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다양한 지원 (2)
순백의 공간에 입장한 정우는 자신을 기다리던 이들에게서 책을 받아들었다.
이계의 여러 문화와 특징.
사건과 여러 비사.
떠돌이들의 소문을 비롯하여 이미 마녀들에게 밝혀진 크고 작은 비밀까지.
정우가 원하는 대로 모든 책을 정리하여 이미 회랑에 접속한 이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첫 책을 받아든 정우는 곧장 의자에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외우고 또 외우는 시간.
이계의 역사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웠고, 그에 따라 파생되는 여러 사건들은 정우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책을 덮자마자 다른 이가 다가와 새로운 책을 건넸다.
불필요한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효율적이었다.
‘검색해서 이동하고 구미에 맞는 책을 찾는 시간만 줄여도 엄청나군.’
절로 체감이 되었다.
읽은 네 권의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집중해서 읽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기억이 남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쌓이는 지식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술술 이계의 역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
한국의 역사보다도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아 있는 양 역시 실로 방대했으니, 아직까진 여유가 없었다.
접속하자마자 곧장 독서를 시작한 정우는 정확하게 백 권의 책을 탐독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또 부탁하지.”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것을 이용한 또 다른 성장.
머릿속에 집어넣은 정보를 정리하는 정우의 말에 마녀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랑에서 접속을 끊은 정우는 여전히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방어막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열쇠가 변화했다.
이전에는 곧장 정우를 재우며 꿈을 통해 회랑에 접속시키던 열쇠가.
이제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존처럼 회랑으로.
다른 하나는 마녀의 숲으로.
마녀의 숲으로 이동하는 것은 실제 육체가 고스란히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우는 차마 던전 안에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녀의 숲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던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오게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문제가 생길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꺼려졌다.
기회가 되면 한번 실험을 해볼 생각이 있었지만.
“아직은 무리지.”
지금은 딱히 그 정도로 급한 건 없었다.
훈련 시간의 대부분을 마녀의 숲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혼자서 하는 훈련보다 훨씬 나은 훈련 방법이었고 나름대로 성과도 좋았다.
정우는 마법을 해제했다.
방어막이 사라지고, 천천히 수풀을 가로질렀다.
이제 F급 던전은 너무 쉬웠다.
자신의 등급이 급상승한 것도 아니지만, 여유가 넘쳤다.
때문에 던전 공략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막상 던전을 공략했는데 공략 시간이 너무 짧을 경우 생길 문제가 있어서 회랑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너무도 탁월했다.
세 번의 공략.
그동안 읽은 책만 해도 삼백 권을 넘겼다.
지식은 지식대로 쌓았고.
정보는 정보대로 모았다.
더불어 자신의 수준을 숨길 정도의 시간도 충분히 벌 수 있었다.
던전 안에서 스킬을 점검하고 작정하고 움직여서 땀까지 흘린 정우는.
곧장 보스에게 달려갔다.
흉성을 터트리는 보스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었다.
퍼엉!
왼팔과 상체의 반이 사라지는 일격.
그 거센 일격과 함께 던전이 클리어됐다.
예의 던전 폐쇄 현상을 경험한 정우는 상태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장이 굉장히 더뎌졌어.’
밀려드는 아쉬움을 억눌렀다.
가볍게 던전을 벗어난 정우를, 유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더 빨라지네요?”
여덟 시간.
혼자서 클리어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빠른 시간이었다.
“그런가요?”
정우는 유 대리에게서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그녀는 그런 정우를 보았다.
“‘대장’에게 연락이 왔어요.”
대장은 유서린을 뜻했다.
“사냥인가요?”
그녀는 철저히 빌런을 상대하는 걸 사냥이라고 말했다.
“아뇨. 검증을 하나 더 한다는데요?”
“…….”
정우의 못마땅한 표정을 본 유 대리가 다급히 말했다.
“만족할 거라고 전해 달래요.”
“…만족이요?”
“네. 일단 들어오면 알려 준다는데요?”
고개를 끄덕인 정우는 유 대리와 함께 곧장 협회로 향했다.
