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라크네의 흔적 (4)
“회랑은 버려 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지스?”
정우의 물음에 이지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소.”
숙인 고개를 드는 이지스의 얼굴엔 멋쩍음이 가득했다.
“이곳은 참 색다른 곳이더구려.”
이지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있던 터전.
마녀의 숲이라고 불리던 그곳을.
“재현해 놓았소.”
“재현?”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이동부터 하시구려. 왜 우리가 이곳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 설명하겠소.”
천천히 걷는 이지스의 얼굴에는, 갇혀 있었다는 말과는 달리 조급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밝은데?”
“허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얼마 만의 실체인지. 공기가 이렇게 달콤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오. 허허.”
진심으로 즐거운 모양인지 이지스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정우는 이지스를 살폈다.
아라크네를 죽일 당시 느꼈던 절대자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더 자연스럽고 고요한 마력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정우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대단하군.”
수르트?
유지석.
그들의 반열에 발을 들이고 있는 유서린도.
‘이 정도는 아니야.’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라 불리는 뇌신이 이러할까.
정우는 이지스의 힘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별말씀을.”
이지스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죽지는 않겠지?”
“저 눈초리가 괘씸한 인간 말이오? 안 죽소. 대신 악몽만 좀 꿀 뿐이오.”
짓궂은 표정이 닥터 브라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조금 걷자 나오는 풍경은 꽤나 고즈넉했다.
환상 속에서 보았던 마을을 닮았으면서도 노후 된 흔적을 가리지는 못하는지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모두 모여 있었군.”
정우를 발견한 이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하나같이 회랑에서 보던 이들이었다.
‘……역시.’
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정우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지스 외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회랑에 접속했을 때, 모든 대소사는 이지스가 관리했고.
‘내 대화의 전부가 이지스를 통해서 이루어졌었지.’
때문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마녀라는 일족의 ‘인원’에 대해서는.
“반경이 정해져 있소. 아는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우리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소.”
“…간만에 뜬금없긴 한데, 말투를 조금 편하게 하는 건 어렵나?”
“이게 편하오.”
“음….”
이지스는 마을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중앙에 약간 못 미친 지점.
커다란 거미가 동족을 집어삼킬 때의 무력감을 절실히 느끼던 장소에 선 이지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시오. 왕이여. 이곳을 왜 ‘재현’이라고 했는지, 왕은 아실 것이오.”
그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보았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얼핏 떠오르는 기억과 비슷한 풍경.
‘아니. 풍경이 중요한 건 아닐…….’
생각하던 정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와그작!
그런 느낌으로 부서지던 던전의 막이 떠올랐다.
‘이건….’
“마력이….”
“아신 모양이오. 그렇소. 현실과는 마력의 패턴이 다르오. 여긴 현실이 아니오. 마력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일 뿐이오.”
정우에게는 이지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곳의 패턴은 이상했다.
현실이 아니라는 말도.
아공간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긴박하게 등장하였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해제되어 버린 패턴.
‘……네 몸을 결박하고 있었던 쇠사슬의 패턴이다.’
정우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향했다.
‘메아리.’
* * *
“한 가지만 물을게.”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이지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어디로 갔지?”
“청년?”
“아라크네를 키운 청년.”
“…….”
정우의 물음에 이지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한숨.
“설마 그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잊고 있었던 건 사실이긴 한데….”
정우는 청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회랑 어딘가에서 자신의 실수를 참회하며 지내지 않겠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라크네의 흔적이라는 던전이 생겨났다는 소리에 일본으로 이동한 이후.
회랑에 접속했던 정우는 끝내 청년을 찾지 못했다.
“마력을 박탈한 건가?”
“…다르지만 비슷하오.”
“그렇군.”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던전이 그 청년과 관계가 있는 거지?”
“맞소.”
이지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우리를 해할 의도는 없었소. 우리 일족은 기록에 민감하고, 새로운 마법에 과민하오. 일족을 멸망으로 이끌 뻔했던 실수는 분명하나, 그 정도 호기심은 오히려 칭찬을 받을 만 한 일이었소.”
특이한 관점이었다.
“근데 벌을 주었다?”
“벌이 아니오. …그럴 수밖에 없었소.”
잠시 머뭇거린 이지스가 당시의 상황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라크네의 미궁.
그곳을 클리어한 이후의 상황을.
* * *
정우가 게이트를 빠져나가자마자 일족의 마력을 총동원하여 통로를 만들어 장치의 독을 다시금 아라크네에게 보냈던 이지스는.
“……실수했군.”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파악했어야 했다.
일족의 수장으로서.
누가 남았는지, 알아야 했다.
“리암…….”
아라크네는 청년의 마력을 먹고 자랐다.
아라크네의 마력은 청년의 것을 빼닮았고.
모든 마녀들을 내뱉는 순간에도, ‘자신의 것’을 놓지 않은 놈의 배 속엔.
“리암!”
청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레베카가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독의 기운이 지면에 남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반쯤 녹아 버린 아라크네의 몸체.
“만지지 마라! 독이 남아 있다!”
“리암… 리암! 아, 아버지! 리암이….”
“기다려라.”
자신의 딸을 만류한 이지스가 마력을 확인했다.
