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던전 브레이크 (4)
불만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전황은 낙관적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동료의 죽음에 분루를 삼키며 뒤로 물러섰었다.
B급의 고위 플레이어의 지원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방어가 아니라 돌연 공격으로 전환된 상황엔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쿠웅!
어느새 꺼내 든 창이 굳게 디딘 다리를 축 삼아 내질러졌다.
콰득!
철저히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교본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였다.
“…와아.”
“봤어? 정확히 목뼈만 가격해서 힘을 남기고… X발. 다음엔 뭐냐?”
“몰라. 아무튼 쩐다….”
불만과 불신은 빠르게 사라진다.
가벼운 움직임.
선봉에 서서 일행의 방향을 정하는 정우의 등이 매우 커 보였다.
“마법사야, 창술사야?”
주된 공격은 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이 허술하냐.
“…마법사겠지? 그 마법 봐봐. 적어도 C급은 넘을걸?”
절대 아니었다.
간간이 터지는 마법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빼어났고, 위력적이었다.
“……흥. 어처구니가 없네.”
여마법사는 코웃음을 쳤지만, 내심 정우의 활약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언데드의 수는 여전했다.
야산이 새하얗게 물들고 반쯤 썩은 시체들이 입을 벌리며 허우적대는 모습은 별다를 게 없었다.
“…근데 왜 앞으로 가는 거지?”
“몰라. 근데 이상하게 전투가 쉽네.”
죽은 이들이 들으면 억울해질 말을 내뱉으며, 플레이어들이 정우의 뒤를 받쳤다.
정우의 활약도 활약이었지만.
“…뭔 짓인지 모르겠지만. 후우. 놔둘 수도 없고….”
자신들이 받은 명령서를 떠올린 편수가 한숨과 함께 스킬을 사용했다.
라이트닝 볼트.
“이봐.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알아?”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지만 편수는 어이가 없었다.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이는 가장 높은 등급의 플레이어인 자신이었다.
소문의 F급 플레이어가 아니라.
‘몰이사냥에 필요한 줄 알았더니, 전선 제어 효과도 나쁘지 않군.’
예전엔 몬스터가 몰려드는 성질이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효과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마법사와 성직 계열이 모였기에, 당연히 범위 공격으로 몰린 놈들을 상대하겠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때문에 라이트닝 스톰과 워터 레인을 사용한 거 아닌가.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나아가는 길이 무난했다.
“…벤시 같은 놈들이 없는 것도 다행이군.”
아직까지는 언데드의 능력이 떨어졌다.
땅의 색깔이 죽음의 땅을 연상시킬 만큼 탁해지긴 했지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놈들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듀라한부터 모두 근거리 언데드.
지금 잡지 못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건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원군이 오는 데까진 시간이 걸린다.
비타가 먹통이 된 이상 그쪽에서 이상 징후를 판단하고 빨리 플레이어들을 파견해 주길 바랄 뿐이다.
던전을 공략하든.
여행을 떠나든.
특히 주 단위로 계산해서 플레이어를 굴리는 길드의 경우, 정말 잉여 인원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암살 계열 따위의, 언데드와는 합이 좋지 않은 플레이어만 있든가.
‘필요한 건 탱커. 그리고 화력인가?’
그렇게 따지면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F급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앞으로 나설 때만 해도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속도라도 줄어서 뒷목을 잡아 뒤로 던질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지금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세군.’
강했다.
같은 등급을 놓고 보면 자신의 예전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냉정하게 본 편수는 눈을 빛냈다.
‘이 정도면… 형님한테 말해 봐야겠는데?’
하물며 정우의 활약은 마법에만 있지 않았다.
‘능력치가 어떻게 되는 거지? 하! 움직임도 괜찮네.’
모든 인원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의 창술은 점점 더 예리해져만 갔다.
‘이거……. 마음에 드는군.’
효율이 상승한 건 마법만이 아니었다.
스킬로 남아 있는 검기 역시 상당히 효율적으로 변했다.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스킬 이전의 흐름.
‘마력을 스스로 움직여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스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정신을 집중했다.
몸속에서 피어난 마력이 피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특히 손끝까지 퍼진 마력이 창대를 타고 창날로 흘렀다.
손가락이 연장된 듯.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느껴져.’
창날의 움직임이 예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고.
아군의 스킬을 비켜 가며.
콰직!
언데드를 쪼개는 움직임은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 스킬 ‘오러’를 얻었습니다. ]
[ 스킬 ‘검기(劍氣)’가 ‘오러’에 통합됩니다. ]
[ 스킬 ‘마력 회로’를 얻었습니다. ]
[ 오러 ]
등급 : E
마력을 담을 수 있다.
마력을 의식의 흐름대로 조절할 수 있다.
[ 마력 회로 ]
등급 : A
마력의 흐름을 각인한다.
효율이 강화된다.
“……!”
새로운 스킬.
검기가 오러로 통합되고, 마력 회로가 생성되었다.
커졌던 정우의 눈이 이내 반달을 그린다.
의식과 각인.
마력의 흐름을 세팅하고 설정하는 듯한 스킬의 효능이 절로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어?”
여마법사의 입이 벌어졌다.
뭔지 모르지만 바뀌었다.
둘씩, 셋씩 베던 창날에 맺힌 ‘오러’의 예기가 달라졌다.
“뭐야? 왜… 아직도 마력이 남아 있지?”
여마법사만큼이나 편수도 놀랐다.
“흐름이…… 달라졌어?”
마력의 흐름이 달라졌다.
F급치고 매우 훌륭한 마법과 창술을 지니고 있었지만 편수의 눈엔 흠이 보였다.
특히나 마력을 아끼는 듯한 느낌이 못내 아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촤아-악!