그사이 연락이 된 건지, 유서린의 비서가 정우를 안내했다.
한 회의실로 들어간 비서가 자료를 건넸다.
“한정우 플레이어만 보시면 됩니다.”
자료를 받아든 정우가 내용을 읽었다.
“호오….”
나지막하게 감탄사가 나왔다.
이거라면.
‘진짜로 만족하겠는데?’
꽤나 괜찮은 검증이었다.
“아직 여유가 있죠?”
“아무래도 보름 뒤의 일정이니 여유가 있습니다만, 컨디션 조절과 개인 훈련을 위해서는…….”
“아뇨.”
정우는 비서의 말을 끊었다.
자료를 유 대리에게 넘기고선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 짧은 사이 자료의 중요한 부분을 읽은 유 대리의 눈이 커졌다.
“대전(對戰)?”
“다음 던전으로 향하죠.”
“……!”
유 대리의 눈이 커졌다.
비서가 당황해하며 정우를 만류하려 했지만,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정리한 유 대리가 정리했다.
“나 비서님. 이 건은 허락이래요. 그렇게만 전해 주세요. 저의 깐깐하고도 복잡한 고용주님께선 알아서 잘 참석하시겠다고, 꼭 좀 전해 주시고요.”
풉.
문을 나서던 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거 비꼬는 거 아니에요. 그저 팩트니까 그대로만 전해 주시면 돼요. 억양, 꼭 신경 써주시고요.”
말총머리가 얼이 빠진 나 비서를 뒤로한 채 정우를 뒤따랐다.
“깐깐하고 복잡한 고용주인가요?”
“고집도 강하고 복잡한 건이 많으니까요. 그거 알아요? 협회에서 받는 수당보다 저쪽에서 받는 수당이 훨씬 많다는 거?”
‘생각보다 제임스가 많은 돈을 주는 모양인데?’
“그래서 제가 고용주라고요?”
“그럼요. 돈 많이 주는 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 직장인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면 제임스에게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유 대리가 손을 휘저었다.
“에이. 그쪽은 유능한 사람 많아요. 한정우 씨 덕분에 버는 돈이니까 한정우 씨가 고용주 해요, 그냥.”
“…알았어요. 하하.”
“그나저나 바로 던전부터 돌아도 돼요? 대전에 나간다면서요.”
“대전에 나가니까 조금 더 강해져야 할 거 아니에요.”
“끄응. 그럼 다음이… 에휴. 전라도까지 가야 하네요?”
“대장 때문이죠. 뭐, 문자로 남겨도 될 내용을 굳이 불렀으니까 일정이 꼬였죠.”
“어련하시겠어요. 나라를 한 바퀴 다 도는 일정인데….”
“그러니까 조금 더 빨리 갈까요?”
정우의 채근에 유 대리가 못 말린다는 듯 눈을 흘겼다.
전라북도 익산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심심하지 않았다.
정우는 기억을 되뇌며 이계의 지식을 확실히 정립하는 것에 주력했고.
“아하하.”
정우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진 유 대리는 태블릿에 한가득 영화와 예능을 담아 와 관람하고 있었으니까.
“도착했어요. 천천히 준비해요. 저 먼저 가서 입장 진행할 테니까요.”
“알겠어요.”
유 대리가 총총 뛰어갔다.
상태를 점검한 후, 몸을 푼 정우가 게이트로 향했다.
보다 짙어진 연기.
E급으로 올라선 던전은.
‘마력부터가 달랐구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한층 뚜렷해진 존재감.
정확하게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정우의 본능을 자극했다.
“절차 끝났어요! 입장!”
유 대리가 빼락 소리를 질렀다.
“……유 대리님이 갈수록 재미있어지시네.”
웃음을 흘린 정우는 게이트에 입장했다.
[ 세이렌의 영토에 입장하였습니다. ]
“…세이렌?”
쏴아아!
문구에 눈이 커진 정우의 귓가로.
새하얀 포말과 함께 고운 모래를 적시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갈매기가 날아다닐 법한 청명한 하늘.
