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검증 (2)
“곧장 협회로?”
“맞아요.”
미리 준비해 놓은 건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에 탑승한 유 대리가 차분히 지시를 내렸다.
톡톡.
태블릿을 조작하는 그녀의 손톱 소리만이 차안을 가득 채웠다.
“허락. 떨어졌어요.”
“다행이네요.”
정우는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요청한 면담에 대한 답변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서린의 빌런 대책반에 들어가면 기회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지.’
강세기.
정우도 그에 대한 내용은 익숙했다.
아직 격변의 시대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일본으로 국적을 옮긴 그에 대한 뉴스는 어마어마했으니까.
가뜩이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민족에게 일본을 선택한 그는, 이완용 이상의 역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을 거야.’
그의 쪽지를 떠올린 정우는 내심 마음이 아팠다.
사실 확인은 협회장이 해줄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속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해.’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 정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협회의 로비에 도착하고.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던 유 대리가 멈칫했다.
“…하도 오랜만이라 헷갈렸네요.”
머쓱한 표정으로 방향을 바꿨다.
“유 대리님이 실수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잠깐 멍 때렸더니, 익숙하게 예전 자리로 가고 있었어요. 호호. 협회장님을 뵐 일이 얼마나 된다고…. 알죠?”
괜히 변명을 하는 그녀에게 씨익 웃어 준 정우가 집무실 앞에 섰다.
“협회장님. 한정우 플레이어 왔습니다.”
비서의 안내.
안에선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정우는 유 대리에게 살짝 손짓했다.
비서가 여는 문 너머의 풍경을 본 정우가 마른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던 협회장이 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의. 의문.
어떠한 것도 담기지 않은,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앉게.”
* * *
유서린에게 소식이 들어간 건, 정우가 협회장실을 방문했을 시점이었다.
“한정우 플레이어?”
정우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호감이었다.
일본에서의 일도 마음에 들었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괜찮았었다.
특히나 빌런에 대한 태도는, 무조건적인 적의로 가득한 이들보다 훨씬 나았다.
적당한 경계와 적의도 쓸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특히나 ‘이중 던전’에 관련된 존재를 직접 파악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여러 이유로 그녀는 정우를 점찍은 상태였다.
그리고 합류의 의사를 받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곧장 협회장님을 뵈러 갔다라….”
반개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뭔가 있네.”
닥터 브라운과 함께 일본의 한 던전까지 공략했다는 정보는 이미 들어왔다.
자신의 팀원이 된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아야 했다.
뒤통수를 맞는 것도.
뒷수습을 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한정우란 사람이 꽤나 마음에 든 그녀였다.
적어도 지금까진.
‘흠잡을 게 없었거든. 근데 바로 협회장실이라….’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협회장을 만나는 건 일개 사원이 대기업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것과 비슷했다.
갑작스러운 사원의 요청에 회장이 승낙한 셈.
그녀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히 기대하시는 모양이네.”
그녀는 다시금 정우를 떠올렸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에 취해서 오버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특별함을 맹신하던 여러 플레이어를 떠올린 그녀가 혀를 찼다.
“궁금하긴 한데….”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장 협회장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당황하며 인사하는 비서에게 손짓을 한 그녀가 대뜸 집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유서린 플레이어예요.”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의 눈이 소파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유서린이 곧장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정우는 그렇다 쳐도 유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유지석의 표정을 보고는 뭔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한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
‘설마 내 우려대로 오버라도 한 거야?’
“음…….”
그런 그녀의 옆에서 침음이 흘렀다.
‘뭔가 충격을 받으신 모양인데…?’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다행히 우려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협회장을 기업 회장과 동일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에겐 경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일본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괜찮은 이미지가 와장창 깨어지는 줄 알고 걱정했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협회장을 보며 묻는 그녀의 말에.
“……있네.”
흔들리던 눈빛을 갈무리한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부를 예정이었는데… 자네가 내 결정을 앞당겨 줬군.”
“……?”
유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뭔가 있다.’
협회장의 말도 문제였다.
머뭇거린 끝에 나온 긍정.
흔들리는 눈빛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정우 플레이어.”
“…네.”
“지금 이야기엔 한 치의 거짓도 없나?”
“네. 쪽지… 확인하셨잖아요.”
“확인…했지. 했네.”
그제야 유서린은 협회장의 손에 들린 종이를 확인했다.
항상 서류를 달고 사는 터라 파악이 늦었다.
‘조금 더 주변을 살피는 버릇을 들여야겠네.’
쪽지에서 자신을 자책하던 그녀의 눈이 협회장과 마주쳤다.
“유서린 플레이어.”
“…네. 협회장님.”
“빌런을 상대하면서 은밀히 부탁할 일이 생겼네.”
“은밀…히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적어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던 협회장이었으니까.
S급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도 항상 ‘조심’을 입에 달고 다니던 분이었다.
적어도 음지의 일은 맡긴 적도 없었던 분이 ‘은밀히’라는 단어를 꺼냈다.
‘저 쪽지가 뭐길래?’
“일본의 타소가레 길드.”
“…그 강세기의 길드 말인가요?”
“그렇네. 한정우 플레이어가 아주 의외의 정보를 물어다 줘서 말이네.”
