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릇
“왕의 그릇은, 깨어졌소.”
이지스의 말을 듣자마자 정우는 심장이 철렁했다.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모든 플레이어는 각자 맞는 던전에서 성장한다.
상태창의 수치는 던전을 클리어 혹은 퀘스트의 완료에 따라 성장하며,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절대 법칙.
하지만 정우는 아니다.
왜,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릇이, 깨어졌다면….”
이지스의 말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책에 시선을 돌렸다.
그릇에 대한 설명.
마력의 용기인 그릇은 매우 중요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재능의 크기가 나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릇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물컵과 항아리가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물컵이 아무리 노력해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왕은… 이 이상 성장할 수 없소.”
쿵!
정우의 뒷머리가 욱신거렸다.
훅 하고 올라온 숨이 정우의 목구멍을 자극하고 뜨겁게 내뱉어졌다.
“조금 더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그릇은 절대적이오.”
이지스의 말에 정우는 머리가 아파 왔지만, 내심 다른 생각이 들었다.
모든 플레이어는 성장한다.
그리고 마력 또한 그러하다.
‘마력이… F급부터 S급까지 성장하는 거 아니었나? 수치가 엄연히 차이가 나던데… 그릇은 원래대로고 마력만 채워지는 건가? 그렇다면 모든 플레이어의 그릇은 동일하다는 건가? 아니면… 플레이어는 그 알 수 없는 시스템을 통해 그릇이 계속 커지는 걸까? 마력 수치는 그릇의 크기인 거고…. 하아. 모르겠다.’
정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되잡았다.
“하지만 깨어진 것은 이를테면 손상을 입었다는 것. 흔치는 않지만… 회복한 경우가 있소.”
이지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정우의 두 눈을 지그시 보았다.
정우가 의아함을 머금을 때.
“그리고 왕은, 이미 한 차례 그릇을 조금 수복했소.”
“……!”
정우의 두 눈이 커졌다.
수복했다고? 언제?
* * *
회랑에서의 대화는 정우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마녀의 마법은 협회의 그것보다도 훌륭했다.
협회의 테스트가 X-ray였다면, 이지스의 테스트는 MRI였다.
보다 세부적이고, 효율적이며, 디테일한.
무거운 생각 가운데에서도 정우는 그들의 마법에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회랑의 열쇠는 왕의 소유물이오. 이 모든 지식은 왕의 열쇠로 반응할 것이오. 왕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기록조차 제대로 열람하지 못할 테니, 부디… 성장하여 오시오. 나 역시 고민하겠소.’
회랑과 현실은 시간의 흐름에 차이를 보였다.
많은 검증을 거치고 대화를 나눴음에도 현실의 시간은 고작해야 1시간이 흘렀을 뿐이니까.
정우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성장.
또 그 단어가 발목을 잡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정우가 대답하자 문이 열리며 유 대리가 들어왔다.
나름의 설전을 벌이던 그녀의 표정은 싱글벙글 밝기만 했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요.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에 있나요?”
제임스 밀러는 통이 컸다.
정우를 후원하는 한편, 그를 전담하여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유 대리에게도 상당한 거액의 보수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정우의 요청 사항을 대부분 처리하는 건, 유 대리가 아닌 제임스 밀러의 비서진이었다.
즉, 공돈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하단 소리.
나름의 업무는 있겠지만 그 강도는 현저히 적을 게 분명했다.
“오신 걸 보면, 잘 처리가 된 모양이네요.”
정우의 말에 유 대리가 다가와 태블릿을 조작했다.
“잘 처리되었어요. 통장 잔고도 확인했고.”
“물질 만능주의 같은 소리네요. 전 안전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에?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 대리의 눈이 정우를 훑었다.
“원래 그랬어요. 아버지만 정상이었다면 플레이어가 될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죠.”
“으음.”
“뭐, 아무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요.”
