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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9화 (29/293)

29화

-회랑

쾅, 우지끈!

분노에 찬 주먹이 탁자를 부쉈다.

일그러졌다.

원흉을 데려오겠다던 결계사는 오히려 소란을 만들어서 감시의 눈을 붙여놓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은신처도 포기한 채로, 오래된 하수구 속의 공간에 숨어드는 것.

이곳 역시 미리 준비된 은신처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환경적으로 열악하며 고약해 아무도 원치 않는 장소였다.

“젠장! 젠장! 젠장!”

더불어 활동이 쉽지 않았다.

이곳은 정확히 말하면 은신처보다는 도피처에 어울리는 장소였으니까.

이대로라면 계획이 실패한다.

그런 초조함이 모두의 마음을 장악했다.

자연스럽게 결계사를 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만.”

리더는 이 와중에도 침착했다.

하기야 그가 어떤 사람인데.

“정보원은?”

“…아무래도 여긴 정보가 전해지기 어려워요. 통신은 물론 비타까지 먹통인 곳이니까요.”

“마지막에 파악된 내용은?”

은신 능력을 지닌 정찰병을 데리고 은신처를 찾은 리더는 치미는 화를 애써 억눌렀다.

자신했던 결계사의 실패는 너무도 큰 뼈아팠지만, 이번 계획에서 그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은 차후로 미뤄야 했다.

“리더가 아는 것과 동일해요.”

“…정보원도 몸을 사리고 있다는 소리군.”

턱을 쓰는 그의 모습을 결계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보았다.

‘빌어먹을. 설마 놓칠 줄 몰랐는데…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야 했나? 아니, 어떻게 익숙해진 거지?’

한정우란 놈을 떠올리면 지금도 의문이 뒤따랐다.

F급.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찮은 수준.

그럼에도 자신의 스킬에 반응했다.

보고, 느끼고, 움직였다.

‘젠장!’

결계사는 정보원을 욕했다.

제대로 된 정보만 주었다면 자신이 그까짓 놈을 놓쳤을 리가 없다는 게 그의 마음을 들쑤셨다.

힐끗.

그런 결계사의 표정은 본 리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이 딴 데로 가 있으니, 정교함이 생명인 이번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이 아니면… 최소한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고민하던 그가 결정을 내렸다.

“속행한다.”

이대로라면 포기하는 게 많았다.

정보가 끊긴 상황.

변수는 많았지만, 수년간 세워 온 계획이 단번에 무산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협회의 지원은 필수겠군. 협회에 연락해. 무조건적으로 지원을 요청한다고. 내게 주어진 권한을 이번에 사용하겠다고… 전해라.”

* * *

[ 열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친절하게 묻는 메시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 오셨소?”

흰색의 긴 복도.

거대한 통로처럼 보이는 복도의 양옆에 나타난 수많은 책장 사이로, 여럿의 인파가 정우를 반겼다.

정우는 그들을 보자, 새삼스레 다시금 퀘스트의 내용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변경되어 완료된 퀘스트.

[ 마녀 일족의 왕 ]

마녀 일족의 수장 ‘이지스’는 자신들을 구해주는 이에게 일족의 모든 권한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수장이 내건 조건에 따라, 구함받은 일족은 당신을 ‘왕’으로 섬길 것이다.

등급 : A

보상(1) : 회랑 열쇠의 온전한 소유권

보상(2) : 마녀 일족의 충성

보상(3) : 회랑의 소유권(임시)

“이쪽으로 오시오.”

마녀 일족의 수장, 이지스가 정우를 반기며 안내했다.

수장의 자리를 내려놓은 그는, 집사장의 자리에 앉았다.

순전히 본인 마음대로였지만, 이지스는 철저히 정우의 이득에 따라 움직였다.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는 물론 회랑의 소유권까지,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이곳이 왕의 자리이오.”

딱히 다를 바가 없는 복도의 일부분에 놓인 의자는, 어딘지 모르게 황량해 보일 정도였다.

“이게요?”