뭉게구름조차 아름다워 보일 정도의 밝은 분위기.
주변을 살핀 정우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세이렌을 미리 경험할 수도 있었군.”
일본을 다녀오느라 까먹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더불어 유지석의 말이 떠올랐다.
일본의 작전.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애당초 그걸 바라고 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 걸 테고.’
세이렌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정우는 이 순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아직 공략법을 못 들었는데?”
-미리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죠.
“…….”
팔짱을 끼고 핀잔을 건네는 메아리의 말이 너무도 타당해서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마력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퍼졌다.
‘미니맵.’
거미줄같이 주변을 장악한 마력에.
“……?”
의외로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어? 왜 몰려들지 않지?”
-세이렌에 대해서 아는 게 없군요. 에휴. 제가 불쌍하네요. (•̥̥̥⌓•̥̥̥)
“깍듯하게 대하더니 이젠 좀 편해졌나 보네?”
-그럴 리가요. 그냥 미리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о゚д゚о)
“하……. 두 번이나 들었지만 맞는 말이니까. …고맙다.”
-꺄아아! 칭찬받았다아!
제 볼을 감싸며 빙글 회전하는 메아리를 본 정우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서. 말이나 하지?”
부산을 떨던 메아리가 정우의 코앞으로 날아와 씨익 웃었다.
-세이렌은 바다에서 못 벗어나요.
“…어? 아닐 건데. 일본의 세이렌들은 도시를 점령했어.”
-아마 놈들은 ‘머맨’일 거예요.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음?”
-머맨은 뱀처럼 지상을 이동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세이렌은 지상으로 올라올 수 없죠. 아니면 세이렌으로 착각한 라미아든가요.
“종류가 다양하군.”
-아무튼 지금 계신 곳만 확인해서 위협이 없다면, 차라리 마녀 소굴을 먼저 확인하시는 걸 추천 드려요.
“…마녀 소굴이라니. 흠. 그래. 일단은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정우가 멈칫했다.
“아직 하루가 안 지났다.”
-놀아요! ( ✪ワ✪)ノʸᵉᵃʰᵎ
“…놀겠어?”
그의 핀잔에도 메아리는 팔을 파닥거리며 하늘을 날았다.
이쯤이면 찢어진 날개는 장식용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느 휴양지보다도 아름다운 모습.
보다 멀리 바다 쪽으로 마력을 퍼트리자 잡히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몇 안 되는 경험처럼 몬스터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지.
세이렌의 분위기는 차분하고도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후자 같군.’
해안가 근처에서 먹잇감을 앞에 둔 피라냐처럼 몰려드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네. 이건 또 신기하군.’
몬스터의 생활을 직접 확인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정우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자세히 세이렌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마력을 퍼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조절하는 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컨트롤하기가 어려워지네.’
다행히 세이렌들은 화들짝 놀라거나 흉성을 터트리긴 했지만, 정우를 발견하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꺄하하하.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 메아리를 힐끗 본 정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수많은 정보가 실타래처럼 머릿속에 정립된다.
단시일에 쌓은 정보가 워낙 많다 보니 여전히 정리가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사와 지리는 대충 입력이 끝났다는 거지.’
회랑에서의 정보는 현재 역사, 몬스터의 생태에 집중되어 있었다.
워낙 방대한 양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세세한 부분이 많았지만.
대략적인 흐름만큼은 이미 파악이 끝났다고 봐야 옳았다.
역사와 지리를 알게 되면서 몬스터의 물품에서 각각의 특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네.’
학자가 될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이 든 정우는.
‘세이렌의 약점과 공략법을 알아낸 후, 지질학을 공부하자.’
이계의 지질학을 다음 타자로 정했다.
“토양만으로도 위치를 알게 된다면, 꽤나 활용도가 높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우의 시선이 ‘대전’으로 향했다.
“적당한 수준만 보이면 되겠지. 1등 보상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차라리 그 아래가 내겐 더 이득이다.”
빌런을 상대하기로 한 이상.
대인전은 필수였다.
“대충 8강 정도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