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결단 (1)
-이곳이 왕의 터전이에요.
앞선 말의 반복.
하지만 느낌은 많이 달랐다.
“위대한 마법사는 각자의 영역을 지니오.”
어느 부분에서 합이 맞은 건지 이지스와 메아리가 서로 말을 이었다.
-각자의 마법, 각자의 패턴으로 만들어진 영역은 왕께서도 익히 알고 있는 단어로 불려요.
“던전(Dungeon).”
“……!”
“태초의 던전은 마법사가 만든 인위적인 영역을 뜻했소. 우리의 마을도 마찬가지요. 이곳은 우리만의 영역이니까.”
-마법사는 비밀스러운 존재예요.
“자신의 것은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하오. 우리의 회랑처럼….”
-그게 바로 던전. 마법사의 영역. 즉, 터전이에요.
“…회랑에 준한다 이건가?”
“허허. 준하는 게 아니오. 이곳은 또 다른 회랑 그 자체. 이것 아시오? 나는 왕 덕분에 회랑의 탄생을 엿본 셈이오. 왜 우리의 비기가 회랑인지. 왜 통로인지. 왜 공명인지!”
이지스의 말이 격양되었다.
“정신체만 이동하는 건 여태껏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소. 하! 처음 알았소. 우리의 비기가 불완전한 미완성이라는 것을….”
-회랑? 왕의 나라에 이런 속담이 있는 거 알아?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음?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쁘군.”
-푸힛. 회랑은 초급 단계지. 명칭이 왜 회랑이겠어. 복도나 겨우 만들었단 의미야.
“…허, 허허. 왕께 듣던 것과는 달리 꽤나 방자한 존재로고.”
이지스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 반해 메아리는 귀까지 파댔다.
‘얄밉다….’
정우는 둘의 신경전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신경을 박박 긁는 메아리와 그런 그녀를 경계하는 이지스.
“공명이라고는 할 줄 아나?”
-공명? 꺄하아!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게 이런 거지. 마녀로 유명했던 건 너희 선조지, 너희가 아니야.
“하…. 꼭 우리 선조를 보고 말하는 것 같군.”
-응? 말 안 했어?
“뭘 말이냐!”
-우리……에 대해서.
“……?”
-왜, 음유시인처럼 세상의 모든 기록을 모아대던 너흰데, 우리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만난 적이나 있나?”
-당연하지.
“종족명이 어떻게 되지?”
-……몰라?
“…그게 뭔 말인가?”
-우리 기억은 힘과 비례한단 말이야. 이곳에서라면 조금 더 기억하는 게 많지만… 아직은 멀었어.
“그 말은… 왕을 비하하는 거로군.”
-……! 아,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부정! Q–(’̀-’̀Q )
메아리가 작은 팔을 뻗으며 이지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릉!
이지스의 주변에 생긴 막이 메아리의 접근을 막았다.
“벌레를 막는 데 굉장히 좋은 마법이지.”
언제부터 방어막이 모기장이 된 건지는 모르지만, 이지스도 얄미웠다.
갑자기 어린아이 둘이 생긴 느낌이었다.
수장의 근엄함.
절대자의 품격은 어디로 가버리고, 저급한 다툼이 가득했다.
“감히 왕을 폄하하는 말투로 어딜 넘보는 건지….”
-너… 거짓말이나 하는 주제에….
‘…진짜로 내 오른팔 왼팔, 이런 걸로 싸우는 거 같은데?’
“……!”
정우의 차게 식은 눈빛을 본 이지스의 눈이 커졌다.
흠흠, 헛기침과 함께 뒤늦게 분위기를 잡는 그를 향해 메아리가 혓바닥을 내밀었다.
-패배를 인정하시지?
“후우. 이거… 좋지 못한 기억이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이지스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곳은 왕의 영역이 되었소. 회랑보다 더! 나은 터전!”
“그 말은 이건가?”
손을 빙글 돌리자 나타나는 건 통로.
하지만 평소의 주먹만 한 것과는 달리.
“……!”
전신을 가득 담고도 여유로울 정도의 크기가 나타났다.
“…게이트.”
