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계획의 진행
-시간이 없으니 질문은 하지 마시오. 일단 이것부터 읽으시오.
후욱, 날아오는 책을 받아든 정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장을 보았다.
일렁.
마치 턱짓하듯 한 차례 도깨비불 같은 형상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
정우는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읽혔다.
그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정우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
화르르륵!
책에서 떠오른 영상 하나가 눈앞에서 홀로그램처럼 움직였다.
그것은 실처럼 뿜어져 나와 주변을 맴돌다, 앉아 있는 인간 형태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지백해를 누비던 그것이 심장 어름에서 자리를 잡고는 잘게 진동을 시작한다.
정우는 그것이 마녀의 공명이라는 걸 알았다.
마녀와의 관계는 애매했지만, 지금까지는 적어도 같은 적을 둔 아군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정우는, 그들의 마법을 보고 결정할 셈이었다.
배울 것인지, 말 것인지.
유구한 역사를 기록한 지성체였지만 이들은 엄연히 침략자의 일부였다.
몬스터.
적의만 불태우던 그것과는 달리 대화가 가능하고 공존이 가능했지만, 상대 불가능한 적을 앞에 둔 잠깐의 변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심장 어름에서 시작되는 공명이 이내 육체가 아닌, 육체 밖의 ‘외부’와 공명을 하기 시작하자 의심이 급격히 반감되기 시작했다.
‘왜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정우는 홀린 듯 정신을 집중해 영상을 시청했다.
외부와의 공명.
정우는 그걸 본능적으로 ‘옳은’ 방법이라 규정했다.
‘훌륭해!’
식견이 부족함에도 정우는 마녀들이 언급한 이 방법이 매우 월등히 훌륭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배운다.’
결정을 내렸다.
정우는 영상의 초입을 따라 했다.
‘오래 걸려도… 꼭 배우고 간다.’
꿀렁!
스프가 한 차례 열기에 공기를 내뱉는 것처럼 마력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으로부터 시작된 마력이 이내 정우의 피부에 닿고, 피부를 뚫으려 노력하던 마력 한 방울이 기어이 외부에 닿았다.
짜르르르르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정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던 배움.
그 초입이 벌써 끝나 버렸다는 사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맛’에 빠져들어 탐닉하고 있을 뿐.
후웅, 우웅!
한차례 불어온 바람이 정우의 전신을 노곤하게 누비고 사라진다.
바람의 형태를 빌린 마력이 이내 정우의 피부를 창문 삼아 자유롭게 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작된 공명.
그것은 가히 지진에 가까운 형태로 정우를 강타했고.
“……!”
확장된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기가 맺히며 밝게 빛났다.
* * *
[ 특성 ‘공명’을 습득하였습니다. ]
짧은 메시지.
성공을 알리는 축포와도 같은 그것에, 정우는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단번에 바뀌어 버린 감각에 얼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건, 또 놀라운 일이오. 매우….
한참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음성은 경악과 의심.
그리고… 좌절에 가까운 경외였다.
수장의 눈엔 정우가 괴물로 보였다.
1초?
아니다.
그보다 더 걸리긴 했다.
하지만 그 또한 터무니없이 적어 놀랍긴 했지만, 막상 변화를 시작한 이후엔 놀라움이란 단어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마녀의 공명은 수단이다.
공명을 통해 마력을 일순간 증폭시키고, 증폭을 통해 같은 마력으로 보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비밀이었다.
수단이 간단하다 보니 그들의 방법을 따라 한 여러 천재들이 있었지만, 마녀처럼 전승에 가까운 안정성을 확보한 이들은 없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그 방대한 역사에서도.
오죽했으면 모든 마법과 마력의 왕이라 불렸던 ‘그’조차 자신들의 보물을 내어달라 청했을까.
그런 보물이자 능력인 공명을.
-배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군. 하……!
절로 나오는 헛웃음에 도깨비불이 일렁거렸다.
“하아……!”
격정에 찬 긴 숨을 내뱉은 정우의 눈이 떠졌다.
어딘지 모르게 깊어진 눈이 도깨비불과 마주쳤다.
“이게… 공명?”
-아니오. 그건….
수장이 부정했다.
“아니… 라고요?”
예상과는 다른 말에 정우가 당황해 물었다.
-우리의 공명은 그대가 본 것에 지나지 않소. 특별하긴 하나… 유일하진 않았소.
-하나… 당신의 것은… 유일하오.
-증폭에 국한되지 않고… 대기의 마력과 공명하는 그것을… 대체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수장이 두둥실 움직였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회랑은 불안전하오. 부디… 방법을 찾아주시오. 우리의 구원을…… 그대에게 맡기겠습니다.
변한 말투.
무거워진 공기까지.
그리고 다가온 책 하나가 멋대로 펼쳐져 정우의 뇌리에 박혀 들었다.
레베카가 원하던, 장치의 작동법이었다.
* * *
파앗!
“…눈을 뜨셨군요!”
레베카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를, 정우가 무심히 주시했다.
“왜, 그러시죠? 혹시… 공명을 얻지 못하신 건가요?”
후욱, 불어 닥치는 염려에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습득, 했어요.”
“후우. 놀랐어요. 근데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신 거죠?”
“왜 ‘마법’을 배우지 못한 건지 알겠어서요.”
“예?”
정우가 입맛을 다신 후 턱짓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 이동부터 하죠.”
“장치를 작동하시는 건가요?”
“네. 해야죠. 하지만 방법을 달리해야겠어요.”
“…방법이요?”
정우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레베카는 애매한 표정으로 보았다.
무언가가 바뀌었다.
‘……뭐지?’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지금에 집중했다.
“그 방법이라면… 일족을 구할 수 있는 건가요?”
