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급 던전의 찬탈자-33화 (33/293)

33화

- 덧씌우기

볼코프가 잡히자마자 정우는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괜찮냐며 귀찮게 구는 유 대리의 물음에 대충 대꾸한 그가 훈련장에 도착했을 땐.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죠. 보스의 지시입니다.”

제임스 밀러 곁에서 본 경호원 한 명이 정우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때마침 걸려온 전화는 의심을 지워 버렸다.

“빠르군요.”

대신에 그는 나직이 감탄했다.

이반 드라고는 이미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임무’를 핑계로 따로 빼낸 것까지, 주변을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노련한 대처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정우는 처음 보는 제임스 밀러의 싸늘한 표정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아, 미스터 한.”

다행히 정우를 보는 순간 표정이 풀렸지만, 그는 제임스 밀러가 마냥 유쾌하고 가벼운 사내가 아님을 다시 체감했다.

‘그래. 이 사람 역시 거인이지.’

1세대 플레이어로 현세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인.

“어떻게 알았지?”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제임스 밀러가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뭘요.”

“저 새끼.”

유리창을 벽으로 두고, 안쪽에 결박되어 있는 이반 드라고가 보였다.

“제임스 밀러 씨는 왜 제 말을 믿은 거죠?”

“제임스.”

“네?”

“그냥 제임스라고 부르라고.”

“…그러죠. 제임스.”

뜬금없는 말에 조금 망설이던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한의 말을 전적으로 믿은 건 아니야. 그저, 의문을 검증했을 뿐이지.”

의문의 검증.

‘연금술사답네.’

“빌런이야.”

“…네?”

정우가 반문했다.

자신을 노린 게 의아하기는 했었다.

빌런, 이라는 의심을 품기도 했었다.

한국의 트레이닝 센터에서도 결계사라는 빌런이 자신을 노리고 공격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때도 날 사로잡으려고 했었지.’

오한우.

그놈이 시작이었다.

‘대체 무슨 역할을 맡았기에…, 그 정도 거물이 달라붙었지?’

도살자.

결계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물.

“‘락’이 걸려 있어서 알아낸 건 많지 않지만, 놈들의 협회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군. 망할 바퀴벌레 새끼들.”

제임스 밀러는 빌런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냈다.

원한이 있는 듯하여,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거 보여?”

“……!”

정우의 눈이 커졌다.

제임스 밀러가 보여준 건, 피부였다.

타투가 새겨진, 피가 묻어 있는 살점.

“설마 이런 식으로 ‘연금술’이 사용될지 몰랐어. 정말… 진심으로 놀랐어.”

어느 부분이 분한 건지 제임스 밀러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벗겨졌다.

모멸감?

‘아니. …질시.’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를 고르라면 항상 순위에 올라가는 인물이 제임스 밀러였다.

그럼에도 그는 열등감을 느꼈다.

‘배리드(Berith).’

빌런이기에 언급하지 않은, 한 명의 연금술사를 빼놓아야지만 논의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라는 순위는.

“덧씌우기(filling). 방금 붙인 이름이지만… 더없이 어울리는 이름 아니야?”

직관적인 명칭이었다.

그리고 이반의 능력이 이해가 되는 명칭이기도 했다.

“…워리어의 능력인가요?”

“그래. 이해가 빠르군. 아주.”

제임스 밀러는 살점을 고이 다시 내려놓았다.

질시와 연구욕이 뒤섞인 눈빛으로 살점을 보는 제임스 밀러의 모습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밀리어에 시달렸으니까요.”

이반이 들었으면 욕설을 내뱉을 말을 하며, 정우는 눈가를 좁혔다.

“그렇군. 너 때문이었어.”

제임스 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지석에게 여러 말을 전해 들었다.

수많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이중 던전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이중 던전과… 네 개의 관문까지.’

