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라크네의 흔적 (5)
멈추었던 시간이 흘렀다.
순백의 세계가 일변하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의 동굴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신음이 가득했다.
일족의 신음을 뒤로 한 채 동굴 앞을 본 이지스의 눈이 커졌다.
고치.
리암이 있었던 자리에 남은 건, 커다란 고치 하나뿐이었다.
실로 만들어진.
“……거미줄.”
“……리암?”
뒤이어 다가온 레베카가 침음을 흘렸다.
빠르게 회전한 머리가 답을 내렸다.
마력 동화 때문이라고.
거미는 자신을 키워준 리암의 마력 패턴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때문에 모든 일족을 토해 낼 당시 리암만큼은 토해 내지 않았다.
동일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기.
혹은 일부로.
‘패러사이트…. 이런…….’
이지스는 아차 했다.
마력 동화가 이루어진 원인이 자신이 건 저주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감염.
오랜 시간 동안 마력의 흐름을 일체화시켰던 탓에.
“…리암이 막은 거였구나.”
“리암이 막다니요?”
레베카의 물기 가득한 눈이 이지스에게 향했다.
“패러사이트. 당시에는 일족을 존속시킬 방법이라고 떠올렸던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뻔했었다.”
이지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장으로서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신감이 초라해질 정도로 구겨졌다.
자신의 계산은.
“……내가 틀렸었구나.”
틀렸다.
이지스는 자신의 실수를 빠르게 인정했다.
“아버지!”
“거미의 마력 패턴은 이미 리암과 비슷했다. 리암을 잡아먹으면서 더욱 같아지려 했겠지. 그리고 내가 건 저주에 의해 마력 감염이 일어나면서… 리암의 패턴이 우리에게 전이되었어야 옳았다.”
거미는 영악했다.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챈 건지는 모르지만.
“…내 실수를 이용할 줄 알 정도의 지능이 있었다는 소리야.”
“…실수요?”
리암의 패턴을 타고.
모든 일족을 감염시켰다면.
‘망했겠군. 모조리…….’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라크네. 그 영악한 거미의 편이었다.
“그걸 막은 게 리암이다.”
“…리암이요?”
레베카가 고치를 보았다.
그 안에 갇혀 있을 것 같은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결국… 리암이 마력 패턴만 계속 바꿀 수 있었다면, 패러사이트의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
청년은 책임을 다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거미의 마력 패턴이 자신과 흡사하다는 것에서.
영악하게 자신의 마력 패턴을 마녀들의 패턴과 바꿔놓았다.
패러사이트에 감염당한 마녀들과 스스로를 격리하며.
끊임없이.
“……리암!”
“그사이에 계속 장악당한 걸 거다. …거미에게.”
“그럼 어떻게 해요?”
레베카가 다급히 물었다.
* * *
“어떻게 해야 하지?”
정우의 물음에 이지스가 침음을 삼켰다.
“내 지식을 넘어섰소. 나는 이 아이를 분리시킬 자신이 없소.”
“……?”
정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지스는 그런 그를 지그시 보았다.
“왕께서 해보겠소?”
“……제가요?”
어찌나 당황했는지 정우는 자신을 가리키며 이젠 익숙해진 반말 대신 존댓말을 내뱉었다.
“이미 전개한 마력을 다시금 바꾸는 것. 그 정도의 패턴 변화라면….”
이지스가 정우의 손을 잡았다.
“가능하지 않겠소? 다시 한번… 도전해주기를 바라오. 우리 일족의… 미래를 위해서.”
[ 아라크네의 흔적 ]
소멸시킨 줄 알았던 아라크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라크네와 리암의 마력은 동화되었다.
뒤섞여 버린 두 종류의 마력을 갈라 소멸시키기 전까진 아라크네는 언제고 다시 리암의 마력을 매개체 삼아 부활할 것이다.
리암을 분리하여 아라크네의 부활을 막을 것.
혹은 리암을 죽여 아라크네의 부활을 막을 것.
등급 : A+
보상 : 리암(분리 성공 시), 마녀의 미래
실패 : 리암의 소멸, 마녀의 쇄락, 아라크네의 부활
[ 제한 시간 02:59:59 ]
퀘스트.
