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낙인(烙印)
“공간이동까지 사용해서 이동했습니다. 그녀 덕분에 수르트가 도망쳤고, 우리는 불필요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사키의 후유 길드는 이 사태에 엄연한 책임이 있었다.
그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던 오니 길드가 실은 빌런들의 집단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그로서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회의장의 방어막이 제때 작동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수많은 학자들이 죽거나 납치당할 초유의 테러가 성공할 뻔했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
한국 협회의 연락이 아니었다면, 참혹한 결과만이 남았을 터였다.
“그 모든 시작에 한정우 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후유 길드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며 고개를 숙이는 사사키의 모습에서 정우는 묘한 감흥을 받았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에 희의와 좌절, 불타는 적개심을 품은 것이 조금 전이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F급 플레이어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A급 플레이어를 보자 묘한 감동이 있었다.
괴물 같은 인간.
인간다운 인간.
하루 만에 상반된 두 존재를 경험했다.
“…전 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연락을 취한 건 자신이 맞았다.
자신의 연락이 시발점이 되어 빠른 진압에 나서게 된 것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무슨 영웅적인 활약을 펼쳐 적을 말살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한 건 아니다.
무력함.
다시금 떠오르는 무력함에 정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한 게 없다. 이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 오히려 등급이 낮다며 도망칠 수도 있었던 일입니다.”
정우의 속내를 들은 사사키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관리자와의 만남을 요청하려 했고, 한국으로 연락하여 이상 현상을 알렸죠. 만약에 우리에게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제아무리 수르트가 있었더라도…… 징벌의 처녀라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니까요.”
테러가 조금만 더 늦게 시작되었다면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자 정우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한정우 님.”
사사키는 그런 정우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저는 결과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모든 건 결과로 나타내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예외는 있습니다. 영웅적인 일! 그건 결과보다 과정이. 과정보다는 여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왼쪽 가슴, 심장.
낙인이 찍힌 장소와 동일했다.
“그 연락이, 저와 저희 길드원도 살렸습니다.”
상대는 강했다.
모노노케는 물론, 하라구로도 매우 강했다.
차분히 상대하면 비등한 수준.
하지만 사사키와 후유 길드는 마음이 조급했다.
이 행사의 관리를 맡았기 때문에.
모든 경호와 안정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조급했고, 약간의 틈은 위험을 초래했다.
한국과 일본의 대응이 빠르지 않았다면.
‘내 목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은인인 셈이다.’
“저희 길드에겐 큰 도움이 되는 연락이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인사.
정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뒤처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잡음 나오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짧은 대화 끝에 몸을 돌린 사사키의 빈자리를 응시하던 정우의 무거운 표정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 ‘각오’라는 감정이 자리한다.
강해진다.
인간을 해하는 몬스터도.
몬스터보다 더 괴물 같은 빌런들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도록… 강해지자.’
의외의 장소에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자연스럽게, 마력의 상승.
‘그릇을 수복해야 한다. 낙인에 대해서는 당분간 잊어.’
협회와 제임스 밀러가 여러모로 낙인의 정체에 대해 밝혀낼 터.
‘이지스와 회랑도 있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정체만 확인되면 해제는 어렵지 않을 거란 게 정우의 판단이었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존재했고, 디스펠과 같은 스킬 해제 능력을 지닌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니까.
유 대리를 부른 정우가 몇 가지를 부탁했고, 조금 나아진 정우의 표정에 유 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대답했다.
“어렵고 귀찮은 일만 시키지만, 어렵지 않게 해보이죠!”
* * *
이지스는 낙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물의 인.
그게 정우에게 사용되었음을 들은 이지스의 분노는 정우로 하여금 마녀란 일족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가히 절대자의 위용.
본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회랑에서도 도드라지는 이지스의 존재감에 정우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아쉬운 것은 이지스도 제물의 인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제물은 그들에게도 배척받는, 저주스러운 능력이었으니까.
제물, 저주.
두 개의 키워드로 회랑의 서고를 검색했지만.
