맞으리라 확신한 건, 빌런 전담팀에 들어오라는 요청에 재고 없이 수락했을 때부터였죠. 그래서 말인데.”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일렁임을 담고 정우의 눈을 보았다.

그 순간.

정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제안을.

“가능한 한 많은 빌런을 몰아드리죠. 빠르게 성장해 줘요. 나머지는 돌아가서 대화하고….”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아직 5분 정도 여유가 있어요. 밖에 있는 것들을 다 죽여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유서린이 밝게 웃었다.

“이게 일단은 제 계약의 증표예요.”

* * *

[ ‘메아리’가 성장합니다. ]

[ 당분간 ‘회랑의 열쇠’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

[ 변화가 시작됩니다. ]

[ 스킬 ‘잔존 마력’이 ‘영혼의 용기’로 일보(一步)합니다. ]

[ ‘아라크네의 마력’과 ‘언데드의 마력’을 확인하였습니다. 마력의 패턴이 변화합니다. ]

[ 스킬 ‘안정화’가 마력의 패턴에 녹아듭니다. ]

[ ‘아공간’이 변화합니다. ]

[ 퀘스트 완료가 유보됩니다. ]

갑자기 생겨난 벽이 와장창 깨어진다.

이전과는 달리 퀘스트가 떠오르지도, 보상을 내걸지도 않았지만.

스스로의 변화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많은 게 바뀌었다.

‘…….’

정우는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수많은 알람을 띄우는 게임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재료를 수집했습니다.

적군을 방어하였습니다.

…하는.

퀘스트 완료까지 얼마 남지 않았었던 마력 수치.

어지간하게 애간장을 태우던 그것이, 불과 3분 만에 해결되어 버렸다.

유서린은 자신의 적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제압하고, 기절시키고.

성기사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 모든 적들을 행동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름대로 속을 태우면서 결정한 부분인데, 너무 허무하군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칼끝이 빌런과 몬스터에게 향해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유서린이 가볍게 웃었다.

사람을 죽이고 마력을 성장시켰음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일말의 거부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감이 펼쳐지더니 다급히 움직여 빌런들의 목숨을 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적을 두고는 자고로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으니까.

‘애초에 일반인일 때도 살기 위해 빌런을 죽인 전적이 있으니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

정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가 있….”

쉿.

정우의 눈짓에 입을 다문 그녀가 기감을 펼쳤다.

‘……딱히 잡히는 건 없는데?’

의아함으로 물드는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정우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했다.

아스라이 떠오른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한 그의 신형이 돌연 움직였다.

“……!”

지하에서 터진 폭탄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메아리에게서 정확한 상황을 듣지 못한 게 아쉽지만….’

정우는 자신이 들이닥치던 당시를 떠올렸다.

흰 가운을 입은 노인과 검사의 위치.

‘…누군가 하나 더 있었어.’

뒤늦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히려 전투에서 벗어나고자 바닥을 벅벅 기며 뒤로 물러서던 한 놈이.

막상 건물 안에서 도주했어도 유서린 때문에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었던 놈의 기척이, 더욱 예리해진 마력감지능력에 잡혔다.

콰직!

장치의 아래, 이리저리 얽혀 있는 잔해를 걷어 내자 빛이 번쩍였다.

“……헛?”

유서린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설마 저기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투로 다급히 손을 뻗으려 했으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반응한 정우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손을 아래로 떨궜다.

콰드드드득!

“…아, 으으으!”

짓눌리기 시작한 중력 때문에 바닥에 내리꽂힌 놈이 억눌린 비명만 내질렀다.

단번에 공격을 무마시킨 정우의 눈이 놈과 놈이 있던 공간을 살폈다.

‘지하에 공간이 있었다.’

이리저리 무너진 잔해가 가득했지만.

역한 냄새가 확, 풍겨 나오는 장소였다.

“정지하….”

“정지하?”

“반갑수가 말한 빌런 협회의 끄나풀이에요. 연락책이라고 하더군요.”

유서린이 형편없는 몰골을 한 정지하를 알아보고는 스킬로 결박했다.

가뜩이나 중력 마법에 짓눌려 있던 놈이 까무룩 기절해 버렸다.

정우는 마법을 해제했다.

[ 스킬 ‘중력 조작’을 습득하였습니다. ]

염동으로 정지하를 들어 유서린에게 던져 주었다.

“……그거 염동력인가요?”

“맞아요.”

“음… 한정우 플레이어의 능력은 참 다양하군요.”

유서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놀라워했다.

스킬로 본 정우의 재능보다 드러나는 재능이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중 던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아버지와는 또 다르네.’

마치 자신이 본 재능과 실제 성장하는 재능의 폭이 매우 큰 것처럼 보일 정도.

유서린은 관심과 경계의 감정을 숨기며 발아래 떨어진 정지하의 입을 벌려 알약을 먹였다.

배니시(vanish).

정지하의 마력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제야 느껴지는 존재감에 유서린은 허탈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찌 된 스킬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나저나 이걸 알아챘다고? S급인 나도 알지 못했던 사람을?’

은신도 아니었다.

육안으로 봤기 때문에 존재를 알았을 뿐, 마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즉, S급에조차 마력을 숨기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

협회의 정보는 물론 수많은 인재들과 강도 높은 경험을 지닌 유서린조차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방법을 물어봐야겠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정우는 이미 반파된 잔해를 들추고 있었다.

‘내 마력감지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는 건 말이 안 돼.’

유서린도 가담하여 잔해를 없앴다.

‘잔해일 뿐인데 마력을 머금고 있다? 지하실은 따로 증축이 된 것 같네. 건설 업체를 파고들어 봐야겠어.’

유서린이 그렇게 여러 사안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사이.

정우는 반쯤 무너져 있는 지하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어두움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라크네의 마력과 언데드의 마력이 융화된 마력의 패턴은 두 종류의 장점을 고스란히 담아.

‘……!’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지하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