바닥을 드러낸 마력.
정신없이 사용한 비기 탓에 여력이 없었지만.
‘썩을 놈. 살려서 평생 속죄하게 만들어 주마.’
이지스는 아라크네의 녹은 몸에서 리암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이야. …저 거미가 방어막이 되어 주었어.”
리암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이지스는 천천히 리암을 검사했다.
“……마력 동화.”
“네? 그게 뭐예요?”
“거미와 마력이 동화되었단 말이다.”
리암을 살피는 이지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신을 잃은 아이.
이젠 훌쩍 자라서 청년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덩치였지만, 그에게 리암은 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레베카가 언제까지나 아이로 보이는 것처럼.
‘레베카야….’
자신의 딸이 리암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리암도.
‘차라리 진작에 괜찮다고 말해 줄 걸 그랬구나.’
리암은 호기심이 많았고 앞장서는 걸 좋아했다.
그건 그의 본성이었다.
하지만 이지스는 알고 있었다.
리암이 특이한 거미를 발견한 이후 지속하여 연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어울린다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뻔했구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족의 수장.
그에 어울리는 격을 쌓기 위한 연구.
틀린 건 아니었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고.
“……어른으로서 말해줬으면 좋았을 뻔했구나.”
“괜찮은 거죠? 리암은… 괜찮은 거죠?”
레베카는 이지스의 혼잣말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 버렸다.
손에서 놓을 생각을 하지 않던 대검조차 내팽개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방법을 생각해 보마.”
“꼭…… 꼭 좀 부탁드려요.”
* * *
“딸아이가 저보다 다른 남자를 신경 쓰는 게 그토록 서글픈 일인지 처음 알았소.”
“…….”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의아했을 정우였다.
하지만 얼마 전.
‘승민이와 만나는 정희를 보고 느낀 게 비슷하지 않을까.’
언제 이렇게 컸는지.
괜히 만감이 교차했었다.
‘…이승민이 대상이라는 게 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끄응.’
“아무튼 많은 고민을 했었소.”
잔여 마력이 너무 없었다.
리암을 회복시키거나 다른 마법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건, 봉인진을 그리는 게 전부였소. 마력을 억제하려는 의도였소.”
이지스의 판단은 적절했다.
아니, 적절해야 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더구려.”
던전의 마력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우가 사라진 이후.
약간의 여유 끝에 던전의 마력은 씻은 듯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만약에.
“마력이 남아 있었으면 발악이라도 해봤을지 모를 일이오.”
이지스는 혀를 찼다.
“뭐… 직접 확인해 본 이 법칙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긴 했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지스를 보았다.
“마력이 사라진 지형은 빠르게 무너지더구려. 겨우 살아났나 싶었던 우리는 또다시 절망했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육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던 동굴 주변은, 던전의 변화에도 온전했다.
“잠깐. 이전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잖아.”
“맞는 말이오. 그 당시에는 몰랐소.”
“이번에 알게 된 건가?”
“정확히 말하면… 그때부터 이어졌다고 봐야 하오.”
“이어졌다? 설마.”
정우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이지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이어졌소. 그때 이후의 시간이 흐르고 있더구려.”
“시간이… 이어졌어?”
생각지도 않았던 말.
‘아니. 아니지. 적어도 육체가 존재했으니까 시간이 이어지는 건 당연한데…….’
정우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마력이 사라져서 시간이 멈춘 건가?”
“비슷한 생각이오.”
약간은 놀람이 묻어 있는 음성으로 이지스가 대답했다.
아직 정우는 알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마력이 기본적인 이계에선, 마력에 대한 여러 개념이 존재했다.
심지어 시체가 부활하는 네크로맨서도.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영매사도 존재했기에.
마력의 개념은 영혼과 공간까지도 아우르고 있었다.
시간적인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어떤 경우에도 존재한다.
마력이 없다면 그 세계는 죽은 세계이고.
“죽은 세계는 ‘정지’한 세계가 아니겠소.”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던전이 활성화가 되면서 마력이 흐르기 때문에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판단하오. 그 계기는 모르겠으나….”
“계기는 내가 알아.”
“……!”
드물게 이지스의 눈썹이 솟구쳤다.
“무엇이오.”
“내 성장.”
정우의 말에 머뭇거렸던 이지스는 놀랍게도 답을 내놓았다.
“…열쇠. 그리고 우리의 인정. 그게 왕과 우리를 연결한 것이겠구려.”
“연결?”
“메아리란 존재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지 않소?”
끄덕.
“우리 역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소리요.”
“…….”
“허허허. 재미있구려.”
이지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맹세! 던전과 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려.”
“맹세 때문이다?”
“비슷하지 않소? 우리의 모든 걸 열쇠에 맡겼던 것이 오히려 우리의 목숨을 구했구려.”
이지스가 걸음을 옮겼다.
‘이 방향은?’
동굴이 있던 방향.
즉, 아라크네가 죽은 방향이었다.
“왕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소.”
우뚝!
둘의 걸음이 멎었다.
사방으로 퍼진 새하얀 실.
나무와 돌 따위를 가리지 않고 뻗어 있는 실의 중앙에 있는 새하얀.
“……고치?”
정우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