“편하게 말하시오. 왕이 신하에게 말을 높이는 경우는 없소.”

“…하오체로 왕에게 말하는 신하도 없지 않나요?”

“원하신다면 말투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로 하지요. 아니, 하지.”

이지스가 씨익 웃었다.

단순히 도깨비불과 같던 형태와는 달리, 온전한 모습으로 대면한 이지스는 굉장히 중후한 멋들어진 중년인처럼 보였다.

브레드 피트가 조금 더 늙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여긴 복도로만 이루어져 있나 보네요. 아니…. 보군.”

“맞소. 하지만 그 역시 끝이 아닐까 싶소.”

“무슨 말이지?”

“우리 일족의 역사를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소. 아무래도 우리를 이해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할 것 아니오.”

그렇게 말하며 딱, 손을 튕기는 이지스.

허공을 날아온 책 하나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이곳은 허상이오. 이 의자도, 우리도. 전부 다 허상으로 이루어져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거짓은 아니오.”

“…지식.”

“오, 맞소. 지식만은 진실이오. 그리고 그건 이제… 왕의 것이오.”

지식.

그 단어는 정우에게 매우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갈증이 나던 부분 중 하나였다.

정우의 눈을 본 이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크네에 붙잡혀 있었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잊었고 보지 못했소. 하지만 나는 일족의 염원을 담아, 최후까지 의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었소.”

정우는 이지스의 눈을 지그시 보았다.

흰자가 아닌 눈동자는 짙은 푸른색으로, 전형적인 서양인의 그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린 왕을 보았고, 왕이 가진 여러 모순을 확인했소.”

“그래서 내가 테스트를 요청했었지. 정확하게 판단해 달라고.”

“일단 말씀하신 대로 몇 가지 테스트를 하기로 했소. 왕의 세계에서 하신다던 테스트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똑같았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제임스 밀러를 닦달하여 진행한 테스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변한 게 없었다.

심지어 아라크네를 죽였음에도 근력이나 민첩 따위의 능력은 전혀 상승하지 않았다.

게이트의 시작점이 될 ‘통로’를 얻지 못했으면, 입맛이 매우 쓸 뻔했었다.

‘그 정도 난이도를 클리어했음에도 성장하지 않다니. 대체 왜 그런 거지?’

“일단 테스트부터 진행하도록 하시죠. 우리 마녀 일족은 예로부터 여러 검증을 발전시켜왔소.”

정우는 마녀의 일족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를 떠올렸다.

마녀(魔女).

처음의 마녀는 중세의 그것과 비슷했다.

큰 도시나 마을 따위에서 여러 일이 생겼고, 그렇게 생긴 여러 문제와 분노를 터트릴 목표가 필요했다.

힘이 없는 여자가 타깃이 된 것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게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의 분노를 감내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당시 일족 수장의 딸이었다는 점이다.

일족의 수장은 분노했고, 일족 역시 분노하여 집결했다.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고, 일족은 승리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공명이라는 힘을 통해 증폭된 마법은, 당시의 마법사 두엇을 홀로 감당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고.

때때로 등장하는 텔레포트는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동성과 파괴력.

그 모든 것에서 우위를 차지한 일족은,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라 부르며 처형했던 것에 기인하여.

스스로를 마녀 일족이라 칭했다.

제국의 왕을 앞에 둔 수장은 눈물을 머금고 선언했다.

너희의 자리는 원치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마라.

혹여나 일족이 다시 한번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

마녀 일족의 가장 위대했던 세대.

“그랬던 적도 있었소. 뭐, 후일엔 달랐지만.”

어느새 입 밖으로 내뱉던 정우의 말을 들은 이지스가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정우의 눈에 의문이 감돌았지만 이지는 그런 정우를 애써 무시한 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작은 원룸 크기의 마법진 앞에 멈추어 선 이지스가 말했다.

정우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기하학적인 형태가 그려진 마법진은 과거 협회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

이지스는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감탄하는 정우를 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가 본 정우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불균형한 인물이었다.