미스 질의 첨언도 제임스 밀러에겐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그 고고한 대마법사가 ‘기대된다’는 어투로 누구를 지칭한 게 얼마 만인지.

“…….”

“너도 알겠지. 한국에서의 일.”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밀러의 말투가 더 편해진 건 문제가 안 되었다.

정우는 실제로 지금, 폐를 끼쳤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마인드로 제임스 밀러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빌런과 척을 졌다더니. 괜찮군.”

“……?”

뒷말이 이상해 정우가 그의 눈을 보았다.

“왜? 빌런 놈들을 소탕하는 건 플레이어의 숙명이야.”

플레이어의 숙명은 몬스터 퇴치와 이 기현상의 종결 아니었나?

정우가 그런 생각으로 입맛을 다실 때.

제임스 밀러가 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놈들’을 추려낼 수 있겠어.”

정우는 그가 말하는 놈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잠입자들.

빌런 주제에 능력을 속이고 스파이짓을 하고 있는 놈들을 추려낼 절호의 기회였다.

아니.

“지금을 놓치면 안 되겠군요.”

“맞아. 지금을 놓치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또 숨겠지.”

당장 몰아쳐야만 했다.

“미스터 한이 잡은 놈도 심문해야지.”

“직접 하시게요?”

“그럼. 여기에 나보다 더 심문을 잘하는 사람은 없거든.”

제임스 밀러가 자신 있게 웃었다.

* * *

제임스 밀러와 대화를 더 나눈 뒤에 돌아온 숙소에는 때아닌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타닥, 타닥.

자판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니, 피아노를 쳤어도 잘 쳤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정우는 피식 웃었다.

“룸서비스 좀 시켜줘요.”

정우의 기척을 들은 그녀가 말했다.

“여긴 호텔이 아닌데요?”

“그럼 사 와요. 달달한 거로.”

“……일 처리에 대해선 안 물어봐요?”

“자료 넘어왔어요. 한정우 씨가 오기 전에.”

“끄응. 대령하죠.”

제임스 밀러는 유 대리에게 각국의 협회와 길드에 보낼 자료 정리를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상당한 보수를 내걸었다.

유 대리가 눈에 불을 켜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자료를 만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참 돈 좋아하네.”

복도로 나선 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먹을 걸 사러 가던 정우는 순간 생각했다.

‘강해지긴 했다.’

수치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스킬의 효율이 달라졌다.

그전에도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던 마법이, 아예 궤를 달리한 것처럼 진화했다.

특히나 통로를 통한 마법과 물리 공격은 상대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결계사 정도는 이길 것 같아.’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정우는 승리를 자신했다.

C급.

어지간한 C급과 붙으면 승리하지 않을까.

정우는 그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제 한번 테스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그릇…….’

여전한 고민거리에 집어삼켜져 가라앉는다.

그릇의 수복.

‘그래. 내게는 회랑이 있어. 그곳에서 놈에 대해 연구한 뒤, 제대로 된 준비를 하자.’

마력의 성장.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의 상황에서 또렷한 유일한 확실성.

사막 고블린 족장.

정우는 놈을 잡을 생각을 했다.

유 대리는 정우가 사 온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흡입했다.

게임 폐인처럼 의자에 한 발을 올린 자세로 음식을 먹는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 과거가 의심스러워졌다.

‘바쁜 거만 끝나면 사막 고블린 족장이 나타나는 던전을 잡자.’

마력 수치가 상승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정우는 그때가 못내 기다려지기만 했다.

세 시간이 지나고서야 유 대리는 기지개를 켰다.

“끝났어요?”

“…아. 잘 먹었어요. 배로 보답할게요.”

유 대리가 방긋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유 대리님.”

“네.”

“혹시 사막 고블린 족장이 나오는 던전을 예약할 수 있나요?”

말이 예약이지, 정우의 행보는 보통의 F급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 E급까지는 협회에서 지원을 받는다.