“흐음. 뭐, 아무튼 제 임무는 그게 아니니까요. 여기에 있어요.”
제임스 밀러의 비서진과 대화를 나눈 그녀는 그의 후원의 범위에 대해 정리했다.
보기 좋게 정리된 자료를 본 정우의 표정 역시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반색할 수만은 없을 정도로.
“……엄청나군요.”
지원이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요. 저도 이제 부자라고요.”
절 버리면 안 돼요, 한정우 씨.
유 대리는 농담처럼 그렇게 정우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오늘도 트레이닝 룸으로 가실 거예요?”
어지간하면 훈련을 빼먹지 않은 정우의 패턴을 알기에, 유 대리가 시간을 보며 말했다.
“네. 일단은… 몸을 움직여야겠어요.”
“연락해놓을게요.”
유 대리가 자연스럽게 트레이닝 센터에 예약을 잡았다.
“내일 일정은 변함이 없고요?”
예약을 끝마친 유 대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없어요.”
“그대로 진행할게요. 그나저나 아쉽네요.”
“뭐가요?”
“시간만 맞았으면 경매에 참가해도 좋았을 텐데요.”
“유 대리님이 가고 싶은 건 아니고요?”
“들켰나요? 그것도 있고요….”
유 대리가 혀를 날름거렸다.
냉정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유 대리는 꽤나 괜찮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우는 지금이 보기 좋았다.
편해진 덕분에 딱딱하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
“그나저나. 뭐 할 거예요?”
“뭘요?”
“후원금이요.”
“음…….”
“투자처 좀 알려줘요?”
유 대리 눈에는 별다른 사심이 없었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투자처를 구해다 주려는 듯한 느낌.
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정한 게 없어요. 조금 더 돈을 모아서 이사를 시켜드리고 싶기는 한데…….”
“어머님이요?”
“네.”
“지금 B 지구에 계시잖아요. 그럼 A 지구를 염두에 두시는 건가요?”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A 지구라…… 아무래도 안전하긴 거기가 더 안전하겠지만……. 엄청 비싼 거 알죠?”
집값뿐만이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물가가 월등히 비쌌다.
물론, 가장 부담되는 건 집이었지만.
‘아무래도… 빚을 갚아야겠지?’
그러고 보면 플레이어임에도 던전을 공략해서 얻은 수익이 거의 없었다.
협회에서 준 A급 대우로 얻은 이득과 대출.
그리고 제임스 밀러의 후원을 통해 얻게 될 이득.
이자는 없다지만 갚아야 할 돈이 천문학적이었다.
고작해야 몇 달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금액.
‘돈부터 갚자.’
한번 떠올리자 부채감이 확 밀려들었다.
정우는 빚 청산을 목표로 두었다.
“…일단 쉬어요.”
그런 정우의 표정을 읽던 유 대리 역시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그녀는 대충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정우는 나름의 계획을 세우다가 볼을 긁적였다.
정확한 수익이 필요했다.
던전의 공략.
그에 따른 수익이야말로 온전히 자신이 계산할 수 있는 월급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임스 밀러의 후원금은 상당했지만, 막상 그가 후원을 끊어 버리면 수입은 전무했다.
그의 호기심을 계속 충족시켜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세상일이 쉬울 수만은 없겠지.”
그릇의 수복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한, 이 관심이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후원 때문만은 아니지만.”
우웅.
정우의 손이 회전하며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생겨난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
서로 연결된 두 개의 구멍은 게이트의 그것처럼 허공을 꿰뚫고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마력이 필요했다.
이진수의 말마따나 스스로 방법을 찾은 상황.
힘이 부족해서 기껏 얻은 방법을 사용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결코 원치 않았다.
아버지를 구하는 것.
그건 정우에게 최우선 순위였다.
“뭘까……. 내가 그릇을 고친 계기가.”
아무리 궁리해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특별했고, 모든 게 특이했다.
문제는.
