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첫 벽을 넘다 (1)
[ 최근 들어 빌런들의 테러가 활발한 가운데…. ]
[ 플레이어 협회에서는 벌써 네 번째 전담팀을 강화하는 것으로……. ]
[ 긴급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플레이어 협회에서 빌런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자가 존재한다고 밝혀……. ]
[ 정신 감별인가, 독심술인가. 빌런을 잡을 무기는 과연 무엇……. ]
[ 과연 네 개의 전담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건지, 전문가를 모시고……. ]
TV 속 세상이 꽤나 시끄러웠다.
미국와 일본, 한국에 이어 테러는 이내 중국과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본래라면 화젯거리를 좇아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련만.
휘이잉.
바람이 부는 거리는 한산했다.
정우에게는 그 모습이 꽤나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창을 늘어트리고 걷는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이들도 있었다.
플레이어.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두려움의 존재로 전락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빌런의 막대한 힘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퍼지고.
재수가 없어야 만나는 재앙이라는 이미지의 빌런은 언제 어느 때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고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일부 귀족 사상에 물들어 있던 플레이어들의 감춰뒀던 만행까지 공개되어 퍼지자, 경기가 급속도로 위축되어 버렸다.
갑자기 바뀐 세상은 격변의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연신 떠들썩했다.
천천히 걷던 정우의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4층 건물 사이의 골목.
‘악의(惡意).’
그곳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향을 정했다.
빠르게 날아 이동한 메아리가 황급히 말했다.
-발견! ✧*。٩(ˊᗜˋ*)و✧*。
그녀의 말과 동시에 정우의 마력이 움직였다.
후웅!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명이 이루어진다.
그와 동시에 변형되는 마력.
그것은 순식간에 마법으로 화했다.
“…하! X발, 새끼! 그만 좀 꺼져라!”
안쪽에 숨어 있던 이가 정우의 행동에 욕설을 내뱉으며 땅을 박찼다.
하지만 정우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파지직!
골목 뒤편에 생겨나는 벼락의 벽.
퇴로를 막는 것과 동시에 정우의 주변에서 동그란 마력구가 생겨난다.
파앗!
기초 마법.
하지만 스킬의 한계를 벗어나 제임스 밀러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든 그것.
매직 미사일.
서로 다른 화살을 쏜 것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며 쏘아지는 기세는 일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X발!”
빌런은 양손을 교차하며 휘둘러 매직 미사일을 쳐내려고 했지만.
“…뭐가…… 이렇게, 쎄?”
하나하나의 위력이 어지간한 마법사의 D급 스킬 이상이었다.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번쩍이는 스킬이 난무했지만 막지 못한 마법이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깨진 머리로부터 핏방울이 쏟아졌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지만.
“…뒤가 비었어.”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정우의 창날이 빌런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서걱!
경악과 통증으로 얼룩진 얼굴로 제 목을 틀어쥐던 놈의 눈동자가 휘릭 돌아간다.
털썩.
울컥, 솟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창날을 닦고 있을 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끝냈어요?”
정우와 빌런을 번갈아 보던 여자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정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마무리했다.
비타의 버튼을 눌러 상대의 모습을 전송했다.
-빠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받은 정우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멀뚱히 서 있던 여자를 보며 살짝 묵례하자 마주 인사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리를 맡은 F급 플레이어.
불과 얼마 전의 자신과 등급이 같은 그녀를 본 정우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한 달을 떠올렸다.
고작 네 달이라고 하기에는 변한 게 많은 시간.
정우는 메아리와 눈을 마주쳤다.
-와들, 와들? (((( ;°Д°))))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 겁먹지 마.”
* * *
이리들의 습격에서 승리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뜨거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뜬 유서린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S급의 강인한 육체조차 삐걱거릴 정도였다.
일본으로의 파견.
그리고 협회의 대책 회의까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S급의 무력을 지녔기에 권한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건 다른 문제인데.’
자신은 아버지가 아니다.
문무를 겸비한 아버지와는 달랐다.
성기사와 버서커.
상반된 능력을 지녀 ‘징벌의 처녀’라는 과한 칭호를 얻었지만.
자신의 능력은 온전히 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버거웠다.
문제는 그럼에도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것.
‘일이 너무 많아.’
아버지의 일은 자신의 몇 배나 되었다.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협회가 얼마나 아버지 한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겠어.’
기존에 진행하던 건수가 상당했고.
일본과의 협약이 진행 중이었으며.
‘북한이 진짜 골치 아픈 일인데….’
리 박사에 대한 건은 누구도 섣불리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리고 B섹터 습격 사건.
‘한정우….’
유서린은 서류를 통해 정우를 다시 보았다.
“……제물의 낙인이라.”
유서린은 눈가를 좁혔다.
유 대리를 통해 협회에 제물의 낙인에 대한 문의가 들어왔다.
유지석은 물론, 소수의 인원은 수르트가 한정우를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웃긴 말이지만 제물의 낙인 자체는 일종의 보증서였다.
수르트가 탐낼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니까.
때문에 낙인에 대한 정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타락하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유서린은 타인의 시선에 민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미모로 여러 남자들의 시선을 받았었고.
