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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7화 (27/293)

27화

-결착

오래 지속된 무기력증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변해 버렸을 때.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하던 감각이 아라크네의 전신을 장악했다.

달려드는 먹잇감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건 그저 본능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마력을 머금고 있음에야, 집어삼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실패했을 때에도.

아라크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이었다.

이제는 생경해진 감각이 갑자기 뇌리를 장악하고, 저 지하 밑에 파묻혔을 거라 생각했던 본능을 이끌어 낸 건.

퍼엉!

자신의 머리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 하나.

그리고 갑자기 사라지는 시야와 더불어 격렬히 몰려드는 막대한 통증.

어색함에 몸부림치던 아라크네가 정신을 차린 건, 다리까지 잘려 나가고서였다.

위기감.

그것이 마녀의 저주를 이기고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케에-!

이어지는 포효는 분노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집게 턱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아라크네가 선택한 건 하나.

오래 관찰해 왔고 그 무엇보다 강력해 보이던 이들을 집어삼키게 만들어 준, 그것.

“피해요!”

정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반사적으로 움직인 레베카는 자신의 귀를 살짝 찢으며 스쳐 가는 투명한 실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미줄! 보이지 않았어.’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검을 틀어쥔 그녀가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화악, 어딘지 모르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의 마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휘돌았다.

휘익, 휘잉!

“바람의 노래!”

검기를 한껏 머금은 그녀의 검이 전면을 풍차처럼 그어 가며 달려들었다.

까앙!

어느새 뿜어진 거미줄이 튕겨 나간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주춤거리면서도 막을 수 있다고 여긴 레베카의 움직임이 더욱 기민해졌다.

정우 역시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날 신경 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레베카에 신경이 쏠려 있어. 이때를 놓치면, 후회할 거야.’

그사이 독은 짙은 안개처럼 더 사방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우의 마법이 정확히 레베카의 빈틈을 노리는 아라크네의 잘려져 나간 턱에 작렬한다.

퀘엑!

막대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치켜들자, 화살처럼 쏘아진 거미줄에 얻어맞은 나무들이 우지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 요란한 소음 가운데에서, 레베카의 움직임은 더욱 예리해져만 갔다.

정우는 훌륭한 서포터였다.

시기적절하게 작렬하는 마법은 레베카로 하여금 혼자 다듬어 온 전투방법을 실현시키는 귀중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레베카는.

휘잉, 휘이이잉!

“칼바람.”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는 검기 하나를 남은 눈알에 꽂아 넣었다.

“케에-!”

뾰족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고위 몬스터가 지닌 피어가 연상되는 비명.

그것에 질려 인상을 구긴 채 주춤 뒤로 물러서던 찰나.

극심한 위기감을 느낀 아라크네가 순간적으로 저주를 이겨 냈다.

오싹!

두 눈알이 사라졌음에도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은 아라크네가 내뿜는 농밀한 살기에 긴장을 머금었다.

‘온다!’

쩍 벌어지는 입.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물 같은 거미줄 다발.

그것을 통로 삼아 울컥, 토해지는.

“……아, 빠?”

한 인형을 본 레베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뭐 해?”

다다다다!

어느새 달려온 정우가 레베카를 밀치며 넘어졌다.

“큭!”

그 짧은 순간, 레베카의 아빠라 불린 인형의 공격이 정우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 * *

형편없이 밀린 레베카가 치밀어 오르는 피를 참지 못하고 주룩 흘렸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엔 독이 있었다.

뱀의 그것처럼 맹독은 아니고, 일종의 강력한 마비제였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다.

다만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로 어깨를 뜯겼는데, 그로부터 시작된 마비가 정우의 사지를 옭아맸다.

갑자기 생긴 짐덩이.

레베카는 전투마저 포기한 채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특유의 영악함을 되찾은 아라크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나마 먼저 잘라 버린 집게 턱과 다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패배가 확정되었을 정도로, 아라크네의 움직임은 활발했다.