‘왜… 이렇게 세부적이지?’
퀘스트를 읽은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퀘스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보상과 실패까지도.
‘……음.’
정우는 다시 한번 퀘스트를 읽었다.
‘동화된 마력을 갈라서 소멸시킨다.’
정우는 고치를 눈여겨 살폈다.
전혀 두 종류라고는 보이지 않는 마력.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고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두 종류의 마력이라고?’
설명을 듣고, 퀘스트의 설명을 보지 않았다면 아라크네가 새끼라도 쳐 놓은 거라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마력… 동화.”
심각할 정도였다.
수천, 수만 가닥의 실 중에 아주 미약하게 색이 다른 실 한 가닥을 찾아내는 수준.
‘아니, 그보다 더 심하다.’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싶을….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해보자.’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반복한 정우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가 떠졌다.
흐름을 읽는다.
한 덩어리로 보이던 고치가 여러 선으로 분류된다.
마력은 고정되는 법이 없다.
언제나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혈관과 같아. 한 점을 시작으로 흐르는 방향을 정해서….’
파고든다.
천천히 기우는 상체가 고치와 가까워졌다.
패러사이트의 영향이 남아 있는 터라 이지스는 혹여나 정우의 피부가 고치에 닿을까 봐 염려하며 만약을 대비했다.
하지만 이지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우의 집중은 속도를 붙여가고 있었다.
‘흐름을 읽는다.’
빠르게 파고든 집중력.
한 가닥의 마력의 실을 잡고, 흐름을 역으로 계산한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이거군.’
이지스의 말이 이해가 갔다.
‘패턴이 변하고 있다. 계속해서, 빠르게.’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금고의 비밀번호 같았다.
끊임없이 변화하다가 하루에 한 번, 지정된 시간에만 딱 고정되는 숫자의 나열.
‘빠르진 않지만 멈춰 있진 않아.’
새삼스러웠다.
영상을 관람하듯 본 과거 속에서 리암은 꽤나 고집스러운 아이였다.
그리고 고작해야 거미를 관찰한 게 전부였던 아이였다.
‘그게 아니었어.’
거미를 성장시키는.
마정석을 흡수시키기 위한.
거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
끊임없는 연구는 그에게 다양성을 안겨 주었다.
‘이 사람도… 천재군.’
자신의 패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라크네의 마력이 변화할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필터가 되어 스스로의 마력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혹여나 문제가 될 수 있는.
‘공명까지 없앴어.’
마녀들의 그것과는 패턴이 달랐다.
그들의 정수 중 하나인 장치까지 발동시켰던 정우는 그 사실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본론을 숨긴 문제에 불과하지만… 더 없이 효과적이었네. 이지스가 왜 미래라고 칭한 건지 알겠어.’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먼 무언가를 쫓던 정우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이상하게… 나보다 뛰어날 것 같진 않네.’
그 생각과 함께.
고치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선에서 다른 선으로.
이리저리 꼬인 호수에 푸른색의 물이 들어가는 것처럼.
셀 수 없이 이어진 고치의 패턴을 읽어 나가는 정우의 눈동자가 점차 빨라졌다.
‘조금 더 빨리.’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걸 해결할 수 있다면.
‘나밖에 없다.’
그런 기이한 믿음이 생겨났다.
믿음?
아니다.
정의.
규정.
‘……확신.’
그런 확신이 생긴 정우의 두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마력.
눈동자에 담긴 그것이 아라크네가 남긴 흔적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 신념 ]
등급 : A+
자신의 마력에 자신감을 가진다.
마력적 효력이 상승한다.
떠오르는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차분히.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하여.
‘끊는다.’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 * *
무겁게 가라앉은 눈.
이지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등만이 보일 뿐이다.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때때로 천천히 고개만 돌리는 모습.
그저 관찰하고 있다고 여겨도 될 정도의 무변화.
하지만 무섭도록 집중하는 정우의 등이 조금 커진 듯했다.
‘…….’
처음엔 느끼지도 못했다.