“각성 이후 단 한 번도 마력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마력 수치는 변함이 없었다.
플레이어로 각성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마력이라는 걸 보게 된 순간?
정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머리를 흔든 정우가 트레이닝 센터에 도착해 강도 높은 훈련을 끝마쳤다.
구슬땀을 흘리는 그를 보며 감탄하는 여러 플레이어들 사이에, 두 눈을 빛내는 한 명이 있었다.
‘…생각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 봤자 하위 플레이어잖아. 근데 왜….’
입술을 핥은 그의 시선이 정우의 전신을 훑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거지? 이거… 천하의 도살자가 한낱 F급에게 물을 먹었다더니, 사실인 거야?’
당장의 사실이 궁금해졌지만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평범한 플레이어의 모습을 연출했다.
자신에게 내려온 지령은 하나.
한정우란 플레이어의 위치 보고뿐이었다.
제임스 밀러는 연금술사답게 영입하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특수한 검사를 진행했다.
특히나 빌런들에게 ‘약물’ 검사는 악명이 높았다.
그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잠입자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불과 네 명만이 잠입에 성공한 철옹성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다.
조금의 월권은 용납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월권보다는 지시에 순응하는 것을 택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새로운 ‘시야’가 공유된다.
* * *
마법계 플레이어는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파괴.
공격형 마법이 주를 이루며 던전에서 각광받는 직업군이었다.
여러 원소, 정령, 골렘 등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모든 능력군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둘째, 탐지.
여러 탐지 능력을 지녔으며, 특히나 마력 탐지는 여러 함정형 던전에 필요한 능력이었다.
비슷한 스킬이 여럿 있지만 보통 마법사라면 공격 마법을 사용할 줄 아니 효율이 좋았다.
셋째, 정찰.
마법의 눈, 패밀리어 따위의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로, 정찰에 특화된 이들이다.
공격형 마법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공격력을 지닌 사냥꾼이나 암살자보다 효율이 떨어져서 성장하기가 어렵다.
넷째, 부여.
연금술사, 대장장이와 더불어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다.
특히 연금술사와 겹치는 능력이 많기에 최근에는 굳이 분류하지 않고 통틀어서 ‘인챈터’라고 부르곤 한다.
유 대리의 문자를 본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패밀리어….’
정우의 눈은 마력을 본다.
그것은 게임으로 따지면 액티브보다는 패시브에 가까웠다.
언제고, 어느 때고.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력은 정우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이진수만이 알고 있는, 스스로의 무기.
그게 뜬금없이 빛을 발했다.
훈련을 끝마치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한 줄기의 마력이 보였다.
‘마력의 실.’
아라크네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외부에서 뻗어 온 마력의 실은 서랍장 아래로 향했고, 그곳엔 절대 마력을 머금을 수 없는 놈이 떡하니 마력을 머금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바퀴벌레.
다리 두 짝이 뜯겨 나간 놈이 고요히 선객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놈을 보는 순간 정우는 오히려 관심을 끊었다.
대신 유 대리에게 문자를 보내 이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에 따른 정리가 고작해야 20분도 채 되지 않아 답장으로 온 것이다.
정우의 시선은 그중 하나, 정찰로 향했다.
곤충과 동물.
제2의 눈이라고도 불리는 패밀리어 마법은 특정 지역에선 엄청난 효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그 특정 지역이, 던전이 아닌 현실이란 점이었지만.
‘누구지?’
태연을 가장하며, 정우의 시선은 실로 향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보고.
때때로 운동과 휴식을 취하며 창문 밖을 보았다.
‘트레이닝 센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있었던 장소로부터 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가볼까?’
다시 훈련을 하라면 못할 것도 없었기에, 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먼저 상대의 정체를 밝히기보다 스스로의 상황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여긴 여러 아이템이 가득한 장소야. 그런 곳에서 패밀리어 마법을 사용했다면…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감시하는 걸 넘어갈 순 없지.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