유서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타소가레와 강세기가 언급될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강세기라고 하면 적어도 일본에선 유지석에 준하는 평가를 받는다고 알려진 S급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녀에겐 아버지를 배신한 변절자에 불과했지만.
자연스럽게 말투가 곱지 않았다.
“강세기가 협박이라도 하던가요?”
그녀의 말에 유지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회한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
“협박은…… 그가 받았지.”
“…네?”
협회장의 말에 유서린의 눈이 커졌다.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누가, 누구를?
감정을 떠나서 강세기는 확실한 S급 플레이어였다.
그가 한국에서 계속 성장했다면 유지석에 준하는 영웅이 한 명 더 있을 거라는 아쉬움도 많을 정도로.
그가 한국에서 역적이 된 이유도 그의 능력이 너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결계사 중에서도 최고를 다투는 수준인 그의 능력에 붙은 권능(權能).
동결(凍結).
그만큼 유명하고 강한 자가.
“……협박이요?”
“하! 나도 믿기지 않네.”
협회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성장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위기를 뛰어넘었다.
강세기가 일본으로 갔을 때, 알려지진 않았지만 유지석은 그를 찾아 일본까지 갈 기세였다.
인천에서 던전 브레이크만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공항으로 달려갔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그는 강세기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세기 측에서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않았다.
철저한 무시.
그만큼 강세기는 한국에 관련된 일을 지극히 꺼렸다.
국민들은 그저 주제 파악이니, 그래도 염치가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하곤 했지만.
쪽지를 본 유서린은 그가 왜 한국과 관련된 일에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해 버렸다.
일본에 ‘세뇌’와 관련된 물건이 있다. 총리를 조심해. 길드도….
미안하다. ‘어머니’가 잡혔었어.
구할 자신이 있었는데… 오히려 세뇌를 당했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건 S급부터였지만… 이미 내 주변엔 감시자가 가득하더군.
지금도 세뇌를 이겨낸 건 아니야. 그래서 부탁 하나 하자.
내가 필요한 일을 하나 만들어 줘.
그리고 ‘저주 해제’가 가능한 자를 섭외해 줘.
믿을 건… 너밖에 없다. 바람돌이.
다시 한번, 미안하다.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 그는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귀화한 그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강세기의 역할은 컸다.
모든 결계사가 그렇듯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누군가는 채워야 했었고.
그나마 바람 마법으로 결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유지석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만 했다.
결과는.
생각지도 않은 세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 내고 끝났다.
“이게…… 진짠가요?”
유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가 크게 무너졌던 날.
그녀의 앞에서조차 눈물을 삼키지 못했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정우 플레이어가 거짓말로 이것을 꾸며낸 게 아니라면 말이네.”
그녀의 시선이 정우에게로 향했다.
날이 선 눈빛.
“…혹시라도 거짓말이라면….”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짓일 이유가 없죠.”
정우를 주시하던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떨궜다.
원망의 대상이었기에 그의 필체조차 잊지 않았다.
아버지 유지석을 부르던 호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바람돌이.
“…총리가 범인인가요?”
“그럴 것 같네.”
유지석이 차분히 대답했다.
‘마력이…… 흔들리는군.’
하지만 정우의 눈엔 요동치는 그의 마력이 보였다.
차분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격정이 그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장 믿는 이에게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강세기에게 접근을….”
“아니. 아니지. 그쪽부터 접근하면 안 되는 일이네.”
유지석이 고개를 저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는다.
“일본과 공동 작전을 만들도록 하겠네. ‘세이렌 토벌’이라면 총리와 만날 시간도 충분할 걸세.”
“……!”
유서린과 정우의 눈이 커졌다.
“협회장님! 세이렌은….”
“아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총리를 파악할 기회가 없을 걸세.”
유지석은 결정을 내린 듯했다.
정우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협회장님이 엄청 큰 결단을 내린 모양인데? 세이렌이라면… 미해결 던전 브레이크인데….’
-세이렌? 그 아류가 여기에 있나요?
‘아류?’
-좋은데요? 잘난 척하는 멍청이한테 알려주면 좋아라고 으스대며 놈들의 약점을 알려줄걸요?
‘약점이 있어?’
-히히. 있어요! 아주 개판인 약점이.
‘네가 알려주면 되겠네.’
-으으윽! 알려드리고 싶지만, 약점이 있다는 것만 알아요. …흑흑. 너무 슬프네요. ( ˃̣̣̥᷄⌓˂̣̣̥᷅ )
메아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정우는 피식 웃음을 흘린 후에 무던하게 말했다.
‘개판인 약점이라니. 생각보다 기대가 되는데?’
정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가고 있었다.
“……좋아요. 한번 생각해 보죠.”
“세부적인 내용은 더 짜보도록 하게.”
“알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유서린의 눈이 뜬금없이 정우에게로 향했다.
“그래도…….”
‘…음?’
정우가 그녀의 눈빛에 의아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전에.
“판단을 먼저 해봐야겠어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정우 씨?”
“네.”
“빌런 전담팀. 관심이 있어서 온 거죠? 이 소식은 덤이고.”
“지금은 중요도가 바뀌긴 했지만, 그렇죠.”
“그럼 먼저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그녀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빌런, 몇 마리만 잡아볼래요? 검증도 할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