‘……미치겠군.’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버린 정우가 눈알만 데굴 굴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차마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맹공격을 펼칠 수는 없는 것인지,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좋지 않아.’

콜록.

기어이 레베카의 입에서 기침이 튀어 나왔다.

입안에 머물렀던 피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제발… 움직여!’

거미줄에 마비 효과가 있을 것이란 건, 환상으로 이들의 과거를 보았을 때 이미 짐작한 사안이었다.

때문에 정우는 거미줄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부웅!

레베카의 아버지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서 그를 조종하며 틈을 노려 거미줄을 화살처럼 발사하는 아라크네는 위험했다.

더불어 정신을 잃은 상태로 아라크네의 거미줄에 조종을 당하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더미가 아니라는 게… 커.’

어떻게 정확히 그녀의 아버지를 꺼내어 앞에 둔 건지는 몰라도, 정우는 참 난감했다.

까딱.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던 정우의 눈이 번쩍였다.

‘거미줄 자체에 당한 게 아니라서 그런지 마비가 생각보다 빨리 풀려.’

한번 마비 증상이 호전되자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대충 몸이 움직이겠다 싶은 찰나, 정우는 레베카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자세를 바로 했다.

“…서포트할게요.”

그 짧은 시간, 레베카는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마력을 상당히 소모한 탓인지 정우보다 더 독에 노출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

하지만 한 가지 낭보가 있었으니, 아라크네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배.

언뜻 보기에 투명하기까지 한 배의 안쪽엔 둥지에서나 볼 법한 고치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정우는 레베카에게 말했다.

“힘이 남아 있어요?”

아직 마비가 덜 풀려 피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레베카가 전면에서 막아주고 있을 때 조금 더 물러서야만 했다.

뒤로 물러선 정우는 점차 자신의 목구멍도 따끔거리는 걸 느끼고는 긴장했다.

레베카는 조금 늦게 정우의 말에 반응했다.

끄덕.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검을 쥔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한 번, 이야.’

눈빛만큼은 여태 본 것 중 가장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이든 빨리해!

그런 비명을 함께 담은 결단의 눈빛을 본 정우는 망설임 없이 지시했다.

“배와 몸통 사이를 갈라 줘요. 다 가르면 좋지만… 어지간하면 반은 갈라야 해요.”

끄덕.

대답할 힘조차 검에 쏟겠다는 듯, 자신의 아버지를 보는 눈빛조차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우는 그 모습에 만족하며.

“지금.”

달려 나갔다.

권고를 무시한 채, 마력회복포션을 하나 더 마신 정우는 필요 없어진 삼단창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양손을 빙글 회전시켰다.

웅웅, 공명하며 기묘한 마법진이 흐릿하게 떠오른 정우의 손 주변이 일렁인다.

으득!

절로 이가 갈릴 정도의 과부화가 걸린다.

‘회복이… 전부 다 된 게 아니야.’

빌어먹을, 욕설을 삼킨 정우가 눈알을 부라리며 심장 어름의 욱신거림을 무시했다.

무리라는 듯 공명하던 손안의 마법진이 이내 우뚝, 형태를 이뤄 나간다.

후웅!

막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 달리던 자세 그대로 꼬꾸라질 뻔했지만.

씨익.

정우는 웃었다.

옆으로 돌아간 레베카와는 달리 정면으로 우직하게 달려드는 자신을 느끼며, 거대한 주둥이를 쩍 벌려 공격을 준비하는 아라크네를 보며.

“입까지 벌려주고. 고맙네. 삼켜!”

정우의 통로가 연결된다.

울컥!

순식간에 입을 가득 채우는 뿌연 녹색의 연기는 마을 전역을 가득 채우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빨리!”

정우의 비명을 들은 레베카 역시 비명을 지르는 근육을 무시한 채.

“…하강.”

땅을 박차 뛰어오른 채로, 아라크네의 옆구리를 베어 나갔다.