마력의 흐름을 따라 역행한다는 발상 정도는 그도 해본 것이었고, 실제로 실행도 해본 상태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이지스는 실패했다.
굳이 이 던전의 흐름을 비틀어서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와는 달랐다.
딱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는 그의 압도적인 재능에, 이지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했었다.
소수의 인원이지만 항상 압도적인 강자로 분류되었던 마녀 일족.
그들의 수장인 자신조차 도무지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의 찬란함이 ‘그’에겐 있었다.
때문에 거미 사태도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라면.
왕으로 섬겨도 전혀 아쉽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다르지…….’
그에 반해 갑자기 등장한 인간은 처참할 정도였다.
자신이 보낸 열쇠를 들고.
비틀린 자신들의 시간을 돌려준 인간은, 분명히 처참할 정도였었다.
빠른 성장.
성장보다 빠른 이해도.
그리고….
‘적응력.’
이해를 하고 활용을 하는 게 남달랐다.
이미 발현된 마법을 비틀어서 다른 형태로 바꾸는 걸 보며, 이지스는 문득 ‘그’를 떠올렸었다.
다르지만 같다.
자신에겐 없는.
‘…재능이.’
용의 맹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건 맹세.
어기는 건 결코 용납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
자신이 열쇠를 넘기며 한 맹세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허무맹랑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에게 설명한 것처럼.
처참한 현재의 수준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산산이 조각난 그릇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한 번의 수복에 많은 걸 걸었었다.
하지만 다시 본 그는 어떤가.
딱 봐도 보다 많은 조각을 수복한 채로 나타났다.
이전보다 나아진 수준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에게 정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자신 앞에 설 자격이 있었다.
‘변한다….’
고치의 흐름이 달라진다.
정우의 눈길을 피하려는 듯,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했다.
곧장 자신이 실패한 수준에 다다랐다.
이 정도까지?
놀랐던 순간이.
“……허무할 정도로군.”
허무하리만큼 가볍게 지나친다.
재능만 놓고 보면.
‘그와 비슷할 정도다. 물론… 그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은 없지만.’
이지스는 한탄했다.
왜 자신은 도망을 쳤을까.
자부하던 능력이 그의 앞에선 한낱 촛불처럼 흔들렸고.
압도적인 재능 앞에 스스로의 가치가 스러져 버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었다.
보다 어린 나이의 자신은.
‘자존심만 센 멍청이였지.’
이제는 안다.
자신에게 내밀었던 그의 손을 잡았더라면 미래는 달라졌을까.
자신을 찾았던 그의 손을 잡고, 숲을 벗어났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지스는 정우의 등을 보며 그를 떠올렸다.
결코 떠오르지 않는 그의 유년 시절을 그려 본다면.
이런 어리숙함 속에 번뜩이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피식.
이지스는 수염을 매만졌다.
벌써 두 번이나 부탁을 했다.
리암의 재능은 분명했다.
호기심도, 관찰력도, 끈기도 충분했다.
그를 차기 수장으로 점치고 있었을 만큼, 리암의 재능은 어릴 때부터 빛났었다.
같이 연구를 했으면 좋았을까.
그랬다면 리암에게 이런 짐을 안기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지스는 나지막한 한탄과 함께 스스로를 자책했다.
‘늙었군…….’
오랜 세월이었다.
진작 죽어 버렸을 목숨이, 거미 안에서 연명되었다.
멈추었던 시간이 흘렀기에 나이가 더 들은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암을 구해 준다면 그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리라.
여전히 회랑 안에서만 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회랑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고, 그 안에서 쌓을 수 있는 지식은 현실의 몇 배가 될 테니까.
리암은 그 정도의 재능을 가졌고.
자신을 뛰어넘을 자격이 있었다.
모든 걸 넘기면.
‘…나 또한 넘어갈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군.’
진심으로 한번 누군가를 섬겨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족의 미래.
언젠가 ‘그’에게 모든 걸 맡겼을 때를 떠올려 봤던 순간처럼.
그가 아닌 왕의 등에서.
이지스는 새로운 역사를 느꼈다.
‘이 체계부터… 파악해야겠구나.’
던전으로 시선을 돌린 이지스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