던전을 공략하면 나타나는 그것.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만든 통로가 게이트가 되자, 정우는 메시지의 말을 이해했다.
‘진짜로… 이 던전은 내 것이 된 거야.’
두근!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하나 더 찾은 것 같아서.
“우리 왕은 조심성이 좋구려.”
-일족을 멸족시킬 뻔한, 조심성이 없는 놈들과는 다르지.
“…흐음. 왕이여. 이 버릇없는 아이를 억겁의 시간에 가두어 둬도 되겠소?”
-푸헤. 네가? 나를? …주인님. 도와주실 거죠? ε=ε=(っ*´□`)っ
“…기운이 빠지는구려.”
-워, 원래 힘만 되찾으면 너는 한 방에…!
“그때를 기대하도록 하지.”
둘이 시선을 부딪쳤다.
* * *
메아리의 지식은 아쉬웠다.
항상 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갈 법한 지식은 어느 순간 딱 막혀서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에 반해 이지스의 지식은 매우 폭이 넓었다.
방대한 지식은 과연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어느 한 분야를 파고들면 금방 한계가 나타났다.
‘메아리는 폭이 넓진 못하지만 깊이가 있고, 이지스는 반대야. 메아리가 기억만 거의 되찾으면 효율이 엄청나겠어.’
멀티버스든, 세이브와 로드이든.
이계를 고스란히 재현한 던전에서 이계에 대한 지식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회랑엔 접속이 되려나?”
“가능하지 않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지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곧장 눈을 떴다.
“접속되오.”
“…다행이군.”
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것이 된 던전이 어떠한 변수를 만들어 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났나?”
“지났을 거요.”
“시간의 흐름만 파악해 줘.”
“걱정 마시오.”
이지스는 곧장 열쇠를 돌리는 정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회랑’에 접속하겠습니까? ]
시야가 변한다.
여전한 순백의 공간이 정우를 맞이했다.
“이왕 접속한 김에 이계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해볼까.”
정우는 책을 펼쳤다.
수호자라는 괴이한 명칭의 세계에 대한 공부는 여전히 필요했다.
‘한국사도 제대로 모르는데… 세계사도 아니고 이계사라니.’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정우는 무섭도록 책에 집중했다.
회랑의 흐름은 현실의 몇 배는 느렸다.
그만큼 효율이 좋았기에, 이때를 잘 이용해야 했다.
여러 권의 책이 정우의 옆에 쌓였다.
“……음?”
정신없이 책을 읽던 정우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들렸다.
‘아직 시간이 안 됐나? 아니면 내가 조금 더 성장해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건가?’
의문이 생겼지만 정우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서적을 탐닉했다.
이계의 지식.
전반적인 지형을 외우고, 지형에 걸맞은 특이한 기록을 열람하며 지식을 쌓았다.
“……이상한데?”
아무리 마력이 늘어났다고 해도 이 정도로 회랑에 오래 머무는 건 예상 밖이었다.
수십 권의 책.
족히 며칠은 흘렀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력 수치도 확인하지 않았네….’
성장한 건 확실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파악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갑자기 마력 수치가 100단위로 늘었을 리도 없고…. 내가 모르는 변화가 또 생긴 건가?”
그러고 보면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정도면 이지스가 되었든 다른 마녀들이 되었든, 누가 접속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지스가 내 육체에 뭘 했나?’
그런 의심이 순간적으로 들 정도였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열쇠로 나가 보자.”
아무리 해도 연결이 해제되지 않자, 정우는 열쇠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마녀의 숲.
그곳에서 눈을 뜬 정우는 들판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어? 벌써 돌아왔어요?
파닥거리는 메아리가 날아와 배 위에 앉았다.
정우는 고개만 살짝 들어 그녀를 보았다.
“벌써?”
“…허허. 그냥 둘러만 본 거요? 왕 답지 않으시오.”
“……?”
이야기가 이상했다.
정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회랑에 접속한 지 얼마나 됐지?”
“한 2분가량 되었을 거요.”
-금방 나왔어요. 수준이 낮아서 볼 게 없어요?
“…허, 허허. 어디서 날벌레가 윙윙거리오.”
