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상(異象)
“오케이?”
“고마워요.”
정우의 인사에 제임스 밀러가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문을 닫고 나자.
갔다 와서 제대로 설명해줘!
후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의 음성이 뒤따랐다.
방음 시설까지 뚫을 정도의 소리라니.
“문이나 열었을 때 하든가. 마력까지 써서 고함을 지를 일인가?”
정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받았네요?”
“그거, 초대권이에요?”
“아마도 그럴 것 같죠?”
유 대리는 초대권과 집무실 문을 번갈아 보았다.
“아까 주지. 은근히 허당이에요.”
“제임스 팬 아니었어요?”
“가까이서 보는 건 비극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죠. 아직 비극까진 아니지만.”
둘이 픽 웃어 버렸다.
“언제 갈 거예요?”
“준비되는 대로 바로요.”
“…닥터 브라운에게 메일부터 넣어 놓을게요.”
“고마워요.”
“돈 값은 해야죠.”
단호한 표정의 그녀가 또각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일본…이라. 우연찮게 집 근처로 가네.”
일본이 옆집처럼 느껴지자 정우가 어이없게 웃었다.
* * *
끼릭.
회전하는 열쇠의 울림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날이 바뀌어 열쇠를 사용한 정우는 불현듯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나에게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는 네가 밉다!
-그 먼 과거, 네 손을 잡은 걸 후회하는 순간이… 난 언제고 올 줄 알았다.
-나와는 다른 널 증오한다! 그러니… 내놓아라! 이젠!
번쩍!
“후욱, 후욱!”
정우는 두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비행기 안.
회랑의 접속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인지되기도 전에.
저릿!
돌연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몰아쉬는 숨결이 흩어지는 영혼과도 같고.
욱신거리는 심장의 고통이 찢어지는 영혼과도 같아.
정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통증을 참아 냈다.
다행히 통증은 길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승무원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물을 요청했고, 받아든 물을 단숨에 비우자 뜨겁던 열감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강렬한 말.
하지만 막상 기억하려고 떠올리자 흐릿한 절규.
정우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모르겠어.’
뭔가 모를 강렬함이 머릿속을 강타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모순적인 감각에 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새삼 회랑 열쇠에 대한 생각이 들어 열쇠를 확인했다.
[ 회랑 열쇠 ]
마녀 일족의 비처, 회랑으로 통하는 유일무이한 열쇠.
양도가 불가능하며, 사망 시 소멸한다.
사용제한 : 1일 1회
(1/1)
“남아, 있어.”
열쇠의 횟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접속에 실패했다는 뜻.
정우는 잠깐 망설이다 다시 열쇠를 사용했다.
그 강렬했던 절규가 떠올라도 좋고.
회랑에 접속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끼릭.
예의 소리와 함께 세계가 반전한다.
“…음. 뭔가 이상한 감각이 들었던 것 같소만, 착각인 듯하오.”
그리고 이지스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에 안도하면서도, 정우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날짜가 바뀌면 바로 오실 줄 알았소.”
“이동 중이라서.”
“그렇구려. 자, 이것부터 보시오.”
이지스는 정우의 요청에 따라 영혼과 관련된 서적을 차곡차곡 꺼냈다.
영혼학개론.
영혼의 의미.
영혼과 마력의 상관관계.
그들이 주장하는 영혼이란?
네 권의 책 제목이 도드라져 보였다.
약간 어색한 변역기를 돌린 것처럼 때때로 어법이나 단어가 어색하긴 했지만, 정우는 어렵지 않게 책을 탐독했다.
이지스가 고른 책은 영혼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과 설명이 주된 내용이었다.
덕분에 정우는 어렵지 않게 영혼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한 가지 단어에 집중했다.
“신?”
“먼 과거엔 존재했다고 하는 존재요. 자존자, 전능자, 전지자. 마력은 그의 살과 피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광신도도 존재했었소.”
빠르게 날아온 책 하나가 이지스의 손에 들렸다.
이것이오, 말하는 이지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뜩치 않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읽어 보시오.”
이지스는 책을 빠르게 책장에 꽂았다.
“그 부분은 우리도 확신이 없소. 신이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오.”
이지스는 그 책이 쓰인 건 까마득한 과거라는 말을 첨언했다.
영혼의 의미라는 책.
딱 거기서만 등장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영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이 생명을 탄생시켰고.
생명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죽음과 동시에 영혼은 합당한 절차에 따라 신께 귀속된다고.