각성 후 일정 기간, 협회는 그들을 위해 여러 던전의 공략을 맡기고 생활의 안정을 위해 수수료 없는 부산물 판매 대금을 지급했다.

정해진 일정대로 공략에 참여하고, 협회에서 훈련을 받으며 생활했다.

빠른 성장보다는 안전하고도 확실한 성장을 추구하는 협회의 운영 방식대로라면.

정우는 지금 겨우 세 개의 F급 던전을 공략했어야 옳은 시기였다.

하지만 정우는 여러 지원을 받아 F급은 물론, 등급 외의 던전까지 공략했다.

심지어 그를 지원해 주는 이들은 D급 던전까지라면 어렵지 않게 구해줄 수 있는 권력자였다.

특히나 미국이라면.

던전의 구매가 한국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기에, 정우의 요청은 어렵지가 않았다.

다만.

“…족장이요?”

‘족장’이라는 단서가 붙는 경우엔 예외였다.

“한정우 씨. 보통 족장은… 다른 몬스터만 나오는 던전보다 한 등급 높은 던전에 있어요.”

“알아요.”

“…진짜로 공략해 보시게요?”

“일단 가능 여부부터 확인하고, 공략 일정을 짜볼까 해서요.”

“…….”

유 대리는 정우의 말에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면 무덤덤한 척하고 있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C급 플레이어를 잡았다니. 그것도 빌런을…! 얼마 전에도 C급 플레이어와 얽히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C급 플레이어랑 C급 던전은 차원이 다른데? 아무래도 한정우 씨가 C급 플레이어를 잡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아닐까? 덕분에 지금 은퇴해도 배 곯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벌어들일 돈이 더 많을 텐데 쉽게 그만둘 수는 없지. 죽으면 어떻게 하지? 플레이어에게 만용과 방심은 죽음이라고 책망이라도 해야 하나? 세상에……. 저 사람도 좀 억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자기가 일을 만들어! 맙소사! 이 가슴 졸이지만 꿀 같은 보직이 위험해!’

협회에서 받는 추가 수당.

제임스 밀러에게 받는 수당까지 합쳐져,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숫자와 향후 통장 잔고까지 그려졌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유 대리의 표정이 울긋불긋해졌다.

정우는 그 기묘한 변화를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뭔 생각을 하는 건가요?”

“…실직이요?”

“네?”

정우의 반문에 뒤늦게 유 대리의 낯빛이 붉게 물들었다.

“하, 한번 계획해 볼게요.”

다급히 말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는 유 대리의 뒷모습을 보던 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또 뭔지.

입맛을 다신 정우가 소파에 앉았다.

두근.

빌런을 잡던 순간이 떠올랐다.

죽을 둥 살 둥 위기의 순간 끝에 행운의 승리를 거머쥐었던 오한우 때와는 달랐다.

완연한 승리.

‘사막 고블린 족장에게도 통할 만한 마법을 배우는 거다.’

막상 던전을 잡아도 공략이 불가능하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정우는 회랑에 접속했다.

끼릭.

“…이지스?”

접속한 회랑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마녀들의 모습이 저 멀리서 아른거리듯 보였다.

항상 주변에서 인사를 한 후 지식을 탐닉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더군다나 이지스는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정우는 눈가를 좁히며 천천히 걸었다.

여차하면 접속을 해제할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왕, 이여!”

하지만 그런 경계가 무색하게도, 저 멀리서부터 고함에 가까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지스였다.

흰색의 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철학자 같은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멋져 보였지만, 정우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다가온 그의 첫마디가.

“도움이 될 서적을 찾던 도중, 왕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을 찾았소.”

“……!”

무슨 도움인지 서두까지 잘라먹은 이지스가 숨을 골랐다.

“그릇의 수복.”

“……!”

대뜸 훅 들어오는 주제에 정우는 관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주제였으니까.

관심을 보이는 정우를 향해 환하게 웃은 이지스가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