아버지가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의 후광을 노린 이들의 관심이 뒤따랐다.
스스로가 플레이어가 된 뒤로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S급이 되고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많았다.
여러 이유로 타인의 시선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는 한정우란 사람은 자신을 조심스러워했을 뿐,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왜 이 자리에 이 사람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보이는 것과.
“…표정이 좋았어.”
자신의 말을 들으며 여러 생각을 하는 게 전부였다.
G-00.
세계 유일 사례의 가족.
‘서린아. 넌 겪지 못했겠지만 이중 던전이라고 있단다. …어쩌면 이번에 그 모자란 놈을 넘어서는 새로운 S급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구나. 참… 목표도 바르기에 더욱 기대되는구나.’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했지만, 유서린은 그의 말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을 찾았을 때, 유서린은 유 대리를 먼저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를 통해 정우의 목표가 아버지를 구해서 온전한 가족을 꾸리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구하는 것.
본인의 상황도 여의치 않아서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들었던 유서린은 한정우란 인물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서린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어 있었다.
“분명히 그 사람을 말하는 걸 텐데….”
아버지가 말하는 ‘모자란 놈’이 누구인지 아는 유서린으로서는, F급이 최강으로 손꼽히는 S급에 비교될 정도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지석에 대한 유서린의 믿음은 상당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갔다.
새로운 S급이라.
“빌런이 될 가능성은 적으니까. 좋아.”
아군이라면 환영이다.
빌런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유서린의 눈빛이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샘솟는 적의.
빌런에 대한 적의가 한동안 그녀의 생각을 장악하다가 사라졌다.
* * *
이지스의 말은 정론이었다.
회랑에서 벗어난 정우는 생각에 잠겼다.
선후를 정해야 한다.
“…동감이야.”
자신 역시 모르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를 사냥하느냐.
아니면 던전 내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 성장하느냐.
전자는 확인된 확실한 방법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자는 막막한 방법이나 부담감이 없었다.
‘…아니.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죄책감이 없다는 것조차 정우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정우에게 있어서 빌런은 죽여도 상관이 없는, 범죄자였다.
일반인이었던 당시 자신을 습격했던 오한우.
오한우 때문에 얽혀 자신을 납치하고자 했던 결계사.
제임스 밀러의 눈을 속이고 자신을 노렸던 볼코프와 이반.
그리고 수르트와 붐.
얽히고 얽힌 사건은 악연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특히 수르트는 날 키우기 위해서 여러 문제를 벌일 거다.’
유 대리가 전해준 수르트에 대한 정보는 참담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와락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키워서 잡아먹는다.
여러모로 쓰이는 그 문장이 자신에게 적용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정우였다.
“내 목이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정우는 천천히 선후를 정했다.
자신이 플레이어가 된 이유.
플레이어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리고 성장해야 했던 이유.
‘아버지.’
5년째 G급 던전에 갇혀 계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방법을 찾기 위해 강해져야 했고.
방법을 찾기 위해 마력이 필요했다.
빌런을 죽여 성장하는 게 꺼려진다고 아버지를 둘 수 있을까?
몇 개의 관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데?
‘불가능해.’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했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채 남편 대신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까지 던전 이용권의 사용을 참은 이유가 뭔가?
일반인으로서 G급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시나 그런 방법이 생기면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의 안녕.
그건 정우에게 있어서 몇 년 동안 쌓인 절대적인 가치나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와 범죄자를 저울에 놓으면…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네.”
정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생명, 그리고 성장.
“둘 다 포기할 수 없지.”
체육관에서의 정우는 취조를 당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 설명만 요구했을 뿐이다.
치유가 먼저였고.
대우가 먼저였다.
상대가 빌런이기 때문에 가능한 처우.
누구 하나 ‘살인’에 대한 부정적인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B섹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놀랐고 분노했을 뿐.
‘오히려 빌런과 싸운 F급의 승리에 환호를 보냈지.’
소식이 돈 것인지 복도를 가로지르는 자신을 보는 눈빛엔 은은한 경탄이 섞여 있었다.
불현듯 헌터(Hunter)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계에 대해 궁금하여 읽었던 그들의 역사가 떠올랐다.
적과 싸워 승리한 아군은.
‘영웅이지.’
플레이어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없는 게 아니었다.
정우는 본인의 길을 정했다.
일단은 성장해 보기로.
‘헌터라…….’
묘하게 입에 감기는 호칭이었다.
내심 결정을 한 정우의 표정이 다부지게 변했다.
선후를 정한다.
크고 작게.
작게는 빌런.
‘수르트만 문제가 아니야. 날 노리는 놈들이 있어. 일단은 강해지는 게 먼저야!’
정우는 이대로 목을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빌런과 여러 사건을 떠올리던 정우가 침음을 흘렸다.
‘크게는…… 그때 본 눈이다.’
사막 고블린 던전 지하에서 본 눈.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던 그 눈동자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특히나 던전 안에서 자신을 주시한 눈이 호의를 품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적의든 관찰이든.
혹은 다른 의미이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반드시 강해져서… 아버지를 구하고, 내 목숨도 구해야겠어.’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던 걸까.
갑작스럽게 떠오른 그것에 정우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