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잠실에 나타난 괴생명체는 실시간으로 전 길드에 보고가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저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조작된 영상일 확률은?”
“그러기엔 너무 많은 영상이…….”
“몬스터야 뭐야?”
“아직까지 파악 중에 있습니다.”
“다른 길드에서 들어온 소식은?”
“일단 병력을 보내긴 한 것 같은데…….”
“그럼 우리도 보내야지! 빨리 보내서 알아봐.”
서울에 있는 길드뿐만이 아니라, 수도권 전역에서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들어온 보고와 영상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약 100여 미터의 움직이는 생명체.
톱 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산도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잠실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1급 대피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 무렵 막 방벽을 넘어 한강에 발을 디딘 태정은 다리에서부터 보이는 엄청난 인파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러면 안 돼.”
[무엇이 말이냐.]
“돌아가. 돌아가 얼른.”
[돌아가면? 넌 지금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더군다나 의식이 불명한 부상자 하나에 기술을 쓸 수 없는 네 친구, 거기에 치료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들러리들까지. 무슨 수로 데려갈 거지?]
카이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이대로 그가 돌아간다면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에 잡히든 몰려온 서울 수비대에 잡히든 그것도 아니면 이미 이 소식을 듣고 출발한 길드 병력에 잡히든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갈 경우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때 프리지아가 나섰다.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정말?”
=단 조건이 있어.
“뭔데?”
=남극 기지에서 얻은 마석. 나도 지분을 줘.
[이게 또 개수작을…….]
=그럼 이대로 잡히든가.
“얼마나?”
[그건 나의 것이다. 주면 안 된다.]
“넌 조용해. 얼마나 주면 되지?”
=20%
[이런 정신 나간… 거절이다.]
=넌 협상 대상이 아냐. 어떡할래? 늦기 전에 선택해.
“기다려. 제라드.”
-예, 주인님.
“프리지아에게 20%를 주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는 거지?”
-상당한 손해를 입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계신 양으로 볼 때, 그 손해가 주인님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 그럼 10%.”
=뭐? 고작 10%? 난 내가 가진 걸 모두 털어야 하는데. 그건 타산이 맞지 않아.
“한 번만 봐줘.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
=10%는 죽어도 안 돼.
[욕심만 더럽게 많아 가지고선. 10%도 내 입장에선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게 다 네놈이 늦장을 부려서 일어난 일이야. 누굴 탓해. 네가 제때 나왔으면, 이 꼬마의 몸 상태가 이 정도까지 망가지진 않았겠지. 그럼 여기 있는 모두는 쉽게 탈출할 수 있었을 테고.
[아무리 그래도…….]
“좋아. 그럼 11%. 대신 제라드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마석이란 거 더 얻을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좀 더 챙겨 줄게. 됐지? 이번 한 번만 부탁해, 프리지아 님.”
태정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그녀가 손을 들었다.
=11%는 인건비도 안 나오는데… 좋아. 네 태도가 맘에 들었어. 이놈부터 집어넣어.
“고마워.”
협상을 끝낸 태정은 바로 언령을 읊어 카이저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그를 비롯한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추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이 놀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주변이 어둠으로 바뀌더니, 다시 순식간에 배경이 드러나며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여긴…….”
-제닉스 본부 앞입니다.
“뭐야, 루프 게이트?”
=비슷해.
“이런 거 막 써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해왕에게서 얻은 시리우스의 위장석이 없었다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거야. 덕분에 난 어렵게 얻은 그걸 날렸지.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에.
[처음부터 그걸 썼다면…….]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 봉인된 방에 들어갔을 때 이걸 사용했다면, 이 꼬마는 그 길로 온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테니까.
“그렇구나. 그런데 그래도 좀 이상한 게 하나 있는데.”
=또 뭐?
“내가 그 방을 빠져나왔을 때, 왜 카이저를 소환하라 그런 거지? 그냥 네가 데려다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 물론 따지려 드는 건 아니고. 천신병은 노출돼서 딱히 좋을 게 없어서 말이야.”