파직!
이지스의 손에서 번개가 튀었다.
‘2분?’
그 번뜩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정우는 경악했다.
2분이 아니다.
족히 이틀은 시간이 흘렀을 것만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또 달라졌어.’
심지어 효율이 더 높아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허…. 시간의 흐름이 그 정도로 비틀렸단 말이오?”
이지스가 감탄했다.
시간의 결계를 다뤘던 그로서는, 관심이 가는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호오. 정말로 굉장한 정보로군요. 왕의 시간으로 며칠이면 저 조악한 정보는 다 빼앗아 먹을 수 있겠어요! 그럼 더 이상 필요가 없겠죠?
메아리가 박수를 쳐댔다.
또다시 시작된 투덕거림에 학을 뗀 정우가 한숨을 내쉬며.
“상태창.”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
그리고 커지는 눈.
성장을 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 밖인데?’
* * *
“클리어?”
사라지는 게이트를 본 타소가레 길드원이 안경을 고쳤다.
클리어가 되는 던전이 아니었다.
반복 던전.
하지만 옅어지는 게이트는 엄연히 클리어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나온다!”
우르르 몰려든 인원이 정우의 부축을 받고 있는 아와 겐고를 빼앗듯 데려갔다.
의료진까지 달려들어 아와 겐고의 상태를 파악하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낮은 등급의 정우는 무사하고, 높은 등급의 아와 겐고는 정신을 잃었다.
“저주였습니다.”
“저주요? 저희가 듣기로는….”
“글쎄요. 자세한 건 저분이 깨어나면 말해 주지 않을까요?”
“저주라면 어떻게 당신은 멀쩡한 건가요?”
길드원의 물음에 정우는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저주에 저항하는 아이템이 좀 있어서요. 일단 피곤하네요. 저분 대신 싸웠더니….”
“이, 이게…!”
이를 드러내는 길드원을 무시한 채, 정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유 대리에게 다가갔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은 생긴 것도 같잖게 생긴 주제에 한국인을 너무 무시하네요. 지들 머리 위에 있는 놈도 태생은 한국이라는 걸 모르는 머저리들인가?”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 대리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타소가레 길드원들의 무례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나 보네요.”
“저 거지 같은 새끼들이 치근대는 걸 무시하니까 별 쇼를 다 하잖아요. 아, 열 받아! 거시기를 차버리려다가 참았다니까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고생했네요.”
씩씩거리던 그녀의 태도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별일 없었어요.”
정우는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닥터 브라운은 연구실에 있나요?”
“…네. 연구실에 있을 거예요.”
“진짜 안에서 별일 없었던 거 맞죠? 저 새끼들 하는 걸 보면 또라이던데, 아와 겐고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뭐, 소송 걸 일 있어요?”
“없어요.”
‘뭐, 또라이 짓을 당할 시간이 있었어야지.’
헛웃음을 삼킨 정우는 이지스의 말을 떠올렸다.
‘다행히 던전의 구조 변화에 말려들진 않은 것 같소. 음… 죽여도 되오? 아니면…. 아아. 알겠소. 그럼 정신만 조작하도록 하겠소. 대충 열심히 싸우다가 당했고, 왕께 구함을 얻었다는 내용 정도면 충분할 것 같소.’
정신 조작.
아와 겐고는 정신을 차려도 조작된 내용밖에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그것도 자신에게 목숨을 구함받은 기억으로.
‘나쁠 건 없지.’
아와 겐고라는 엑스트라에 대해서 잊은 정우는 유 대리와 이동하며 입가를 올렸다.
위험한 순간은 있었지만.
‘얻은 게 훨씬 많아.’
정우는 상태창을 떠올렸다.
근력 : 45(+5)
민첩 : 47(+5)
체력 : 47(+5)
마력 : 24(+10)
더불어 갱신된 메시지까지.
[ 메아리의 성장(2) ]
최후의 ???종족 ‘메아리’는 약간의 힘을 되찾았다. 하지만 전성기의 그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녀를 성장시키자.
조건 : 마력 수치 30
등급 : SS+
보상 : 잊어버린 지식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