단번에 일족의 비기를 습득하는 한편, 마법적 이해도가 말이 안 되게 뛰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도가 아니지. 습득력이야.’

설명하라면 아직 더듬거리거나 막히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건, 설명과는 달리 막힘이 없었다.

공명도.

장치의 사용도.

심지어 원하는 만큼 장치의 강도를 조절한 것도.

그리고.

‘통로…. 허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아주 조그만 크기라고 하지만 통로를 연달아 사용했던 장면은, 이지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게 부족했다.

“시작하겠소.”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진이 공명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마법진은 매우 아름다웠다.

바닥에서부터 조금씩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마치 넝쿨처럼 여러 갈래로 정우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언뜻 거부감이 들 만했지만 정우는 담담했다.

이 마법진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넝쿨처럼 타오른 연기가 정우의 발, 무릎, 골반과 허리, 가슴과 어깨를 타고 올라가 조심히 얼굴을 감싸고는 정수리에 닿았다.

파르르!

그때만큼은 정우도 기묘한 긴장에 몸을 떨었다.

이지스는 그런 정우를 주시했다.

조금의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마법진의 세세한 변화와 정우의 반응을 머릿속에 담았다.

이윽고 마법진의 신비함이 사라졌다.

정신을 집중하던 정우와 이지스가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대화가 필요하겠군요.”

“이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소.”

* * *

회랑에서 할 수 있는 건 대화.

회랑에 설치된 마법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독서가 전부였다.

삭막한 복도 중간에 털썩 앉은 둘은 흔한 차 한 잔 마시지 못한 채 대화를 나눴다.

“느끼셨소?”

“…음.”

정우는 침음을 삼켰다.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건, 정우도 잘 알고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튜토리얼.

자신을 노리고 그간의 법칙을 무너트리는 몬스터.

반복되는 공략 가운데에서도 등장한 적 없었던 비밀 공간의 발견.

그리고 자신에게만 반응하듯 등장하는 퀘스트까지.

때문에 정우는 아라크네를 죽이고 퀘스트를 완료한 후, 이지스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여유를 찾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당연한 말이오. 마녀 일족의 수장, 이지스 라 브라임의 명예와 일족의 명예를 걸고. 더불어 열쇠에 맺은 계약을 걸고. 우리는 그대를 우리의 왕으로 섬기겠소. 부리시오. 모든 걸 도와드릴 테니…. 다만 그대 역시 우리를 온전케 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의 단언에 묘한 표정을 짓던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 한 번.

그 짧다면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기에, 이지스는 정우가 던전을 벗어난 후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지스는 아까 꺼낸 책을 건넸다.

“왕께 필요한 것일 거요.”

정우는 책을 받아들었다.

첫 장을 펼치는 그를 보며, 이지스가 말을 이었다.

“왕의 마력은 이상하오. 그 정도의 효율과 컨트롤을 지녔음에도 마력은 터무니없이 적소.”

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이지스가 턱짓했다.

책을 읽으라는 표시.

정우는 책에 다시 눈을 두며 귀를 열었다.

“거기에 보면, ‘그릇’에 대해 나올 거요.”

그의 말마따나 책의 서두에는 ‘그릇’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마력의 용기군.”

“맞소. 마력의 용기. 마력을 다루는 모든 이들은 모두 마력의 용기를 지니고 있소. 그 크기가 다르고 강도가 다를 뿐. 우리는 그걸 그릇이라 표현하오.”

“그게 이상하다?”

“그게 본론이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리다.”

이지스는 빠르게 책장을 읽어 나가는 정우를 보며 단언하듯 말했다.

“비정상이오. 왕의 마력은 효율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적으며, 왕의 그릇은 마력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적소. 하나, 그건 지극히 비정상적이오. 그릇의 질이 좋아야만 효율이 좋아지니….”

“그럼….”

“본래 왕의 그릇은 이렇지 않았을 거요. 그리고 지금. 검증 결과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소.”

이지스는 정우를 향해 무겁게 말했다.

“왕의 그릇은, 깨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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