콰- 득!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둘의 귓가에 들리며.

케- 에에엑!

아라크네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비명조차 어느새 삼켜지기 시작했다.

마을 전역에 퍼져야 할 독이 한곳으로 집중되고 있으니까.

놈의 입안에 독이 고였다고 생각했을 때.

정우는 통로를 해제한 뒤 다시금 통로를 연결했다.

휘청!

극심한 빈혈이 찾아온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탁하며, 땅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지만.

‘안 돼…!’

스스로에게 벼락처럼 소리친 정우가 무릎을 꿇으면서도 기어이 연결한 통로를 통해.

울컥, 콸콸.

물을 한 점으로 쏟아 냈다.

레베카에 의해 잘린 단면에 물의 장벽이 생긴다.

거미의 배 중간에 생긴 절단면으로 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스스!

“……!”

케, 케케에?

아라크네의 비명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분노로 이겨 내던 저주가 뚝 끊기자 그제야 무기력증 너머의 막대한 통증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거미줄을 끊임없이 내뿜어 독의 확산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독과 물.

두 군데에서 거미줄을 사정없이 끊어 내는 통에 아라크네는 중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마력이었다.

고개까지 치켜든 채 고통스러워하는 놈을 본 레베카가 히죽 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지 모를, 그 긴 시간 동안 되뇌고 또 염원하던 순간이 도래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면서도 아라크네의 옆에 다가간 그녀가 조용히 속으로 외쳤다.

‘잡았다.’

서걱!

반쯤 꿰뚫려 너덜거리던 아라크네의 배가 뚝 하니 잘려 동굴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분리되어 버린 육체.

해독제 하나를 더 꺼내 씹은 정우가 동굴 안쪽으로 기어가듯 휘청거리며 걸었다.

물의 장치가 이 독을 잠시 밀어주기를 바라며.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허물어져 반쯤 정신을 잃어가던 때에.

비슷한 몰골로 겨우 서 있던 레베카가 정우를 부축했다.

그러고는 힐끗, 고개만 틀어 일족의 고치를 보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레베카의 아버지가 떠올랐던 그는, 그녀의 다른 손에 검이 아닌 고치가 질질 끌려 따라오고 있음에 적잖게 안도했다.

아래로 기울어진 동굴로 점차 물이 흘러들어오고 있을 때.

정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것이 생겨났다.

우웅, 화려한 진동.

마치 팡파르처럼 들리는 진동과 함께 나타난 게이트는 흐릿해지던 정우의 정신을 가로질러 박혔다.

‘클리어한… 건가?’

퀘스트 내용은 제대로 클리어가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정우는.

도깨비불.

수장의 말을 떠올리고는 입술만 달싹해 중얼거렸다.

“…죽였잖아요. 이러다… 다 죽겠어요.”

독의 장치를 언급했을 때부터 같이 고민했던 계획.

그 결말을 앞두고서 고치에 갇혀 있기만 한 일족을 본, 정우의 눈빛이 조금은 암담해졌다.

자신은 이대로 게이트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클리어?

이미 성공했음을 알려주는 게이트와 정신없이 떠오른 메시지가 클리어를 증명했다.

어떤 방향으로 클리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찝찝하게 성공하고 싶진 않아.’

은인이라는 말에 부합하고 싶었다.

힘이 부족하여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했지만.

환상 속에서 본 일족의 모습이 너무도 평온해 보여 정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죽지 않을 거요.”

그런 정우의 귓가에 중후한 음성이 들렸다.

수장이었다.

반쯤 힘겹게 고개를 든 정우의 눈에 보이는 건, 레베카를 잡기 위해 토해 낸 그녀의 아버지.

“…아.”

-걱정 마시오. 마지막엔 내가 맡을 테니.

의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독의 장치란 패를 정우가 꺼내 들었을 때, 수장 역시 가만히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수장이 레베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아!’

하지만 문득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우는 이해가 되는 면이 있어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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