‘마치 기독교의 그것과 같군.’
익숙한 주제였다.
‘그러고 보면….’
“책의 제목이 보이는군.”
“오! 그렇소?”
정우의 말에 이지스는 과하게 기뻐했다.
“왜 그러지?”
“우리의 위치는 절벽에 매달린 실족자나 다름이 없소. 때문에 왕이 회랑에 적응하면 할수록, 우리 역시 보다 안전해진다오.”
“어떻게?”
“통로. 회랑을 중심으로 통로를 연결할 수 있소. 그 거미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나 했소. 서로의 마력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우린 통로를 통해 우리와 회랑을 아예 연결할 셈이오.”
이지스의 계획에 정우는 침묵했다.
‘확실히 나는 아는 게 적어. 이건 큰 문제야.’
이게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아닐지 가늠이 서질 않았다.
그나마 운명공동체로 묶인 일족이 안전해진다면, 훨씬 낫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지식.
그 단어가 ‘능력’처럼 목마르기 시작했다.
“걱정 마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맺은 맹세요.”
이지스는 정우의 생각을 읽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까지 건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왕께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나쁠 건 없을 것이오.”
* * *
영혼의 개념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구에도 영혼에 대한 여러 가설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으며, 신화가 존재했으니까.
가장 간단히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도 흔히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치고는 너무도 쉽게 다가와 있는 영혼.
그런 개념치고.
“…어렵군.”
영혼의 수복에 대한 개념을 잡는 건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애당초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건, 지옥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게 종교적 입장이었다.
참선?
기도?
예배나 묵상?
그 어떤 것도 영혼의 수복과는 관련이 없었다.
세척과 관련이 있을 뿐.
정우는 닥터 브라운과의 약속을 기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사카의 한 호텔.
세계적인 여러 학자들의 모임이어서 그런지 경계가 삼엄했다.
경제와는 달리 일본의 플레이어 수준은 중상.
A급의 수는 많으나 S급의 수가 부족했다.
때문에 일본은 외교적인 일에 사활을 걸었고, 여러 회의나 행사를 주최하여 국가 이미지를 격상시켰다.
중상이라는 평가 자체가 외교적인 부분까지 포함된 거라는 중론이 많은 걸 보면, 일본은 오랜 아시아의 강자의 반열에서 한 발 밀려난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 마정석 재련 기술.
마정석을 이용한 여러 물건 제조 기술.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마정석을 캐내고, 던전의 잔여물을 수거하는 수거전담팀을 국제적으로 운영했기에.
현상 유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꽤 수준이 높은데요?”
정우의 플레이어 식견은 높지 않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플레이어야 어린이도 알 정도였으니, 정우가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각 국가에서 활동하는.
그것도 지역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플레이어나 집단에 대해서 아는 건 매우 적었다.
하지만 정우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대외적인 지식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무기.
‘생각보다 강해.’
바로 마력을 보는 눈이었다.
그건 협회의 감지기와는 다른 체계로 정우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고작해야 경호를 서고 있는 플레이어의 마력이 생각보다 더 강했다.
‘억누르고 있는 힘이 보인다.’
아라크네를 죽인 이후.
정우의 마력감지능력은 보다 예민해졌다.
‘아니, 공명을 배우고서부터인가?’
이전에는 흐릿한 일렁임으로 보이던 마력이, 영화의 CG로 등장하는 것처럼 선명해졌다.
꿈틀대며 주변으로 뻗어 나갈 듯하다가 갈무리되어 다시 몸속으로 돌아가는 플레이어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아홉. 열. 열 명이네.’
곁에서 근엄한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는 경호원들 태반과는 다른 강함.
최소한 C급의 플레이어로 보이는 그들을 보며 말하는 정우를 향해 유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오니 길드가 그렇게 강한 길드는 아닌데요.”
“경호 길드에요?”
“네. 길드 마스터가 B급이고, C급이 세 명. 나머지는 다 D급 이하일 거예요. 외부는 경계조나 마찬가지라 한정우 씨가 그렇게 감탄할 정도는 아닐 텐데요?”
“……!”
그 말에 정우의 눈이 커졌다.
일순간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았다.
강하지 않다?
외부 경계조 수준?
‘잘못 본 건… 아니야.’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데?’
마력의 흐름은 처음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감지될 만한 외부까지 뻗어 나가지 않는 마력.
