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각인
‘그래도 보스의 선택이다.’
붐은 진정으로 보스의 선택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적수가 드문 보스의 상대가 되어주는 것.
그리고 패배한 후, 그 힘을 바치는 것.
고독(蠱毒).
보스는 자신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이들을 선별해 낙인을 찍었다.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낙인만 찍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붐이 정우에게 거는 기대는 전무했다.
짧은 대치.
공격은 정우에게서 터져 나왔다.
수십의 매직 미사일 다발.
한 번에 마력의 태반을 사용한 불시의 일격.
“호오.”
처참할 정도로 적은 마력과는 달리 마법 운용이 꽤나 대담하고.
‘괜찮군.’
나쁘지 않았다.
붐은 정우의 이런 능력이 ‘아이템’ 혹은 ‘아티팩트’의 능력이라고 여겼다.
마력의 효율성을 알았다면, 당장에 보스의 선택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정도.
심지어 은연중에 정우의 성장을 도울 정도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을 터였다.
회전하며 쏘아지는 매직 미사일의 기세는 사뭇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붐은 어렵지 않게.
“디스펠.”
매직 미사일을 소멸시켰다.
허공에서 사라지는 마법을 본 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에?’
디스펠.
스킬을 해제하는 스킬.
지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지니고 있는, 매우 귀한 능력.
스릉!
붐은 마법사답지 않게 달려드는 상대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투지는 마음에 들었다.
휘어지는 창을 쳐내고.
또 쳐냈다.
파팡, 파파팟!
“신체 능력은 제법이군. 희한해. 마법을 사용하면서 이런 능력치라?”
처음 본 경우였다.
붐은 그제야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역시 보스!’
한눈에 상대를 감별하는 그 감별사의 눈이 위대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우의 수준이 현저히 수준 미달인 건 사실이었다.
회전력을 더해 내려친 창을 살짝 피하자, 바닥에 튕겨 올라온 반탄력을 이용해 정우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이윽고 붐의 명치를 노리고 찔러오는 창.
붐은 손가락으로 창을 쳐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보스의 눈에 든 이상, 더 강해져야 할 것이다.”
재롱도 보았겠다, 붐은 순식간에 접근해 오른손바닥으로 정우의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쩌엉!
“……!”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막대한 통증에 정우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푸르르.
절로 떨리는 육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는, 막연한 공포감.
“…….”
정우는 한순간 숨길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럴 것만 같았다.
“……!”
새하얘진 정신 가운데에서 갑자기 붉은 점 두 개가 떠올랐다.
빠르게 형태를 이룬 그것은,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안광.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에, 자신만이 본 것.
사막의 지하 유적.
게이트를 앞에 두고 본….
“……음?”
붐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낙인을 진행하는 도중, 갑자기 묘한 저항력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간단히 치부하고 넘어간 붐의 손끝이 살짝 움찔거린다.
“……!”
거짓이 아니다.
“이런……?”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는 붐이었다.
해주(解呪)와 저주(咀呪).
상반된 능력을 한 몸에 담아, 보스에게 간택된 이후.
붐의 능력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
그의 능력은 한 단계 위의 초인, S급 플레이어에게까지 닿아 저주를 걸 정도였다.
당시의 저항력은 정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A급 플레이어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F급인데…?’
마력 감지로 본 정우의 능력은 고작해야 F급.
‘…그러고 보면 F급치고 마법의 수준이 쓸 만한데?’
아무리 아이템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건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는 가동 마력이라는 게 필요했다.
즉, F급 마력을 가지고 S급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
기름도 넣지 않은 차가 굴러가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보스는 한눈에 이 재능을 본 것이 아닐까.
붐의 입가가 스르르 올라갔다.
무표정일 때보다도 더욱 위험해 보이는 웃음.
쩌엉!
재차 마력을 뿌리자 알 수 없는 저항력이 더욱 거세진다.
낙인의 순간은 길다.
보통의 저주와는 달리, 상대의 성장을 촉진하는 저주.
그것만 보면 축복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낙인이 저주인 이유는 그 성장이 본인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진행한다는 것.
그리고 매우 강력한 암시를 건다는 것 때문이다.
부르르.
정우의 떨림이 강해졌다.
저항이 더 거세졌다는 의미.
붐은 자신의 손등에 도드라지기 시작한 핏줄에 더욱 진하게 웃었다.
저항력을 하나의 재능으로 여겼다.
결국, 보스의 선택은 옳았다.
어지간한 사건이 아닌 이상 결국 보스의 앞에 다다를 터.
붐은 왠지 모르게 그때가 기다려졌다.
퉁.
붐은 손바닥으로 정우를 밀었다.
가볍게 밀려난 정우가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이리저리 인형처럼 구른 정우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이리저리 움직였다.
“벌써 정신을 차린다? 재미있어.”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재능을 발견했다.
덕분에 붐은 이번 작전이 꽤나 만족스러워졌다.
콰앙!
등 뒤로 들리는 폭음이야말로 그의 만족감을 배가시켜 주는 축포나 다름이 없었다.
“얼른 강해져야 할 거다. 보스는 인내심이 없거든.”
들리지 않을 말.
하지만 붐은 어쩐지 정우가 그 말을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정우를 본 붐이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몸을 돌렸다.
멍한 정신.
흐릿하고 빙글거리는 시야.
그 사이로 멀어지는 붐의 뒷모습이 정우에게 각인이 되었다.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 처참할 정도의 좌절감 속에서.
