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급 던전의 찬탈자-23화 (23/293)

23화

-공간지각능력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력이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지만, 대마법사 ‘질’은 그보다 중요한 자질이 있음을 만천하에 언급했다.

“마력?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아무리 많은 마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간을 굽어보는 능력이 없는 한, 제한된 공간에서만 싸울 수 있는 반쪽짜리 마법사에 지나지 않아.”

공간을 굽어보는 능력.

질은 그렇게 정의했다.

“내 공간지각능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으면, 마왕은 내 손에 죽었을걸?”

그렇게 말하며 숨길 수 없는 진한 아쉬움을 그려내던 그녀의 모습은, 몇 달간 포털 순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환각으로 잠깐 보았던 마을의 정경.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외워두었던 던전의 지도.

새로이 생겨난 목적지까지.

미궁이라는 단어가 붙을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길이 가진 특성을 집어내는 센스가 적절히 버무려졌다.

대마법사 질이 정우의 판단을 말로 들었다면, 당장에 배움을 청했을 정도로 지금의 선택은.

화아아아아악!

가히 대단한 위업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나무와 넝쿨 벽으로 가로막혔던 길이 청량한 느낌과 함께 환하게 넓어진다.

어딘지 모르게 빛조차 반감되어 칙칙해 보이던 통로와는 대조적인 밝음이, 모습을 드러낸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중간이 뚝 잘린 반투명한 선 하나.

‘거미줄….’

여느 거미줄보다도 두껍고 탄탄해 보이지만, 어딘가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모습이 정우의 눈을 사로잡았다.

휘익!

“……!”

정우가 거미줄을 보았을 때, 거미줄 역시 정우를 향해 잘린 단면을 뱀의 머리처럼 홱 돌아 움직였다.

오래된 시간의 흐름 동안 변화가 없던 공동에 생겨난 유의미한 변화에 아라크네가 저주를 이기고 반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돌진은 먹이를 노리는 뱀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매직 미사일!”

유일한 공격 마법을 쏟아붓는 정우의 대응은 먹이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휘어지는 거미줄의 단면을 주시하며 정우 역시 발을 굴러 움직였다.

공동은 넓었고, 거미줄의 속도는 저주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처음과는 달리 점차 느려졌다 빨라졌다를 반복하며 정우를 노리고 쇄도했다.

하지만 정우는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힐끗.

여유를 가질 때마다 주변을 훑는다.

가만히 보면 정우의 움직임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이곳에 결계가 있는 건 분명해.’

하지만 모든 걸 집어삼켜 버린 아라크네의 거미줄조차 결계는 발견하지 못했다.

정우의 눈에도 보이는 건 없었다.

비단 눈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이리저리 결계를 느껴보고자 노력했지만, 딱히 오감에 와 닿는 이질감은 없었다.

하지만 정우에게는 아라크네에겐 없는 기물이 하나 있었다.

알 수 없는 열쇠.

목적지까지 나아가는 도중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거미줄의 단면이 저주를 못 이기고 잠시 틈을 보였을 때.

우웅, 우우웅!

“……!”

열쇠의 진동이 거세지며 결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정우의 손에 다시 열쇠가 들렸을 때.

스르르.

마치 장막이 쳐지는 것처럼, 투명해 보이지 않던 그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콰직!

아라크네 역시 그것을 발견하고는 일순간 저주를 이겨 내고 움직였다.

가뜩이나 다른 것보다 굵고 탄탄하던 거미줄이 낭창거리는 채찍처럼 변해 바닥을 후려쳤다.

“으음….”

드러난 결계의 자물쇠를 찾아 열쇠를 사용하기만 하면 끝인 순간을 앞두고, 정우가 몸을 비틀거렸다.

거미줄이 만들어 낸 진동의 여파가 생각 이상이었다.

‘위험해.’

아무래도 열쇠를 사용하기 전, 저 거미줄을 잠시라도 묶어둘 필요가 있는 듯했다.

파직!

정우가 비틀거리는 사이 결계에 접근을 시도했던 거미줄이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떨며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결계가 막아주고는 있나 보군.’