다시 회수되어 스스로를 숨기는 듯한 외형까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퍼뜩!
‘제임스 밀러!’
그와 동행한 던전에서 처음 알게 된 물건, 마력억제제.
그때는 지금보다 더 흐릿하긴 했지만, 막상 떠올려 보니 느낌이 비슷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길드의 길드원이 마력억제제를?
불안감이 보다 덩치를 키웠다.
정우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관리자! 이 행사의 관리자와 만나게 해줘요.”
“…한정우 씨?”
“당장!”
* * *
그것은 자연재해로 분류된다.
묻지마 살인이 예견할 수 없는 종류의 그런 재해인 것처럼.
일반인이 빌런을 만나는 건, 원래라면 ‘사고’에 속했다.
그게 강도가 높아 재해로 분류될 뿐.
의외로 빌런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적어도 본색을 드러내 살인 따위를 저지를 빌런과 조우하는 건.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인 테러. 목적이 뭐였어요?”
정우의 물음에 유 대리가 놀랍게도 달리며 태블릿을 조작했다.
“안 나와 있어요. 권한 밖인가 봐요.”
“협회장님께라도 전화해요!”
“한정우 씨! 이거, 진짜 왜… 또 불안하게.”
입술을 잘근 씹은 유 대리가 유지석 협회장에게 통화를 걸었다.
그나마 정우의 비서이기 때문일까.
우려와는 달리 유지석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헉헉거리며 내달리는 소리.
인사를 건너뛰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유 대리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낀 유지석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드레이크의 심장일세.
“실패했나요?”
-다행히 실패했네. 무슨 일인가.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닥터 브라운을 만나기 위해서요. 그런데 한정우 씨가 갑자기 경호팀이 이상하다고 해요!”
-경호팀이?
“생각보다 강한 이들이 외부 경호를 맡고 있대요. 확인 좀 해주세요. 라스베이거스처럼 빌런들이 탐낼 만한 물건이 이 근처에 있는지…!”
유 대리는 확실히 유능했다.
정우의 물음에서 본론을 뽑아 정확하게 전달했다.
긴박한 분위기.
유 대리는 무려 협회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네.
곧장 끊긴 전화.
그제야 협회장에게 지시를 내린 게 생각이라도 난 듯, 유 대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내가 미쳐!”
하지만 정우는 그런 유 대리의 심정을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눈동자.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움직이는 무릎.
‘……이상하다?’
아라크네와의 전투는 막상 짧았지만.
배움은 상당히 많았다.
플레이어는 스킬을 사용한다.
스킬은 마력을 사용한다.
게임의 버튼처럼.
스킬은 ‘의지’로 ‘발동’된다.
하지만 장치의 사용을 위한 이지스의 교육과 통로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정우는 다른 플레이어와는 상이한 체계를 습득했다.
마력.
그 자체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우와 잘 맞았다.
아니, 적합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꼭 알맞았다.
때문에 마력을 보는 눈 역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딱히 스킬의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습득했을 뿐.
그리고 정우는 그러한 변화를 아라크네와의 전투를 통해 정확하게 체득했다.
때문에 의지가 보인다.
스킬이 아닌.
‘마력의 의지가…!’
사방으로 퍼질 듯하다 자취를 감춰가는 모양새나.
“유 대리님.”
“…네?”
“저쪽엔 뭐가 있죠?”
회의장 옆의 한 건물을 가리킨 정우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잠깐만요, 다급히 여러 정보를 검색하던 유 대리가 멈칫했다.
“……보관소.”
띠링!
때마침 유 대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유 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보관소! 이틀 뒤에 공동 연구가 잡혀 있는 물건이 있네.
“그게 뭔가요?”
-트롤의 심장! 이미 일본 측에 연락을 취해놨…….
콰아아앙!
왜애-앵!
갑작스러운 폭음과 경보음.
깜짝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어우러져,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연기처럼 사방이 어지러워졌다.
-……사사키 플레이어를 찾아 합류하게. 믿을 만한 인물이니 도움이 될 걸세.
“알겠습니다!”
-자네는 몸을 피하고….
“끊을게요!”
한 번 해봤다고 한결 자연스러워진 투로 종료 버튼을 누른 유 대리가 정우를 향해 소리쳤다.
“사사키 플레이어를 찾으래요.”
“어디에 있나요?”
“……어디에 있을까요?”
“……?”
“저…… 존경하는 협회장님?”
공손히 전화를 거는 유 대리.
정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