“……너무, 많군.”
공통적으로 겹치는 제물의 인이나 제물의 각인, 낙인 따위의 검색은 통하지 않았다.
각각의 키워드가 적용되니 그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오래 걸리겠습니다.”
이지스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고 해제만 하면 그만이야. 밖에서도 방법을 찾겠다고 했으니, 일단은 잊자.”
정우의 말에 이지스는 은근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체계를 교육받은 정우는 회랑의 접속을 해제했다.
“후우.”
내색하지 않았지만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많은 게 요원했다.
하나씩 해결되어야 할 텐데.
그런 아쉬움에 마른세수를 하는 정우의 비타가 울렸다.
두 가지 내용이 떠올랐다.
낙인의 정체와 ‘붐’이라 불리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정리.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사건이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닥터 브라운과 약속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영혼.
“그러고 보면 갑자기 제물의 낙인 때문에 영혼에 대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신경이 쓰였던 걸까.
회랑에서 찾아야 할 정보가 갑자기 바뀌었다.
“할 수 없지.”
둘 다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선순위라면 단연코 영혼이다.
강해져야 이 저주를 딛고 일어나.
“수르트보다 강해지면 될 일이야.”
시전자를 죽인다고 해도 낙인의 대상이 수르트인 이상 저주는 유효하다.
언제고 제물처럼 수르트 앞에 다가가 발악하다가 목숨을 잃고야 말 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수르트의 앞에 도달하기 전에 그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또 하나로 귀결되네.”
영혼의 수복.
그러기 위해 만나는 만남.
정우는 닥터 브라운과의 만남이 기대가 되었다.
* * *
“어렵군.”
화상 통화로 대화할 때보다 더 친근한 모습의 닥터 브라운은 정우의 말에 긴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내뱉은 결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우는 적잖게 실망했다.
“…그렇습니까.”
굳어진 표정을 본 닥터 브라운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응? 이거야 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닥터 브라운.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어렵다고 했네.”
정우의 눈이 조금 커진다.
기대감에 쿵쿵대는 고동 소리가 귓가를 장악했다.
그 사이를 뚫고, 닥터 브라운의 웃음기 섞인 음성이 또렷하게 박혔다.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연구를 해야겠지만, 어떻게든 수복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네.”
확정된 건 없지만 긍정적인 반응에 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조금 아쉬울 따름이네.”
“…무엇이 말인가요?”
“음. 자네가 이번의 테러에 연관이 있다고 들었네.”
얼핏 들으면 이상한 내용이라 정우가 당황했다.
“하하. 아니. 좋은 의미로 말이야.”
닥터 브라운은 생각보다 농담을 좋아했다.
왜 제임스 밀러와 친분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정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번에 난 트롤의 심장을 재생할 수 있다, 라는 연구 주제를 들고 왔네. 그에 따른 여러 약물도 미리 연구했고, 가설도 세웠지.”
뜬금없는 내용.
하지만 정우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트롤의 심장을 재생하는 데 성공했다면 자네에게 해줄 말이 더 많았을 거야.”
정우는 닥터 브라운의 말을 이해했다.
“죽은 심장의 부활. 이게 영혼과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다르겠지. 하지만 개념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네. 트롤이란 게 원래 ‘마력’만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재생하는 놈이거든.”
머리가 부서져도.
심장이 잘려 나가도 놈은 드래곤볼의 셀처럼 재생을 반복한다.
놈을 죽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재생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전부 다 사용하게 만들든가.
재생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산산이 조각내어 불태우든가.
“두 방법 모두 결과적으로는 마력의 고갈을 노린 방법이네. 즉, 트롤의 심장이 반쯤 갈라진 채로 활동을 멈췄다는 건, 마력이 고갈되었다는 뜻.”
“…마력을 채울 수만 있다면 재생이 시작되겠군요.”
마력은 영혼의 힘이다.
마력이 채워진다는 건, 영혼의 힘이 채워진다는 소리.