“적어도 확률은 높아지겠죠.”
“좋아요.”
레베카가 앞장섰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앞장서는 건가요?”
“이 방향이라면 하나밖에 없어요. 독! 왜… 이걸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와요.”
“하긴, 여긴 당신의 마을이니까요. 아, 제가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죠?”
“5분 정도요.”
“……!”
한 차례 놀람을 감추지 못했던 정우는 레베카와 빠르게 이동했다.
앞을 막아서는 마녀는 없었다.
“제 앞으로 다 불러들인 것 같군요.”
정우의 말에 레베카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족의 형상을 한 더미가 모여서 자신을 막는다면, 과연 쉽게 벨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았다고 여겼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영악한 놈이라 다른 수를 쓰기 전에 얼른 ‘더미’부터 처리하죠.”
“……!”
수장은 노련했다.
또한 지혜로웠다.
아라크네의 활동을 저지시키기 위해 저주를 감염시켜 모든 마녀에게 전파한 건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더미를 만들어 소모되는 마력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도 훌륭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리와인드. 그게… 최고의 선택이었다.’
시간의 반복.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마녀를 버려야 하고, 마녀를 버리면 기껏 얻은 ‘힘’을 포기해야만 했다.
유예된 판단 속에서 아라크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지금을 맞이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우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가능하다. 단 한 번의 틈만 만들면… 놈을 노릴 수 있어.’
장치는 하나가 아니었다.
불, 물, 땅, 바람, 독.
다섯 개의 장치가 서로 연계되어 있었는데, 그중 불은 기본적인 방어 단계에서도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독은 가장 마지막.
최후의 보루.
‘해독제는 있어. 효과가 길지 않지만… 여긴 던전이야. 퀘스트만 깨면 게이트가 생성될 거고, 난 그 게이트를 통해 나가면 돼.’
정우는 갱신된 퀘스트를 떠올렸다.
[ 마녀 일족의 구원 ]
아라크네에게 사로잡혀 마력원이 되어 버린 마녀 일족을 구원하라.
등급 : A
보상(1) : 알 수 없는 열쇠의 소유권
보상(2) : 마녀 일족의 계약 실행
마녀 일족을 구하려면 아라크네를 없애야 했다.
아라크네는 이 던전의 숨겨진 보스.
‘잡으면 분명히! 게이트가 생성된다!’
그렇게 판단한 정우는 거침없이 독의 장치 앞에 다다랐고.
우웅!
마력을 한 차례 휘감아 외부와 공명시킨 후 장치를 작동시켰다.
구구구구!
주변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과 함께 낮은 가동음이 둘의 귀를 자극했다.
“…어떻게 공명이 이렇게 빨리…….”
뒤에 서서 정우를 보던 레베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법을 다루지 못할 뿐이지,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장 뛰어난 마법 실력을 자랑했던 수장도, 이토록 빨리 장치를 가동하진 못했을 것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치이이이!
어디선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익.
정우는 장치의 비밀 공간에서 작은 알약 여러 개를 꺼내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은 레베카가 마른침을 삼킨다.
누대에 걸쳐 완성한 독은 용조차 죽일 수 있을 거라던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뒤늦게 강타했다.
“자, 잠깐만요. 이게… 이 독은 저희 일족조차 공멸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알아요.”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작동시켜도 돼요?”
“이미 작동시켰는데요? 그냥… 따라와요. 구해줄 테니까.”
“으….”
잠깐 사이에 바뀐 분위기에 레베카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
“독이 퍼지기까지 1분이 걸려요. 그사이, 우리는 물의 장치를 작동시켜야 해요.”
“왜요? 독이 씻겨나갈 텐데.”
“일단 이동해요.”
“……그 방향이라면… 이쪽이에요.”
레베카는 미심쩍은 표정을 하면서도 빠르게 안내했다.
이미 벌어진 일.
망설임은 사치였다.
하물며 이 독은 해독제로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강력한 독.
스스로 걸어 버린 타임리밋에 레베카가 속력을 더했다.
힐끗.
자신을 뒤따라오는 정우를 본 그녀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든 게 외부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안도가 되었다.
자신의 손에….
평생 쥘 수 없다고 여긴 지팡이 대신 쥔 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속이 별로였으니까.
때문에 정우는 보는 그녀의 눈빛은 묘했다.
그런 레베카의 눈빛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우의 움직임엔 막힘이 없었다.
장치의 작동법과 더불어 위치.
그리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내린 결론까지.
‘설마하니 회랑과 던전의 시간차가 그렇게 심할 줄 몰랐어.’
5분.
하지만 정우가 체감하고 겪은 시간은 족히 두세 시간에 달했다.
시간이 없다고 한 것치고는 너무도 빨리 공명을 습득하고, 장치의 사용법을 이해해 버려 여유가 남아 버렸다.
회랑의 열쇠가 제 힘을 잃고, 정우를 내쫓을 때까지.
‘얻은 게 많아!’
정우는 쉬이 얻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두근.
기대되었다.
‘미친 짓이야. 막다른 길을 선택해놓고 기대가 된다니….’
하지만 나아가는 정우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회랑 가득히 꽂혀 있던 수많은 마법서 가운데에서.
-그건…… 후회할 수도 있소. 원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오.
-……내가 문제였구려. 혹여나 당시의 날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철회하길 바라오. 그건 내 영역을 엄연히 뛰어넘은, 아라크네란 거미의 마력 실을 이용한 편법에 불과했소. 우리조차 결계를 다루는 건 엄청난 노력과 그에 준하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오.
-하물며…….
-공간이라니.
수장의 말을 떠올린 정우의 손바닥이 석탑 같은 물의 장치를 앞두고 빙글, 회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