창날에 맺혀 횡으로 뿌려지는 오러의 흐름에 갈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여력이 남았는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땅을 박차고, 몸을 돌리며 창을 뿌리는 정우의 움직임이 더욱 예리해졌다.
벌써 십 분 넘게 혼자서 정면을 뚫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체 능력, 창술, 마법.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정우를 보자 편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협회에서 밀고 있는 거겠지? 하! 루키…인가?’
기회만 닿으면 날갯짓을 하리라.
여러 플레이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우의 뒤를 좇았다.
물처럼 흐르는 움직임이 도드라졌고.
간간이 튀어나오는 마법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마를 흐르는 땀이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들 법도 한 상황.
그러나.
‘……나아졌다. 조금 더… 강해졌어!’
희열로 가득 찬 정우의 눈빛은, 수많은 언데드를 상대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와라!
그 빌어먹을 저주 같은, 날 노리는 너희의 뜻 모를 증오를 전부 다 받아 내고야 말겠다!
각오를 다지며 성장을 맛보는 정우의 표정은 다부지기만 했다.
덜그럭, 콰직!
* * *
“…….”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지상 명제와도 같은 강압이 있었다.
‘……그런데…….’
에녹 콘라드 오스카는 깊게 빠진 잠에서 깨어났다.
수하들의 감각에 반응한 탓이었다.
아니.
‘날… 자극하고 있다.’
기묘한 감각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왕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당장 이 흙을 허물고 지상으로 솟구쳐 살육을 벌일 정도로.
망자들의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수많은 시체가 부활했고.
방대한 마력의 영향을 받아 활동했다.
그것의 심장에 이를 박아 넣어라.
‘……그것이, 왔다!’
왕의 명령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목표가 이곳에 왔음을 깨달았다.
살의가 들끓기 시작했다.
억제하고 있었지만, 수하들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 했다.
그것의 심장을 취하는 건 왕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전초 기지로 삼으라는 것 역시 왕의 명령이었다.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그 기로에 서서 수하들의 살의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본인부터가 혼선을 겪고 있었다.
상반된 명령.
살의와 억제가 번갈아 뇌리를 장악했다.
고민하던 오스카가 결정을 내렸다.
‘죽이고 전초 기지 삼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것의 존재감은 매우 약했다.
아니, 지상에서 떠들썩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든 인간이 약했다.
죽이고 다시 숨는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오스카의 입술이 비틀리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날 때였다.
“……그건 곤란한데요?”
“……!”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음성.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목을 낚아채기 위해 움직였다.
턱.
오스카는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의 감촉에 불쾌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 버러지가… 감히!
“흐음?”
상대의 콧소리 섞인 음성이 오스카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마력이 뿜어져 상대를 압박했다.
존귀한 육체에 손을 댄 것을, 죽어서 후회해라.
그런 마음으로 마력을 사용한 오스카와는 달리.
“막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상대는 여전히 태연했다.
막는다?
상대의 말이 거슬렸다.
천천히 감았던 눈까지 뜬 오스카의 눈에 비친 것은.
“……인간.”
동족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더더욱 아니었고.
‘여기에 인간이라?’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다.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도록 차단한 임시 터전.
임시라고 하지만 인간 따위가 침입할 정도로 녹록한 건 아니었다.
오스카가 손을 털었다.
인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잡은 손을 가볍게 놓았다.
‘…방심했군.’
갑자기 나타난 상대였다.
본신의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여전했지만, 이미 한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오스카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외부와 이곳을 차단했군.”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는 게 아니다.
외부에 자신의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소리였다.
인간인 것을 배제한다면 실로 뛰어난 실력.
“별일은 아닌걸요.”
싱긋 웃는 웃음이 역겨울 정도였다.
오스카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멈칫했다.
자신이, 인간에게, 역겨움을?
“그럴 수 있죠. 특히 당신들은 우위에 서 있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나요?”
“……뭐?”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줄 알고 반문하려던 오스카는,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나의…… 기억을….”
“읽었죠.”
다시 한번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인간을 보자, 오스카는 살의가 치밀었다.
생각을 읽는다?
읽혔다?
그 무엇도 용납이 되지 않았으니까.
절로 섬뜩할 정도의 마력이 솟아났다.
저릿!
인간은 그런 오스카의 변화에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릿한 느낌.
강함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 오히려 기꺼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대치가 끝나고 오스카가 손을 뿌리려고 했을 때.
돌연 그의 몸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살의? 분노?
그깟 것을 압도하는 ‘말’ 한마디에.
“왕의 명령을 전하죠.”
단순히 등장한 단어 자체가 엄청난 족쇄로 작용했다.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네놈이 어떻게?”
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자연스럽게 복종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대상을 인지해야 했고, 언급해야 했으며, 실제로 거짓이 없어야만 했다.
저 하찮은 수하가 아니라.
왕에게 인정을 받은 귀족에게는 더더욱.
그 말인즉슨.
“왕을 아냐고요?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우리는 그대의 왕의 협력자이니까요.”
“…인간이?”
오스카의 반문은 타당했다.
자신들은 포식자였고 침략자였으며, 지배자였다.
그에 반해 인간은 피식자에 피지배자였다.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야 하는 가축들.
협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작위를 조금 더 올리시는 게 어떨까요? 위에선 아는 거 같은데….”
엎드린 자세로 듣는 말은 굴욕적이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오스카가 각인된 본능을 이기고 고개를 들었다.
씨익.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본 인간이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로 역겹게 내려보았다.
“백작은 인간에게 협력하여, 전초기지를 완성시킨다.”
“…협력…….”
인간이 쪼그려 앉는 자세로 말했다.
여전히 오스카를 내려다보며.
“아시겠어요? 당신은 우리의 계획을 따라야 하는 처지라는 걸…. 잘 부탁드려요.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