시간이 없다고 첨언하던 것치고는 거미줄은 결계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덕분에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까강?

“…큭!”

정우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에 움찔거리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콰앙!

‘…완전히, 죽일 셈이군.’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인 것을 본 정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주가 아니었으면 벌써 당했다.’

순간의 느려짐.

그게 정우의 목숨을 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구했다.

결계를 본 이후부터 아라크네의 거미줄의 움직임은 마치 뛰어난 플레이어가 손수 휘두르는 채찍의 그것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경로를 차단하기도 하며 노련한 조련사처럼 굴어댔다.

정우로서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결계의 위치만 파악했을 뿐, 모습을 드러낸 결계의 내부는 여전히 투명하여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물쇠의 위치조차 상황이 급박한 탓에 파악을 하지 못했다.

코앞에서 발이 묶인 상황.

정우로서도 조금은 무리를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버렸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도박에 가깝지만 움직여야 해.’

고민은 길었지만 판단은 빨랐다.

결정과 동시에 정우의 마력이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몇 번의 전투와 거미줄과의 대치를 통해 사용한 마력의 양이 상당했다.

욱신!

단번에 심장 어름이 욱신거려지는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정우의 마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력 고갈.

마법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며 염려하는 단계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한 차례 빙글 도는 시야를 붙잡고 몸을 날렸다.

측면에서 드릴처럼 회전하며 가격하는 매직 미사일 다발에 얻어맞아 휘청거리는 거미줄이 목표였다.

그가각, 가각!

마력으로 이루어져 단단하기 그지없지만.

‘한 점을 노려서….’

삼단창의 창날이 푸르스름하게 물든다.

‘검기!’

무릎이 살짝 꺾였지만, 눈을 부릅뜬 정우의 팔은 한껏 뒤로 젖혀져 한 점을 노리고 쭉 뻗어 나간다.

거미줄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찔거렸지만, 조금 늦게 도달한 매직 미사일의 충격에 다시 한번 위치가 고정된다.

시간차공격.

일점처럼 변해 버린 창날이 점점 기세를 잃어가는 매직 미사일의 끝자락에 닿아, 거미줄의 단면을 쩡 하고 때린다.

때마침 저주가 위세를 부려 거미줄이 잠시간 탄력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는 아주 간단했다.

쩌적!

고목 나무의 껍질이 뜯기듯, 아주 가볍게 거미줄의 일부가 뜯겨 나간다.

파르르!

고통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훅, 뒤로 당겨져 이리저리 떨어대는 모습을 본 정우가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뛰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한다고 해서 많은 게 바뀌진 않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정우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던 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던 것처럼, 알 수 없는 확신이 고개를 내밀었을 뿐이다.

이 결계를 해제하는 것이 먼저다.

환각에서 마녀의 수장이 언급하던 모든 마법이 종국엔 레베카와 연결되었던 걸 잊지 않았다.

짜르르 떨리는 몸을 이끌고 결계의 주변을 살펴보던 정우의 눈이 가늘게 경련했다.

‘보이지가… 않아?’

자물쇠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우와 거미줄이 눈을 마주쳤다.

눈 따위는 없는 그것에게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

그 순간 정우는 깨달았다.

자신이 멍청했다는 것을.

‘열쇠의 사용법을 알아내라고 한 게 이유가 있었구나.’

퀘스트는 분명히 열쇠를 ‘사용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열쇠의 사용법을 ‘알아내’라고 말했다.

그 차이를 정우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꼿꼿하게 치솟아서 용수철처럼 굽어진 거미줄을 노려보며, 정우의 모든 기감이 열쇠와 결계로 향했다.

지징!

그제야 결계에서 어딘가 기묘한 공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하던 그것은 점차 덩치를 불려 나가는 스노우볼처럼 커져 정우의 전신을 전부 공명시켰다.

‘……큭!’

어찌나 공명의 정도가 세던지 정우는 자칫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급속도로 다가오는 거미줄의 경로를 읽으며, 정우는 허공에 대고 열쇠를 ‘꽂아’.

끼리리릭!

돌렸다.

쿠오오오!

섬칫!