정우의 눈은 집요할 정도로, 멀어지는 붐의 뒷모습을 좇고 또 쫓았다.
* * *
“……아무래도 간호사 자격증을 따야 할 건가 봐요.”
정신을 차린 이후 자신을 간호한 유 대리의 말에도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평소와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의 정우의 눈치를 본 유 대리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불의 왕이라 불리는 수르트가 나타난 건, 가히 재앙의 수준이었다.
가뜩이나 S급 플레이어가 적은 일본은, 허무하리만큼 가볍게 보관소의 물건을 빼앗겼다.
딱히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물건.
트롤의 심장.
그것도 반이나 뜯겨나가 활동을 멈춘, 연구 자료로나 쓰일 법한 물건을 강탈한 진위가 궁금했지만.
의외로 그 연결점에 대한 해답은 한국에서 흘러나왔다.
미국에서의 테러.
드레이크의 심장.
가히 S급 몬스터라고 분류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괴물의 심장.
그 심장의 강탈에 실패한 빌런들이 대체품으로 트롤의 심장을 찾은 것이다, 라고.
그저 별 볼 일 없는 죽은 심장이 왜 필요한가 궁금해하던 찰나.
“……닥터 브라운의 이번 회의 참여 주목적이 바로 그거였대요.”
“…….”
정우가 고개만 돌려 유 대리를 응시했다.
그 무거운 시선에 유 대리는 침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유능하게 말을 이었다.
‘트롤의 심장의 재생 연구.’
테러로 소란스러운 회의장에서 닥터 브라운이 무거운 음성으로 자신의 가설을 내놓았다.
여러 토론이 이어지고.
모두는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다.
A급 몬스터 트롤의 심장이 그 특유의 재생력을 앞세워 본래의 형태로 재생될 수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일본 정부가 움직이고 있지만, 한발 늦었다고 봐야 해요.”
그녀가 말하지 않았어도 정우는 예상하고 있었다.
놓쳤으리라고….
방대한 영토와 부족한 강자.
수많은 던전과 여러 자연재해와 맞물려 상시적으로 터지는 던전 브레이크.
플레이어 시대에 돌입해 일본의 영향력이 급감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은 여느 나라보다 던전 브레이크의 빈도가 잦았다.
만성적인 지진.
여전히 잔존하는 방사능에.
간헐적이다 못해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소규모 화산 폭발까지.
모든 건 던전의 마력 수치를 변동시켰고, 재해에 힘입은 던전은 수많은 몬스터를 밖으로 쏟아 냈다.
때문에 일본의 길드는 언제나 자신의 지역을 순찰하고 지킬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나름대로 안정은 되었지만.
“때문에 영역을 넘어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마… 못 잡을 거예요.”
유 대리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여러 이유보다 수르트라는 존재와 자신에게 저주를 건 자의 존재를 높게 평가했다.
S급.
그리고 A급.
정우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찍혀 있는 기형적인 모양의 낙인을 떠올렸다.
정우의 시선을 눈치챈 유 대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미 사진을 찍어서 제임스 밀러 씨와 협회에 보냈어요. 곧 답이 올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유 대리가 안심시켰지만, 정우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정우의 표정을 낙담이라고 여긴 유 대리가 무거운 분위기에 질려 조심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혼자가 되자.
한참을 침묵하던 정우의 입이 열렸다.
“……강해지고, 싶다.”
강함에 대한 갈증.
순수한 힘에 대한 갈망.
아버지라는 의미를 배제한 새로운 동기가 정우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웠다.
정우도 한국인이라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토록 허무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과거 역사를 지울 수 없고, 민족적 분노는 지울 수 없어도.
같은 인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이.
일본에게 왜 감정이 좋지 않았던가.
그들이 한국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고 죽이고 범하고 조롱하였기에, 쉬이 넘기기 어려운 골이 생긴 것이었다.
빌런은 그것의 결정판이나 다름이 없는 허무한 죽음을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수르트.
그 이명에 걸맞게 모두를 불태워 죽인 그의 손속은 잔인했다.
일일이 고통을 가하고, 몸부림치는 상대의 죽음을 만끽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괴물들.”
정우는 그런 괴물이 몬스터보다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런 괴물의 시선에 움츠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똑똑.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꾸조차 없는 정우의 귓가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사사키라고 합니다.”
사사키?
그제야 정우는 문밖에 관심을 두었다.
“……들어오세요.”
딸깍.
“감사합니다.”
상당한 미남의 등장에 정우는 살짝 놀랐다.
‘그러고 보면 본 적이 있네.’
이름을 듣고는 알지 못했던 인물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일본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던 영상이 얼핏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저는 사사키 후유라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이름까지 바꾼 인물.
“……반갑습니다.”
정우는 그의 인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주 인사하자 사사키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피해를 줄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뜬금없는 말에 정우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대적할 수 없는 강자를 앞두고 기절한 것뿐이었다.
“한국 협회에 연락을 한 덕분에 그래도 빠르게 대응해 피해를 줄였으니까요.”
평소 사사키는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정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사키는 한국 협회의 협회장이 직접 일본 협회에 연락을 준 것.
그리고.
“징벌의 처녀가 직접 일본에 와준 덕분에 추가 피해를 막았습니다.”
“……!”
그 코드명에는 정우조차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유서린?’
협회장의 딸이자 S급 플레이어 유서린.
그녀의 파견은 일본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을 만한 도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