=너 진짜 순진하구나.
“내가?”
=그땐 상황이 너무 긴박했어. 협상 따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 1초가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데려다주고 네가 입 싹 닦으면? 난 어렵게 얻은 내 힘만 날려 버리는 꼴이 되겠지.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제 욕심을 챙기려 했다니. 역시 상종을 할 놈이 못 된다.]
=어쨌든 위기는 넘겼잖아? 난 어디 또 있을지 모를 위장석도, 지금까지 얻은 힘도 모두 날렸어. 이 정도면 너보다는 내가 이 꼬마에게 훨씬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아무튼 알았어. 고마워. 약속은 지킬게.”
=당연… 하… 안… 소…….
“왜 그래?”
-힘을 모두 소진해 강제 봉인 당하셨습니다.
“그렇군. 그보다… 나도 몸이 좀…….”
꺼져 가는 의식 속 멀리서 누군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역대장님!”
* * *
한산도 본청.
몇몇 간부가 하나의 영상을 보며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게 본동 수비대가 보내온 영상인가?”
“예. 다른 길드가 숨기지 않고 있다면 이게 아마 최근접에서 찍은 영상일 겁니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 거대한 것이 갑자기 사라졌어. 이게 영상으로 봐도 믿기지가 않는데, 현장에서 봤다면… 음. 이게 대체 뭘까? 이 괴생물체가 최초로 발견된 곳이 금사자라고 했나?”
“예. 그런데 말을 아끼는 눈치더군요. 함구령이 떨어진 듯 보였습니다.”
“길드 피해가 막심한 걸로 알고 있는데 함구령이라… 뭔가 구린 것이 있나 보군. 최철호를 만나 봐야겠어.”
“그는 지금 의식불명이라 만나실 수 없을 겁니다.”
“그 정도나? 그럼 김용진은?”
“그도 지금 부상이 심하다고 합니다.”
“허. 길드 마스터가 의식불명에 부단장도 부상을 입었는데 입을 닫고 있다?”
똑똑.
“들어와.”
“길드장님, 알아냈습니다. 그 거대한 것의 정체 말입니다.”
“오. 그게 뭐던가.”
“제닉스 길드의 히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닉스 히든? 출처가 어디야?”
“금사자 길드입니다. 일전에 저희가 매수해 놓은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옛날에… 그놈들은 그때 뭘 받아 처먹고 돌아섰다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 쪽으로 이적하는 조건으로 답을 얻어 냈습니다.”
“그런 간신배들을 다시 받아야 하다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구만.”
“그래도 한 번은 이리 써먹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이 말도 안 되는 거대한 놈이 제닉스 히든과 연관이 있다, 이 말이지? 이거 우리 생각보다 위험한 것 같은데. 김용진이 당했을 정도면,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란 소리야. 근데 그자는 대체 거길 왜 갔다던가?”
“그곳에 있는 친구를 구하러 온 것 같다고 하더군요.”
“친구?”
“예. 그 금사자 마스터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뭐야? 그럼 남의 여자를 뺏으러 거길 쳐들어갔단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이게 제가 들어 보니 좀 복잡한데…….”
간부는 최대한 자신이 들은 것을 쉽게 풀어 설명했다.
그러자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그를 비롯한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구만. 최철호 그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군. 납치 감금에 협박… 강제 혼인이라. 이런 것들도 톱 텐이라니, 쯧쯧. 그리고 그래도 그렇지 금사자 본진에 쳐들어가다니. 담이 큰 건지 생각이 짧은 건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도 금사자는 연맹에 가입된 길드입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분쟁이라 하지만 이건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바로 옆이 도심인데 저런 큰… 스킬은.”
“민간인들의 피해는 없다지 않았나.”
“그래도…….”
“그럼 우리가 응징이라도 해야 된단 말인가? 저런 치졸한 짓을 한 놈을 옹호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네.”