절로 뒷목이 오싹거릴 정도의 존재감이 훅 하고 퍼져 나간다.

정우의 전신을 탐닉하고 지나간 존재감이, 화살처럼 쏘아지며 정우를 노리던 거미줄을 겨누고.

서걱!

가볍게 베어 낸다.

그 장면에 눈을 번쩍 뜬 정우의 시선으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외형의 검사가 등장하여 재차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잠깐 흔들 정도의 짧은 바람.

그것이 불었을 뿐인, 어딘지 모르게 평화롭기까지 하던 공동 한가운데에.

쩌적, 쩌저저저적!

균열이 생겨났다.

정우의 동체 시력을 뛰어넘는 검격.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잘린 단면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빠르게 퍼져 나가더니 이윽고 벽을 타 넘어 사라진다.

그것을 보며 으르렁거리던 검사가 고개를 돌려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이글거리는 눈빛.

그 속에 담긴, 깊이를 알 수 없는 진한 분노.

그 눈빛을 마주한 정우는 저도 모르게 한 발.

척.

앞으로 나섰다.

쿵!

* * *

다행히 말은 통했다.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S급에 준하는 A급 던전에서 등장하는 아주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아무리 봐도 인간과 전혀 차이점이 없어….’

검사치고는 하얀 피부.

딱히 근육질은 아닌 육체는 여느 여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여리여리했다.

그러나 모든 플레이어가 그렇듯 마력이 깡패였다.

본인의 재능과 마녀의 피.

그리고 수장이 연결한 회랑에서의 공명까지 깃들어, 일족의 멸망 앞에 무력했던 처녀를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적어도… A급 이상.’

그 또한 정확한 건 아니었다.

환각의 짧은 장면 속에서 꽤나 밝던 소녀는 분노의 화신이 되어 이제는 어정쩡한 길이가 되어 버린 검을 손에 쥔 채 정우를 안내했다.

‘이걸… 안내라고 볼 수 있나?’

콰득!

일검에 벽이 반파되고, 이검에 벽에 구멍이 뚫린다.

단단하기 그지없던 벽이 비스킷처럼 와그작 부서지는 모습은 정우에게도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멈칫!

무작정 길을 뚫던 그녀가 움찔했다.

푸른 피부의 마녀.

엄연히 적으로 분류된 그것들이 레베카와 동행한 이후로 처음 등장했다.

흔들리는 동공.

살짝 벌어져 잘게 떨리는 입술.

울컥, 치미는 격정이 이기지 못한 그녀의 손이 처음으로 축 늘어졌지만.

스스스스!

예의 검은 안개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정우와 레베카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 퍼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하여 정우가 나섰다.

힐끗, 레베카의 안색을 본 정우는 별말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마녀를 제압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저 적의로 불타올라 빠르게 아라크네에게 도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갈 뿐이라고 여겼던 레베카의 진의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일족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는 그들이 아니기에.

더미라지만 엄연히 거미가 조종하는 적이라는 사실을, 적의만 키운 처녀는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아……!”

연기로 화해 사라지는 모습에는 눈물까지 비치는 레베카로 인해 공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정우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르릉.

정우의 작은 한숨에 레베카는 검을 틀어쥐었다.

검 특유의 기묘한 울음과 함께 허공이 한 차례 갈라졌다가 합쳐진다.

왜? 라고 묻기 이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망설이지, 않겠어요.”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앞장서서 걸었다.

레베카도 벽을 허물지 않고 정우를 뒤따라 걸었다.

또다시 등장하는 마녀.

무너지는 마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끝내 눈을 돌리지 않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쪽이 아니에요. 먼저… 들를 곳이 있어요.”

“어디로요?”

“마력이 고갈된 거 아닌가요. 일단 회복을 시키죠. 상황이 이래도… 아마, 남아 있을 거예요.”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슬픈 낯빛으로 정우를 안내했다.

한참 걷던 정우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처음만 하더라도 자신을 향해 접근하던 마녀의 기척이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는 것을.

‘뭐지?’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온함에 어색해하던 정우가 레베카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아, 여기. 있네요. 다행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