‘확실히 영혼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
정우가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걸 눈치챈 듯 닥터 브라운이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실험이 필요하네. 트롤은 무리일 테니… 그와 비슷한 놈을 말해주지.”
닥터 브라운이 작은 서류 가방을 꺼내어 손을 집어넣었다.
크기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는 팔.
‘아공간 아이템.’
그리고 나오는 손바닥만 한 작은 병을 좌우로 흔든 닥터 브라운이 정우에게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투명한 슬라임이 있네. 그것의 핵을 가져오게.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아니지만, 제임스의 이야기도 있고 하니, 자네가 직접 가져오게.”
던전을 공략하라는 소리였다.
“여러모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네. 투명 슬라임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만나기가 어려운 법이니까.”
* * *
유 대리에게 자료를 요청한 정우는 자체적으로 투명 슬라임에 대해 검색했다.
하지만 모든 검색 사이트가 그러하듯 플레이어와 관련된 내용은 만천하에 드러난 사실이나 여러 추론과 가십이 전부였다.
“으음. 투명 슬라임이라?”
간만에 이진수에게 연락하여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투명 슬라임?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있었어?
나이트 길드에 자료를 요청하겠다는 말이 뒤따랐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한국 제일의 길드의 C급 플레이어조차 모르는 사실이라.
‘뭔가 있는 건가? 그 투명한 슬라임에?’
어쩌면 희귀종일지도 몰랐다.
훈련소를 찾아 땀을 빼고 있는 도중 온 유 대리의 연락 역시 조금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랜덤이라….”
슬라임의 던전은 여느 게임처럼 초보자가 상대하는 그런 던전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위험하고, 생각보다 골치가 아픈 놈들.
각각의 색깔별로 여러 스킬을 사용하기 때문에 적절한 팀이 조합되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슬라임이 플레이어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보상이 형편없기 때문.
보통의 던전은 클로징을 하며 플레이어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완전히 던전이 닫히기 전에, 인원 제한을 풀며 여러 인간을 받아들인다.
이 일회성 던전이 사실상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다.
퀘스트를 통해 반복되는 던전이 아니라.
던전이 닫히기 전에 투입된 인원들의 주된 작업이 마정석 수거 작업.
던전의 곳곳에 자리한 마정석을 캐내어 수확하는 게 주요 역할이었고, 일본이 국책 사업으로 진행하는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수거전담팀.
하지만 슬라임의 던전은 다르다.
퀘스트든 클로징이든 성장은 여타 던전과 비슷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정석이 없었다.
모든 걸 다 먹어 치우는 슬라임 성질상, 마정석을 비롯한 여러 물건이 남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라임의 던전은 모든 길드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듯 공략에 투입된다.
“그거 하나는 좋은 점인가? 던전을 구하는 데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로 아래 적힌 내용을 읽었다.
“투명 슬라임이 언급된 건 고작해야 두 번. 그것도 1인 던전에서나 나타났다는 거지? 닥터 브라운도 참 고약한 성격이군.”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다?
고작해야 두 번 등장했다는 기록이 전부인 데다가 놈을 잡았다는 내용은 전무한 투명 슬라임의 핵을 가져오라니.
“아무래도 내 이상한 현상 때문이겠지?”
몬스터를 불러오는 능력.
아니, 모든 몬스터의 적의를 한 몸에 받는….
“……그러고 보면 이거, 그거와 비슷한데?”
정우는 자신의 가슴에 찍힌 낙인을 보았다.
제물의 낙인.
혹시 이런 낙인이 자신에게 더 찍혀 있었던 게 아닐까.
우스갯소리로 떠올렸던 페로몬이 아니라,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현상이 각인에 의한 것이라면.
“…말이 된다….”
정우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나름대로 말이 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한 가지 사실이 남았다.
누가?
“……눈.”
정우는 의외로 상대의 정체를 쉽게 짐작했다.
자신을 주시하던 눈.
그 붉은 안광의 주인.
던전 안의 그 어떠한 존재가, 자신에게 낙인을 찍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정우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매우 필요한 질문.
‘왜?’
한참을 고민했지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