“하지만 불러들여 조사라도 해야지 않겠습니까. 저게 뭔지는 알아야…….”
“나도 그러고 싶네만 그가 순순히 응할 것 같은가? 개인 분쟁에, 도심의 피해도 없는데, 무슨 건수로 소환을 해 조사를 한단 말이야. 다른 길드라면 몰라도 강제로 끌고 오기엔 제닉스는 이미 덩치가 너무 커 버렸어. 다른 스페셜리스트에 든 길드들이 좋은 감정을 가지겠냐 이 말이야. 게다가 히든이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나. 국가전이 코앞인 마당에 불참이라도 한다면 그땐 어쩔 텐가. 저들의 뒤에 있는 클럽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 금사자가 싸 놓은 똥을 뻔히 아는데, 강제? 일만 복잡해질 뿐이야.”
“그럼 이대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겠단 겁니까?”
“소환은 접고. 자리나 한번 만들어 봐. 딴 건 몰라도 궁금한 건 못 참겠으니까.”
* * *
의식을 잃은 태정이 눈을 뜬 것은 만 사흘이 지나고 나서였다.
익숙지 않은 공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내 한 명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깨어나셨습니까, 대장님.”
“여긴…….”
“본부 병원 vip실입니다.”
“아. 저기 혹시… 저와 함께 왔던 이들은?”
“청룡대주께선 회복 중이시고, 나머진 귀빈실에 모셨습니다.”
“지금 좀 보러 갈 수 있겠습니까?”
“그야 상관은 없지만 아직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뭐 다친 곳도 없… 억.”
아무 일 없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선 태정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흘간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습니다. 정 가시려면 제가 활력이라도…….”
벌컥.
“자네 괜찮나!”
“지역대장, 눈을 뜬 겐가?”
“깨어나셨습니까?”
임시방편으로 활력이라도 넣어 주려던 병원 소속 사제는 우르르 몰려들어 온 인파에 구석으로 밀려났다.
길드장 이하 참모진과 간부들.
그들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을 너무 크게…….”
덥석.
“이보게, 이보게. 이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와 상의라도 했어야지. 거기가 어디라고 둘이서만 간 겐가.”
길드장 양태식이 그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아냐. 몸은? 몸은 괜찮은가?”
“예. 돌봐주신 덕분에.”
“다행이네. 다행이야. 깨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됐어. 그럼 된 거야.”
“저… 혹시 청룡대주는…….”
“완전히 회복해서 이리로 오는 중일 걸세.”
“다행이군요.”
“함께 온 사제들이 초동 조치를 잘해 놓아서…….”
쾅!
양태식의 대답이 끝을 맺기도 전, 무섭게 문이 박살 나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한상진이었다.
간부들이 있든 없든 인파를 가르며 앞으로 나온 그가 태정 앞에 엎드렸다.
“흐어억. 형님! 형님을 지키지 못한 이 못난 동생을 용서치 마십시오.”
목 놓아 흐느끼며 머리를 조아리는 그.
그 모습에 간부들이 이게 뭔가 싶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 분위기를 느낀 태정이 그를 말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닙니다, 형님. 형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으니 저는 맞아 죽어도 쌉니다. 이익.”
쫙! 쫙! 쫙!
자신의 양 뺨을 때리며 자해를 하는 한상진의 기괴한 모습.
점점 더 간부들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 그만해.”
“아닙니다. 저 같은 건 있어 봐야 뭐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이익.”
“그만하라니까.”
“형님, 차라리 저를 때리십시오!”
“제발 부탁…….”
“이 못난 놈 살아 봐야 뭐 하겠…….”
“명령이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너와 나의 관계는 끝이다.”
멈칫.
그의 경고에 거짓말처럼 한상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나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는 그.
“삼가 청룡대주! 형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하하하하하.”
병실이 떠나갈 정도로 시원한 너털웃음이었다.